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리그너스 대륙전기 091화
버독은 수인 왕국을 이루는 다양한 족종 중 하나인 원인족의 부족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호인들이 수인 왕국의 대표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 전전대까지는 바로 원인들이 수인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원인족은 수인들 사이에서 떨어지는 태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는 해. 이는 원인들의 세력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전부 림드 산맥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고르엘.”
버독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죽고 없는 놈이지만, 고르엘은 수인 왕국의 최전방에 위치한 도시 킬리드를 지배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도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국경이 뚫렸고, 그 여파로 마족들의 손에 림드 산맥이 넘어가 버렸다. 그것도 근본조차 알 수 없는, 소환자라고 불리는 형편없는 녀석들에게 말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 버독 또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수인과의 기 싸움으로 인해 그들 종족을 견제하느라 원인족의 최정예 병사들을 국경 지대에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땅은 빼앗겼지만 자신의 병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버독은 충분히 원인족의 힘만으로 림드 산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림드 산맥이 넘어가 버리고, 왕국의 대회의에서 림드 산맥의 탈환을 맡은 것은 원인족이 아닌 묘인족이었다. 수인족의 왕 아쉬토가 간사한 묘인족 장로인 랙돌의 혀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 후 리셴르나를 위시한 묘인족은 자신들이 빼앗긴 도시인 안테로리는 탈환했지만, 애초 원인족의 땅이었던 북쪽의 림드 산맥으로는 진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족과 엘프 군단 때문이었지만, 버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묘인족이야 자신들이 잃었던 땅을 되찾았으니 원인족을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게 버독의 생각이었다.
리셴르나의 선봉대 전멸.
처음 이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버독은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었다. 같은 왕국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리셴르나가 해결하지 못하면 자신이 해결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버독은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리셴르나의 선봉대는 그냥 전멸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알 수 없는 요인으로 말이다.
수인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두고, 여신 라헬이 소환한 소환자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떠들어대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버독 또한 그 힘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파악을 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림드 산맥을 향해 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만일 정예 병사를 그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린다면 원인족의 세력 역시 급속도로 줄어들 터였다.
무력이 뒤떨어지는 부족이 왕국에서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는 견인들이 이를 갈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 이유로 버독이 지휘하고 있는 원인족의 군대는 아직까지도 에스트라다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무슨 뾰족한 수가 없나?”
“아아, 아…….”
그때 버독의 눈동자가 눈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여자에게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저런 인간은 노예로 만들어 부하들의 장난감으로 던져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소환자이기 때문이었다. 리셴르나의 선봉대를 증발시킨 녀석과 똑같은 세계에서 온 여자라는 말이었다.
“우끼긱. 어떻게 할까요? 부족장님?”
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원숭이. 원인족의 머리를 담당하는 타레스의 물음에 버독은 눈을 깜박였다.
“정말로 갈라고 님이 저 여자로 하여금 에스트라다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갈라고는 원인족의 족장으로, 원인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원인을 대표해 수인 왕국의 성지 도시인 ‘사파리’에 있었다. 그곳은 왕국의 수도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우끼. 그렇습니다. 원교근공! 갈라고 님께서는 소환자는 소환자로 상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음?”
그 단어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던가?
잠시 버독이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타레스는 자신보다 머리가 좋은 녀석. 맞는 말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병사를 지원해 줘야겠지?”
“마인족과 조인족 그리고 다람쥐 녀석들이 병사들을 보내 왔습니다. 아마 림드 산맥을 수복하면 뭐 좀 떼어달라는 의도겠지요.”
타레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들의 병사를 먼저 보내, 림드 산맥의 마족들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림드 산맥의 소환자가 이상한 힘도 없고, 세력도 허약하다 싶으면?”
“다른 종족의 병사를 희생양으로 삼은 후에 우리 종족의 정예를 이용해 림드 산맥을 다시 차지하는 거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며 리스나 몇 푼 던져주면 될 겁니다.”
버독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역시 타레스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어이!”
“히…… 히이익?!”
엄청난 크기의 고릴라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여인, 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윤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아쉬토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보였던 끔찍했던 행동 때문이었다. 그 괴물은 중년 여인이 계속해서 운다는 이유로 한 입에 그녀의 머리를 으득 삼켜버렸었다. 윤아는 결코 그런 꼴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저 녀석 괜찮을까? 차라리 부하들에게 밥으로 던져주고 괜찮은 놈을 선발해서 보내는 게 어때?”
“우끼끽. 버독 님. 소환자입니다. 림드 산맥의 녀석처럼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을 겁니다.”
“…….”
타레스의 말에 버독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안테로리의 전적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애당초 그렇게 대단한 녀석들이었다면 왜 이제까지 그 능력을 쓰지 않고 여기서 그렇게 허무하게 전부 뒤졌을까? 그런 의문도 들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타레스는 자신보다 똑똑했고, 이 명령은 사파리에 있는 원인족의 족장이자 수인 왕국의 장로 중 하나인 갈라고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나팔을 불어라. 그리고 저 여자에게 싸움이 뭔지 알려줘.”
“알겠습니다.”
타레스가 여자를 끌고나가는 모습을 보며 버독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림드 산맥은 호의 지배하에 들어온 이후 급격한 성장을 하고 있었다. 원인들이 다스릴 때와는 성장세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림드 산맥의 성장 속도는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조차도 놀람을 나타날 정도였다.
특히나 림드 산맥의 패자인 윤호는 림드 산맥의 각 도시에 어울리는 특산품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리고 그 특산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반 건물만을 지어놓고, 많은 돈을 투자해 공장 혹은 생산시설을 설립했다. 그 후, 곧바로 특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자칫 특산품의 생산에 실패해 많은 돈을 날릴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호의 자신만만한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공략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이 그 이유를 알 방도는 없었다. 손을 대는 것마다 특산품 생산에 성공하는 호의 행보에 그녀는 윤호라는 이름을 지닌 소환자의 능력이 정말로 뛰어나다고 감탄만 할 뿐이었다.
“흐응.”
디르시나로 향하면서 레드 벨벳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여신 라헬로 인해 이 대륙에 소환자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로 인해 크게 변화된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전혀 없었다. 소환자들의 대부분은 리그너스 대륙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설령 적응을 하는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별 볼일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는 달랐다. 아르테미스 상단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천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소환자인 박상민과 함께 이 세계에 소환된 소환자 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두 소환자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레드 벨벳은, 아니 아르테미스 상단은 박상민보다 윤호라는 인물을 더욱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일단, 그는 마족의 지원 없이 혼자 성장을 해나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윤호는 아르테미스 상단에도 큰 도움을 주는 인물이었다. 디르시나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인 해양석으로 인해 아르테미스 상단은 자신들의 라이벌인 아폴론 상단을 누르고 점점 그 세를 늘려나가고 있었다.
“상당히 번화한 영지로군.”
“그렇죠? 마족이 선택을 잘한 것 같아요.”
“그런가? 흐음…….”
레드 벨벳과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그를 향해 레드 벨벳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인간들의 왕국에도 검기를 발현하기 시작한 소환자가 있었다. 그로 인해 인간 영웅들이 나름 어깨에 힘을 주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윤호라는 소환자에 비하면 그 소환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가 안테로리의 전투에서 검기를 사용한 일은 붉은 핏빛의 대지와 림드 산맥 근처에 살고 있는 지성체라면 전부 아는 이야기였다.
그때 레드 벨벳과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집사가 중년 남자가 들고 있던 잔에 붉은색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흠. 확실히 림드 산맥의 보고는 놀라웠지. 수인들이 그렇게 쉽사리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거기에 안테로리의 일은…….”
“이 대륙의 종족들이 소환자들에 대해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렇네. A등급 마장기도 그런 위력을 보이기는 힘들 거야. ‘알바트로스’를 제외하면 말이지.”
“하지만 그건 전설에 나오는 존재일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재상님.”
레드 벨벳은 섬세한 손을 들어 미소를 짓는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이 남자 앞에서는 그 어떤 행동도 조심을 해야 했다. 그는 팔 왕국을 대표하는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가 림드 산맥의 패자이자 마족의 소환자인 윤호를 만나러 비밀리에 아르테미스 상단에 합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짐작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정석.’
바로 림드 산맥의 도시 중 하나인 해머스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마정석과 관련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마정석은 인간들의 마장기 제작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핵심적인 물품이었다. 다른 종족과는 달리 인간족의 마장기는 무조건 마정석이 필요했다. 등급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건 해양국가인 블루 스케일의 마장기도 마찬가지였다. 블루 스케일의 수중 마장기는 마정석 대신 해양석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정석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엘프나 마족, 수인과 같은 종족의 마장기에는 마정석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렇게까지 쓸모 있는 특산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마정석은 인간들에게만큼은 그 어떤 특산품보다도 중요한 물품이었다.
‘그리고 인간 왕국들은 현재 천족과 점점 사이가 벌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아이리스 성국 때문이지.’
모두 여신 라헬을 믿는 라헬교의 무차별적인 포교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 때문에 팔 왕국을 대표하는 골드 크로우와 왕국의 전력 순위로 따지면 5순위에 해당하는 아이리스 성국과의 관계가 점점 금이 가고 있었다. 까닥하다간 전쟁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상단 내에서는 아이리스 성국이 팔 왕국을 대표하는 골든 크로우를 공격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뒤에는 천족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행여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마정석은 인간들에게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전략물자가 될 게 분명했다. 마장기의 동력원이나 다름없는 마정석이 있어야 마장기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골든 크로우의 재상인 그나이 칼츠만이 직접 비밀리에 마족의 소환자와 협상을 맺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정보를 이용하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입 조심하기를 당부하고 싶군.”
그때 그나이 칼츠만의 손에 들린 잔에서 포도주가 찰랑거렸다.
그 말에 레드 벨벳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웃음을 지었다.
골든 크로우의 재상.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만약 이 정보가 딴 곳으로 흘러나간다면, 아르테미스 상단은 엄청난 압박을 받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인간과 마족의 협상이라니, 흥미진진한 건 사실이었다.
“…….”
그 순간 자신에게 굴욕감을 안겨 주었던 수인 영웅 하나가 레드 벨벳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과연 그가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