# 93
리그너스 대륙전기 093화
“어? 어어?!”
호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오자 그나이 칼츠만을 비롯해 레드 벨벳, 로우덴의 시선이 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선택의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흠……. 그렇군. 자네들은 여신 라헬의 손에 의해 이 세계로 온 존재들이니,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군.”
“뭐, 대부분 그런 편입니다만…….”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며 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팔 왕국에 대한 라헬교의 준동.’
이는 자신이 플레이했던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등장하는 이벤트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분명 그 이벤트가 틀림없어!’
보통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등장하는 이벤트는 게임 내에서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이벤트로 인해 세력이 뒤바뀌는 일이 있다면 플레이어들이 힘겹게 쌓아올린 노력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삼국지 게임에서 등장하는 이벤트인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동탁이 낙양을 차지하게 되는 설정이나 관도대전으로 인해 원소의 세력이 쪼개지고 조조가 원소의 땅을 차지하게 되는 일 정도의 이벤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도 존재했다.
하지만 라헬교의 준동은 그 이상으로 리그너스 대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초대형 이벤트였다.
‘라헬교의 준동.’
이 이벤트가 리그너스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은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C 아니, D등급의 수준이었다. 초반에는 인간들을 제외한 다른 종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팔 왕국 내부에 라헬교가 준동하고, 계속된 포교를 통해 골든 크로우를 위시한 인간들의 왕국에서 라헬교가 국교로 제정되는 순간…….’
영향도가 A등급 아니 S등급으로 올라가고, 리그너스 대륙에 헬 게이트가 열렸다. 천족과 인간이 연합해 여신 라헬의 뜻을 펼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종족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가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라헬교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게 또 문제였다. 영지 생산량의 10%를 바쳐야 하는 십일조를 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신 라헬을 모시지 않는 종족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라헬교가 요구하는 성전에 자신의 소중한 군대를 보내야만 했다.
결국 영지의 발전이 더뎌지고 점점 게임의 엔딩을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다. 라헬교를 믿는 세력이 점차 늘어날수록, 플레이어의 적은 그만큼 강해지니 말이다. 그 때문에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쉽고 빠르게 클리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천족으로 게임을 시작하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족으로 게임을 하게 되면 진 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여신 라헬의 통수를 느끼지 못했다. 여신 라헬이 최후의 창조신이 되는 것으로 게임이 마무리되니 말이다.
‘하지만 대륙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큰 만큼 잘 발생하지 않는 이벤트였지. 이벤트의 성공 확률도 굉장히 낮은 편이고.’
게임에서 ‘라헬교의 준동’은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는 이벤트였다. 일단 인간들의 왕국에 포교를 하던 도중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헬교를 국교로 믿고 있는 아이리스 성국이 다른 왕국들을 상대로 성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족이 끼어든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 해도 방심할 수는 없어.’
이 세계에는 변수가 될 수도 있는 소환자라는 존재들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호는 그나이 칼츠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들어보니 자네는 여신을 좋게 생각하는 모양이지?”
“아뇨. 딱히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저희들은 영문도 모르게 이 세계에 끌려왔으니까요.”
“음.”
호의 대답에 그나이 칼츠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곧 입을 열었다.
“어쨌든, 말했다시피 골든 크로우는 아이리스 성국과의 불협화음 때문이라도 마장기의 운용에 필요한 특산품인 마정석이 꼭 필요한 상황이지. 값은 대륙의 평균가인 상자 당 천칠백 리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천팔백까지는 허용할 수 있네."
“천팔백!”
옆에서 레드 벨벳의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골든 크로우가 마정석을 구입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람잡이의 느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대륙에서 거래되는 마정석 한 상자의 평균가격은 천칠백 리스가 맞았다. 하지만 로우덴이 해준 말에 따르면 최근 시세가 급상승한 상황이라고 했다.
‘상자 당 천팔백 리스라…….’
현재 A등급 영지인 대도시 디르시나에서 생산되는 해양석은 한 달에 사천 상자. 만약 해머스를 대도시까지 발전시켜 마정석 역시 사천 상자를 생산할 수 있다면, 골든 크로우에 판매하는 마정석의 수입으로만 칠백만을 뛰어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디르시나까지 포함하면 한 달 수입이 천만 리스를 훌쩍 넘기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호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그나이 칼츠만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원한다면 상자 당 천구백리스까지 지불하겠네.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 빌어먹을 라헬교가 골든 크로우의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 님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것을 생각하면…… 돈이 중요한 게 아니지.”
‘역시 양아버지.’
라헬교를 향해 분노를 토해내는 중년 영웅의 모습에 호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이 칼츠만. 그는 양아버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이레네 아르티아를 끔찍하게도 생각하는 영웅이었다. 그 때문에 이레네 아르티아의 마음을 얻으려는 플레이어들은 ‘장인어른의 시험’이라는 그나이 칼츠만의 벽을 넘어야 했다.
호 역시 과거 이레네 아르티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나이 칼츠만의 시험을 통과한 전적이 있었다.
갑자기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탓일까?
골든 크로우에 대한 호감이 조금이 생긴 느낌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천구백 리스. 멍멍.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로우덴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을 보니 충분히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는 이번 거래에서는 돈이 아닌 다른 것을 받고 싶었다.
“오호. 그러면 계약서를 바로 준비하는 게…….”
“잠시, 제가 새로운 제안을 제시해도 되겠습니까?”
“새로운 제안?”
“네, 그렇습니다.”
호의 말에 그나이 칼츠만이 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른 세계에서 온 소환자가 과연 무슨 말을 꺼낼지 사뭇 기대가 되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저는 해머스에 투자를 집중시켜 마정석을 매달 사천 상자까지 생산하려고 합니다.”
“사천 상자라……. 흐음. 마장기 네 개 편대를 움직일 수 있는 양이로군.”
그나이 칼츠만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천 상자의 마정석이면 적은 양이 아니었다.
“게다가…….”
골든 크로우의 C등급 마장기인 ‘자넷’급 마장기를 생산하는데 천 상자가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매달 네 기의 마장기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마정석의 수요 역시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하지 않나?”
“아이리스 성국과의 충돌도 당장은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끄응. 그래서 마정석의 가격을 높일 생각인가?”
“글쎄요……?”
그나이 칼츠만의 물음에 호는 미묘한 웃음을 짓고는 레드 벨벳을 바라보았다.
“그나이 칼츠만 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자리를 비켜달라는 호의 말에 레드 벨벳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인 호와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정보는 곧 돈인데다가 심상치 않은 제안이 오고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상단은 여기에서 불청객에 불과했다.
“멍멍. 저랑 함께 나가도록 하지요.”
게다가 자신을 내보내려고 안내까지 하는 멍멍이 때문에 레드 벨벳은 어쩔 수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두 남녀, 아니 여자와 수인이 사라지자 응접실에는 호와 골든 크로우의 재상인 그나이 칼츠만만이 남게 되었다. 멀리 호를 호위하는 엘븐 템플러들이 있기는 했지만,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지? 소환자?”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해머스에 투자를 집중시켜 마정석을 매달 사천 상자까지 생산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마정석은 앞으로 골든 크로우에 무상으로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상이라고? 대체 무슨 꿍꿍이지?”
파격적인 호의 제안에 그나이 칼츠만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호를 바라보았다.
마족과 인간은 사이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몇 년 전 이 세계에 나타난 소환자. 골든 크로우와 어떤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구백 리스가 부족했던 건가? 돈이 넘쳐나는 영지는 아니라고 보이는데.”
“그렇다고 아주 부족하지는 않지요.”
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보기 싫은 웃음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나이 칼츠만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편하게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장기 제작 기술입니다.”
“큭! 제법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줄도 아는군.”
두 남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고, 결국 고개를 저은 것은 호였다.
“마장기 제작 기술의 모든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골든 크로우가 저희에게 마장기 제작 기술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림드 산맥은 마장기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죠. 하지만 마장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수인 왕국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안테로리에서 노획한 것과 쉐르난비체가 하사한 것만으로는 수인족의 군단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잘 아시는군요.”
호의 눈에 이채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역시 팔 왕국의 수장인 골든 크로우의 재상답게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아, 엘븐 템플러는 조금 의외였네. 마족의 소환자가 엘프의 병사들을 주력 병종으로 양성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이래봬도 평화주의자라서요.”
“안테로리를 날려먹은 것 치고는 뻔뻔한 대답이로군.”
그나이 칼츠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신 라헬에 의해 이 세계로 소환된 소환자 중 대륙의 생명을 가장 많이 꺼뜨린 녀석이 바로 눈앞에 있는 소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저는 마장기 제작과 관련된 모든 기술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설령 골든 크로우가 제 제안을 받아들여 자넷이라던가 골드 이글, 혹은 인간들의 주력 마장기인 엑스칼리버의 제작 기술을 알려 준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마장기를 제작할 수 있는 생산 공장조차도 세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림드 산맥에서는 마장기의 오너도 구할 수 없죠.”
“우리들의 마장기에 대해 잘 아는군.”
이죽거리는 그나이 칼츠만의 목소리를 들으며 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장기에 대해서는 안테로리의 영주로 있을 때부터 상당히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
단순한 관심으로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나이 칼츠만은 호가 어떻게 자신들의 마장기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굳이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알려 한다고 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C등급 마장기 한 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종족 마다 근소하게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약 200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중 종족별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술은 90개 정도입니다.”
“그 기술들을 모두 원하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83개입니다. 7개의 기술 개발은 이미 끝냈거든요.”
“후. 후후. 크하하하!”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그나이 칼츠만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뜨거운 눈빛으로 호를 바라보던 그나이 칼츠만의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