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리그너스 대륙전기 092화
“느낌이 이상한데…….”
“멍멍.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골든 크로우의 인물이 직접 디르시나를 찾다니요?”
호의 말에 풍성한 갈기를 자랑하는 충성스러운 시베리안 허스키, 아니 로우덴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래도 무슨 의도로 골든 크로우의 관계자가 비밀리에 호 님을 만나기 위해 이 디르시나까지 찾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멍멍.”
“보나마나 마정석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멍.”
로우덴의 대답을 들으며 호는 테이블에 놓인 림드 산맥의 지도를 보았다.
림드 산맥에서 마정석이 생산된다는 것을 예상하고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리셴르나라는 강력한 적의 공격을 피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지역이 필요했고, 타이밍 좋게 원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빼앗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림드 산맥은 호의 예상 이상으로 달콤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었다. 디르시나에서는 해양석이 특산품으로 생산되고 있었고, 해머스에서는 인간들의 마장기의 제작과 운용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마정석을 특산품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직 개발은 되지 않았지만, 에스트라다에서는 S랭크 수인족 기병대 양성에 필요한 특산품 한혈마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호는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땅을 원인들은 왜 그냥 방치해 놓은 거지?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없나? 로우덴의 경우를 보면 수인들이 그렇게 멍청한 녀석들만 모인 종족은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이렇게 좋은 영토를 날로 차지한 게 꿈이 아닌가 싶을 때도 가끔 있었다. 호가 림드 산맥의 도시들을 모조리 손에 넣고 패자가 되는 데 필요한 병력은 고작 엘븐 나이트 삼천 기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호가 영주로 자리 잡기 전까지, 원인들의 손에 있던 림드 산맥은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괜찮은 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조금 무리하기는 했지만, 수인 왕국의 위협에서 에스트라다만 지키게 된다면 영토 전체를 차지한 보람이 있었다.
“골든 크로우는 분명 마정석을 원할 게 틀림없습니다. 멍멍. 팔 왕국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골든 크로우에서 소모되는 마정석의 양이 적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반적인 상단이 아닌 왕국과 관련된 인물이 직접 움직였다면 거래 규모 역시 만만치 않을 터. 이번에 남는 마정석들을 모조리 팔아버려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호에게 있어 마정석은 그리 필요한 특산품이 아니었다. 마정석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마장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헐값으로 넘겨줄 생각은 없지.’
어차피 마정석의 판매처는 널려 있었다. 림드 산맥에서 마정석이 생산된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만 한다면, 다른 인간들의 나라 역시 마정석을 구입하려 들 게 분명했다.
행여나 힘으로 마정석을 빼앗으려고 들 수도 있겠지만, 자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간 왕국은 오직 블루 스케일뿐이었고, 블루 스케일은 팔 왕국 중에서도 육상 병력이 가장 허약한 나라였다.
물론 그래봤자 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군사를 일으킬 정도로 림드 산맥에서 생산되는 마정석의 양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멍멍. 마정석의 대륙 평균 시세는 천육백오십 리스입니다. 멍. 하지만 최근 들어 마정석의 구매를 원하는 인간 왕국이 늘어났고, 현재는 상자 당 천칠백 리스를 호가한다고 합니다. 잘만하면 천팔백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 그런 조사를 다했지?”
“멍멍. 우리 영토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이지 않습니까? 충심으로 미리 조사를 했지요. 멍.”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지력이 높은 녀석이 있으면 알아서 척척 하니 편했다. 이런 자세한 정보까지도 알려주니 말이다.
한 상자 당 천팔백 리스라면 해양석 만큼이나 값 비싼 특산품이었다. 골든 크로우와의 거래가 제대로만 성사된다면 다시 한 번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시 영지 개발을 하는 거지. 하지만…….’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돈은 영지를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높이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재화였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영토의 발전과 마장기와 관련된 기술 개발을 생각하면 현재의 수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
그럼에도 골든 크로우가 마정석의 구입을 원한다면 돈 말고 다른 것을 받고 싶었다. 이왕이면 마장기 제작과 관련된 기술이라던가 말이다.
‘시빌리제이션.’
순간 호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플레이했던 게임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게임의 외교에는 연구기술 선물이라는 명령어가 있었다. 말 그대로 어떤 세력이 자신이 개발해낸 연구를 다른 세력에게 대가를 받고 전수해 주거나 받는 명령이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그런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이 세계는 가상현실 게임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르테미스 상단의 평판을 올렸을 때 레드 벨벳이 자신에게 주었던 선물도 있었다. 자애로운 마음씨라는 기술을 익힌 기술자로, 호는 그 기술자를 통해 단숨에 하나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자원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 말이다. 이는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구현되지 않은 규칙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술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마장기의 생산 체제를 갖춰야만 했다. 그래야 수인 왕국의 도발에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데다가 앞으로의 세력 확장 역시 꿈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윤호 님. 아르테미스 상단이 도착했습니다.”
잠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엘프 메이드가 상단이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호의 뒤로 로우덴과 엘븐 템플러 열이 따르기 시작했다.
‘그나이 칼츠만?!’
응접실에 도착한 호는 아르테미스 상단과 함께 찾아온 골든 크로우의 인물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눈을 살짝 비볐다.
그나이 칼츠만. 52세의 나이지만 현역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호가 알고 설정에 의하면 골든 크로우의 재상이었다. 또한 그는 SS등급 클래스를 보유한 영웅이기도 했다.
일명 네임드라 불리는 영웅으로, 인간으로 플레이를 하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유저에게는 호랑이 재상, 철혈 재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나이 칼츠만의 또 다른 별명은 아르티아의 양아빠이기도 했다.
어쨌든 다른 귀족도 아닌 골든 크로우의 재상이 직접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이거…….’
호의 눈동자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골든 크로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정석을 구입하려 할 게 분명했다.
그때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낸 호를 보고 놀란 것은 그나이 칼츠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호 때문이 아니었다. 한 지역의 패자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기껏 이 세계에 도착한 지 몇 년이 되지 않는 애송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호위하는 엘프 병사들은 달랐다.
‘저건 엘븐 템플러잖아?!’
어째서 엘프의 고 랭크 병사들이 마족의 소환자라고 알려진 호를 호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을 통해 윤호라는 인물이 여러 종족을 아우르며 ‘알르드’라 불리는 종족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서도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겼던 그나이 칼츠만이었다.
하지만 엘븐 템플러는 엘프들의 정예 병과로, 전투 중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엘리트 병사들이었다. 한 마디로 친위대나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엘프 보병이나 거기서 진화된 엘븐 나이트, 문 나이트와 같은 너절한 병과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실력을 자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멍. 저는 디르시나의 영주이며 림드 산맥의 패자이신 윤호 님을 모시는 로우덴 셰필드라고 합니다.”
“그나이 칼츠만일세. 골든 크로우의 재상이지.”
“…….”
로우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인간들이 마정석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나라 그것도 팔 왕국의 수장이라는 골든 크로우의 재상이 직접 찾아올 줄은 로우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윤호입니다. 그나이 칼츠만 님.”
“위명이 자자한 안테로리의 소환자로군. 확실히 기도가 다르군. 역시 영웅은 영웅이라는 건가? 그 녀석은 상대도 되지 않겠어.”
“그 녀석이라면?”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그가 말하는 인물이 소환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츠만은 호의 질문에 자세한 대답을 해 줄 생각은 없는지 얼굴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결국 대답을 듣기를 포기한 호는 자리에 앉으며 레드 벨벳을 바라보았다.
“해양석은 이미 준비를 해놨습니다. 이번 거래도 잘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저희야말로요.”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건네줄 해양석은 시현이 준비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상단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액의 자금은 디르시나뿐 아니라 림드 산맥의 각 도시로 흩어져 림드 산맥의 발전에 영향을 줄 터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윤호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드려야죠. 저희들의 소중한 고객님이신데요.”
호의 말에 레드 벨벳이 입술에 침을 살짝 묻히고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호는 그나이 칼츠만을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정석을 판매하려고 합니다.”
“후후. 최근 해머스에서 마정석을 생산한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 때문에 오늘 이곳에 좋은 구매자를 모셔왔답니다.”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레드 벨벳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로우덴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큼큼거리며 말했다.
“멍멍. 골든 크로우라면 확실히 좋은 구매자가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격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뭐, 우리가 마정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머리가 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테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해머스의 마정석을 우리에게 팔면 좋겠네.”
“조건만 맞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해머스에서 생산되는 마정석의 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골든 크로우가 만족할 정도는 아닐 텐데요?”
“지금은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나이 칼츠만의 심상치 않은 말에 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은?”
“조만간 큰 전쟁이 일어날 거다.”
“전쟁……?”
그나이 칼츠만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호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골든 크로우는 인간을 대표하는 왕국이었다. 한 마디로 골든 크로우가 전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는 인간들이 다른 종족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겠다는 이야기와 동일했다.
하지만 뒤를 이은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호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 그리고 상대는 아마…… 아이리스 성국이 될 걸세.”
“멍?! 아이리스 성국!”
놀란 것은 호뿐만이 아니었다. 레드 벨벳도, 로우덴도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지고 있었다.
골든 크로우는 명실공이 인간들을 대표하는 팔 왕국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팔 왕국에는 아이리스 성국도 포함돼 있었다. 또 라헬교를 믿는 그들의 뒤에는 천족이라는 존재들이 있었다.
“라헬교 때문이로군요.”
그때 침묵을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호였다.
“맞네. 최근 들어 여신 라헬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광신자들이 늘어났어. 여신 라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정도가 지나쳐. 이는 위대하신 골든 크로우의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짓이 틀림없다네.”
“으음…….”
“골든 크로우뿐만이 아니라네. 라헬교 때문에 다른 왕국들 역시 다들 골머리를 썩고 있는 판국이지.”
그나이 칼츠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헬교의 광신적인 행위는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몇 번이나 경험한 바 있었다.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