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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87화 (8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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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87화

호와 한시진이 열심히 자신들의 전직 퀘스트와 경험치를 쌓고 있을 무렵, 디르시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하고 있었다. ‘해양석’이라는 특산품이 생산되면서 리스 수입이 크게 늘어났고, 그 돈은 에바스 나이트의 양성을 제외하고 모두 영지의 내정에 투자되고 있었다.

영지의 기술 연구과 개발도 순조로웠다. 로우덴 셰필드라는 머리가 비상한 수인 영웅 덕분이었다. 그는 S등급 영웅인데다가 지력 능력이 SS등급, 무려 711이나 되는 그에게 낮은 단계의 연구는 손 쉬운 일에 불과했다.

또한 로우덴의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라는 S랭크 스킬에 영향을 받는 디르시나의 영웅들은 그야말로 노예처럼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며 디르시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영지에서 이 모든 것들을 총괄하는 인물은 바로 아스트리드 벨이었다. 정치 수치는 로우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지만, 소환자라는 메리트와 함께 그녀는 안테로리를 제법 괜찮게 관리해 본 경험이 있었다.

거기에는 영지를 관리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치를 조금 더 많이 획득할 수 있다는 호의 배려가 작용한 것이었고, 그 덕분에 현재 그녀는 디르시나의 영주 대리를 맡고 있었다.

게다가 아스트리드 벨은 그런 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디르시나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었다.

“아스트리드 벨 님. 상단에서 찾아왔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요?”

메이드 복을 입은 엘프의 말에 벨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녀가 시중을 드는 것은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트리드 벨은 흘깃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벨기에연합의 공주로서 갖은 관리를 받았고, 타고난 유전자도 좋았기에 벨은 미녀 공주로서 많은 인기를 누렸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엄밀히 말해 길거리에 흔하게 걸어 다니는 엘프에게는 외모가, 다크엘프에게는 몸매가 밀렸다. 그리고 서큐버스에게는 색기가 밀렸으며, 수인족과 비교해서는…….

‘……수인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을 줄이야.’

이 세계에는 냥냥, 멍멍거리는 여성 수인들을 보호대상이라며 귀여워하는 남성들이 정말로 많았다. 최근에는 남성 다크엘프들을 대상으로 그런 분위기가 점점 퍼져 나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벨은 자신의 어깨를 치켜 올렸다.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들에 비해 외모와 몸매 그리고 색기는 부족할 지라도 자신은 호를 대신해 디르시나의 모든 행정을 결정하는 인물이었다.

“아, 씨…….”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아스트리드 벨이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 녹색 망토를 걸친 에바스 나이트 셋이 그녀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호위병을 대동하고 그녀가 향한 곳은 디르시나 영주성의 접견실이었다.

접견실에는 두 명의 익숙한 얼굴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디르시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재이자 벨이 마음속으로 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세계의 인물, 로우덴 셰필드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오랜만에 뵙네요.”

한껏 눈웃음을 치는 여인. 그녀는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이었다.

아스트리드 벨은 그녀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라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랬다.

“아스트리드 상단은 직물만 거래하지 않았던가요?”

“어머, 저희는 직물뿐만 아니라 섬유 그리고 무기도 취급한답니다. 그리고 무기에 마법적인 처리를 하는 데 필요한 물품인 해양석은 저희들이 가젯 의복보다도 더욱 필요로 하는 특산품이지요.”

“흐흥…….”

벨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레드 벨벳을 바라보았다. 저런 정보를 쉽게 알려주다니. 최소한 가젯 의복보다도 비싼 가격에 해양석을 판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벨은 자리에 앉았다.

처음 해양석이 생산되었을 때, 호는 제대로 된 판매처를 찾을 수 없어 대충 가젯 의복과 비슷한 값을 부르는 이상한 이름을 지닌 인간들의 상단에게 판매를 해야 했다.

하지만 해양석 어장이 계속해서 건설되고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는 정기적으로 해양석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상단을 찾아야만 했었다.

호는 그 판로를 찾기 위해 아르테미스 상단을 불렀었다. 한시진과 함께 던전 공략을 위해 떠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가 굳이 아르테미스 상단을 부른 건 안테로리에서 제법 괜찮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어?’

순간 벨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러고 보면 호는 이미 아르테미스 상단이 해양석을 구입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벨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 세계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상단이 있다고 하던데, 어째서 아르테미스 상단하고만 계속 거래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상단을 불러 경매를 하거나 혹은 다른 상단과 관계를 맺거나 해도 되는데 말이다. 벨은 왠지 호가 아르테미스 상단에 특혜를 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호의 행동이 전부 아르테미스 상단의 평판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호 씨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줬나?’

뇌물? 리베이트? 별 생각이 다 들기는 했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딱히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림드 산맥, 그리고 디르시나의 영주는 어디까지나 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보며 다시 한 번 눈웃음을 치는 레드 벨벳의 모습에 아스트리드 벨은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윤호. 아스트리드 벨이 느끼는 그는 의외로 호색한처럼 끼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미 한시진과 사귀는 사이였고, 엘프인 엘 아르윈도 호를 볼 때마다 심상치 않은 눈빛을 보내는 것을 벨은 어렵지 않게 캐치할 수 있었다. 그건 리아 캬베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호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레드 벨벳이라는 인물 또한 호에게 모종의 로비를 했고, 호가 못 이긴 척 넘어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나쁜…….’

여자만 보면 헤실헤실 웃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괜스레 복부에 주먹 한 방을 깔끔하게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허전함에 아스트리드 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자신은 절대로 질투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멍. 그러면 아스트리드 벨 님도 오셨으니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아뇨. 이제 아스트리드 벨 님께서 오셨으니 저는 아스트리드 벨 님과 따로…….”

‘어라?’

벨은 빠르게 말을 하며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레드 벨벳의 모습을 캐치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오기 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최종 서류에 도장만 찍을 뿐이니까요. 해양석 판매에 대한 결정권은 로우덴 셰필드 님에게 있습니다.”

아스트리드 벨의 입에서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표정이 살짝 구겨지는 레드 벨벳을 보며 벨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저희는 해양석 한 상자에 천삼백 리스를 받기를 원합니다.”

로우덴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너…… 너무 비싸요!”

“멍멍. 아까 전에 해양석은 아르테미스 상단에 굉장히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구매자가 꼭 구입하기를 원하는 물품이라면 판매자는 값을 올리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아르테미스 상단은 해양석 한 상자 당 천이백오십 리스 이상으로는 값을 쳐줄 수가 없습니다!”

아스트리드 벨은 입술을 질끈 깨무는 레드 벨벳을 보며 속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곁눈질로 로우덴을 바라보았다.

호는 벨에게 그가 디르시나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로우덴에게 상의하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후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는걸?’

아스트리드 벨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그녀는 해양석 한 상자 당 천이백 리스쯤에 판매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요? 멍멍. 저는 제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판매하는 무기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죠. +1 아르테미스 롱 소드의 판매가는 평균적으로 대륙에서 이천오백 리스에 팔리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래요.”

“롱 소드의 가격은 인간 명장이 제작했다는 가정 하에 고작 이백리스입니다. 멍. 강화 한 번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해양석은 1개. 그렇다면 아르테미스 상단은 해양석을 천이백 리스로 구입했을 때, 롱 소드 하나를 팔면 무려 천 리스를 남기는 셈이로군요.”

“와우.”

감정이 섞인 감탄사와 함께 아스트리드 벨이 로우덴과 레드 벨벳을 번갈아 보았다. 와락 일그러지는 레드 벨벳의 표정이 꽤나 볼만 했다.

“거기에는 전 대륙으로 안전하게 물건을 옮기는 아르테미스 상단의 노력에 대한 대가도 섞여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멍멍. 하지만 해양석을 이용한 무기의 마법적인 강화는 +1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해양석에 어떤 특수한 처리를 하고 무기를 강화하게 되면 +3까지는 무기에 손상이 가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큿!”

“그리고 +1강화 무기보다는 +3강화 무기가 훨씬 비싸지요.”

레드 벨벳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수인 주제에 어떻게 강화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전 대륙을 여행하며 들은 게 제법 많답니다. 멍멍.”

레드 벨벳은 로우덴이라는 이름의 저 수인족이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스트리드 벨이라는 여자는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인족은 아르테미스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게다가 해양석은 아주 괜찮은 특산품입니다. 멍. 무기에 대한 마법적인 처리를 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멋진 병기의 제작에 들어가기도 하지요.”

“…….”

“바로 블루 스케일의 수중 마장기인…….”

레드 벨벳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 수인 영웅이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해양석은 인간의 8왕국 중 하나인 블루 스케일의 수중 마장기 제작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블루 스케일은 상단을 하나 운영하면서까지 비싼 돈을 들여 전 대륙에서 해양석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 상단의 이름은 아폴론 상단.

하필이면 똑같은 물품을 취급해 아르테미스 상단에게는 라이벌이면서도 동시에 눈엣가시와도 같은 상단이었다.

“천삼백 리스에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사백 리스.”

“아…… 아까 전까지는 천삼백이라고!?”

레드 벨벳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 분도 되지 않아 무려 백 리스가 뛰어 올랐다.

“잠시 생각을 해보니 아폴론 상단은 천사백 리스를 제시해도 충분히 구입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잌!”

“헥헥.”

레드 벨벳은 혀를 내밀며 숨을 쉬고 있는 저 견인 영웅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디르시나에서 생산되는 해양석은 그 수량이 제법 되었다. 게다가 그 생산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거래가 틀어진다면 디르시나의 해양석은 분명 아폴론 상단에게 넘어갈 테고, 이는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큰 손해나 다름없었다.

결국 레드 벨벳은 눈물을 머금고 해양석 한 상자에 천사백오십 리스에 구입하겠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만 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디르시나를 떠나는 레드 벨벳의 모습에 아스트리드 벨은 신이 난 듯 박수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에헴. 멍. 거래를 하는 데 있어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요.”

“와…….”

그런 로우덴의 모습을 보며 벨은 로우덴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친다는 착각이 들었다. 역시 자신의 우상다웠다. 벨은 자신도 저런 식으로 이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 호도 자신을 달리 볼 게 분명했다.

“그러면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벨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세계의 지식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그때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동그란 공이 잡혔다.

‘잠깐?!’

생각해보니 호가 공을 던져 줄 때마다 기뻐하던 로우덴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놀이를 매개로 로우덴과 친분을 다질 좋은 기회였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로우덴과 친분을 다질 수 있다면 나중으로 미뤄도 되었다.

“저기…….”

벨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공을 꺼냈다.

“제가 볼 한 번 던져 드릴까요?”

“아뇨. 멍! 사양하도록 하지요. 저에게 볼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윤호 님 한 명뿐입니다. 오늘의 거래는 나중에 호 님이 오시게 되면 말 좀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멍멍멍!”

하지만 그녀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가는 로우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개…… 개한테까지 까이다니.”

아스트리드 벨의 어깨가 아까 전 디르시나를 떠났던 레드 벨벳처럼 추욱 늘어졌다.

오늘도 디르시나는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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