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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90화 (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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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90화

한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해로 인해 도시에는 황혼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높은 탑 발코니에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이 문득 도시로 향했다. 지평선 끝까지 눈동자를 움직여봤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도시였다.

프리테븐. 리그너스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 중 하나인 천족의 수도이자, 천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SSS등급의 도시였다.

이곳은 과거 남자가 살았던 나라의 수도인 서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게임 속 프리테븐은 이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는데. 역시 여신 라헬님의 뜻이 직접 펼쳐지기 때문인가?”

그 말과 함께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곧 빠른 속도로 하나의 정보창이 남자의 눈앞에 나타났고, 이어서 퀘스트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이름은 박상민. 1회 차 소환자인 그는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본 적이 있는 유저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 때문일까?

약간의 트러블이 있기는 했지만, 상민은 다른 소환자들보다 더 빠르게 이 세계에 적응했고, 현재 천족에 영입된 소환자들 중 가장 두각을 보이며 많은 천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C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A등급 장비 또한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한 단계 더 클래스를 높이면 천족의 마장기가 수여된다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과연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상민의 눈에 비친 도시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들이 끊임없이 들어섰고,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자동차와 지하철, 버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과거 자신이 살던 도시 서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도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이 세계가 곧 나의 고향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박상민. 나에게는 여신 라헬님의 말씀을 이 세계에 전파할 사명이 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본 까닭에 상민은 천족의 소환자로 영입되었을 때부터 라헬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의 라헬은 굉장히 나쁜 이미지였지만, 이 세계의 여신 라헬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려 하고 있는 여신이었다. 그런 여신의 뜻에 따라 자신은 이 세계를 어지럽히는 여섯 종족을 신의 이름으로 징벌해야 했다.

“오빠.”

“……아.”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상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이십 대 초반의 여성이 들어왔다. 하얀색 천으로 온몸을 두른 그녀는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의 복장과도 비슷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세계에서 살다 온 2회 차 소환자 김유진이었다.

“아. 그래 유진아.”

“칸디르 님이 부르세요.”

“칸디르 님이?”

“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잠시 생각을 하던 상민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국경지대에서 인간 종족과의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상민은 문득 든 생각에 유진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자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때? 이 세계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직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민은 그런 유진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눈을 떴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이 가득한 세계로 넘어왔다? 혼란은 보통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오빠는요? 괜찮으세요?”

유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보다 2년이나 먼저 이 세계에 온 사람이었다. 2년 전 이곳에는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열다섯 명. 그중 다섯 명은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상민은 살아남은 사람들 중 천족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이지. 선택의 신전에서는 좀 혼란스럽긴 했지만. 여신 라헬님의 뜻을 따르다 보니 이 세계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선택의 신전…….”

상민의 입에서 선택의 신전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유진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곳에서는 외국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낯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자신은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선량해 보이는 천족들에게 끌려왔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신전에서 마족이라는 흉측하게 생긴 악마들이 보여줬던 학살은 아직도 악몽을 꾸게 할 정도였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18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두 명 또한 노예처럼 끌려갔으니까.

“아…….”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때 죽었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이도 있었다. 비록 친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이상한 세계에 끌려와 안면이라도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게 어디인가? 하지만 그 사람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유진은 자신의 친한 친구인 윤아와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아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호랑이 머리를 한 남성이 끌고 가 버렸다. 그때 울부짖던 친구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런 유진을 상민이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생각하지 마. 우리들의 여왕 라이프린 님과 여신 라헬의 말씀만 떠올려.”

“아아…….”

“라이프린 님이 뭐라고 하셨지?”

“여신 라헬의 이름 아래에서 우리는 하나이며, 하나는 모두가 될 수 있다.”

“그래. 라이프린 님과 함께 여신 라헬만을 믿으면 우리는 안전해.”

자신을 향해 빙긋 웃는 상민의 모습을 보며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여신 라헬과 천족의 여왕인 라이프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맹목적으로 여신 라헬의 뜻을 따르라는 말도 아직까지는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그 지겨운 경전을 독방에서 외워야 할 테니까.

“그러면…….”

“아, 오빠.”

“응?”

“윤아는 살아 있을까요?”

“윤아라면? 아!”

상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 유진이 이야기해줬던 그녀의 친구였다. 분명 수인족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상민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여신 라헬님을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 살아 있을 거다. 그러니 너도 라헬님을 믿으며 이 세계의 능력을 키우도록 해. 그렇게 하면 분명 여신 라헬님을 섬기지 않는 수인족의 손에서 윤아라는 친구를 구원할 수 있을 거야.”

“……네.”

여신 라헬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면 왜 지금 당장 윤아를 구해주지 않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유진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내색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대답하는 상민의 말에 유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만 간다. 너는?”

“전…….”

“할 일이 없으면 이거라도 읽어 둬.”

그렇게 말하며 상민은 품속에서 조그마한 책을 꺼내 유진에게 건네주었고, 책의 정체를 확인한 유진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은 여신 라헬의 말씀이 적힌 성서였다.

자신이 온 그 세계에서 지탄받는 광신적인 종교인들이 이러할까? 모든 게 여신 라헬에서 시작해 여신 라헬로 끝이 났다. 정말 미친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유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신 라헬이 자신을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친구를 구원해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신이라는 존재는 선택의 신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기만 했었다.

“고맙습니다. 오빠.”

하지만 걸어가는 상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신 라헬의 믿음에 반발한 사람들처럼 자신도 어딘가로 끌려가 사라질 터였다.

* * *

리그너스 대륙에는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SSS등급의 영웅. 일명 대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은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였고, 이들의 영향을 받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포스를 자랑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SSS랭크의 병종. 기본적인 능력이 워낙 사기적인 까닭에 웬만한 랭크의 병사들은 덤빌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마장기였다. 마나가 실리지 않는 일반적인 물리 공격에 완벽한 내성을 보이는데다가, 7서클 이하 마법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는 마장기는 그야말로 리그너스 대륙의 최종병기나 다름없는 무기였다. 만일 이 마장기에 SSS등급의 영웅이 탑승한다면? 전장의 판도가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마장기를 제작하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돈이 무지하게 필요했다.

“예상은 했다만…….”

호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지역의 패자가 되었고, 휘하에 있는 도시가 무려 다섯 개였다. 불과 일 년 전 안테로리의 영주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휘하에 영웅도 많아졌고, 이제는 관록도 붙어 어느 정도 영주의 포스도 뿜어내고 있었다. 생명체들이 죽는 모습에도 익숙해졌고, 직접 검으로 상대의 목숨을 끊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무엇이? 돈이 말이다.

“디르시나는 궤도에 오르긴 했는데…….”

특산품인 마정석의 판매를 포함해 디르시나는 한 달에 약 칠백만 리스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했을 무렵 커티삭에서 몇 백 골드에 빌빌거리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수입이었다.

하지만 마장기를 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이 정도 돈은 돈도 아니었다. C등급 마장기 제작에만 무려 1억 리스의 자금이 필요했다. 심지어 자신은 아직 마장기의 연구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행 연구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돈이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수인족의 공격에 대비해 에스트라다의 성벽 공사도 시작해야 했고, 병사들도 모집해야 했다.

또 많은 종족들이 뒤섞여 있는 도시인지라 영지민을 만족시키기 위해 건물의 공사도 진행해야 했다. 그것들은 전부 돈이 필요한 작업들이었다.

“진짜 이 세계에도 은행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서는 확 어디선가 대출을 당기고 싶었다. 그리고 원금을 제외하고 이자만 갚다가 세력이 궤도에 오르면 그때 가서 원금을 갚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돈을 빌려줄 만한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족? 가능성은 있었지만, 호가 돈을 빌릴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친분이 있는 마족은 커티삭의 지배자인 페릴 예노스밖에 없었다.

하지만 커티삭은…….

“됐다. 코 묻은 애 사탕 뺏는 것도 아니고.”

그곳은 한 달 수입이 만 리스나 되면 다행이었다. 코르다의 엘 샤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코르다는 아직도 D랭크 병종조차 양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쩝. 어디서 돈 벼락이라도 내려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결국 마장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다섯 영지의 생산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신에게는 드워프와 로우넨이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끝나고 난 이후, 디르시나에만 몰려 있던 호 휘하의 영웅들은 호의 명령에 따라 각 도시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새마을 운동, 아니 림드 산맥 발전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한시진은 B등급 클래스인 검의 연주자로 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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