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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86화 (8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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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86화

‘역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름도 없는 일반 산적들 따위는 한시진의 실력이면 껌이나 다름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이렇게 산적들을 홀로 한시진이 모두 죽이게 되면, 윈드 레이지의 전직 조건도 충족시킬 수 있을 터였다.

콜리버 잭이라는 던전의 보스 녀석이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그때는 에바스 나이트를 동원해 다구리로 죽여 버리고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애당초 호는 콜리버 잭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크……. 크읏!”

처음 에바스 나이트를 지휘하는 윤호라는 남자의 말을 들었을 때 콜리버 잭은 자신만만했다. 여자의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자신들이 머릿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남자가 제시한 것은 일 대 일로 계속해서 맞붙는 차륜전이었다.

예상보다 여자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처음 나간 놈들만 재수가 없을 뿐, 콜리버 잭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부하들 중 누군가가 여자의 목을 들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연이어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는 차륜전은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다. 그건 연약해 보이는 여자에게는 오히려 가혹한 규칙이었다.

콜리버 잭과 마찬가지로 죄의 메아리 단원들은 자신의 부하와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처음에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씩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여자의 모습에 조금만 더 몰아세우면 된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웅!

볼성사납게 쓰러진 남자의 눈에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

콜리버 잭은 흘깃 뒤를 바라보았다. 삼백이 넘는 자신의 부하들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에 반해 여자는 꽤나 지친 기색이었지만, 굳건히 두 다리를 땅에 디디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벼운 부상도 있었지만, 심각할 정도의 부상도 아니었다.

“비…… 빌어먹을!”

콜리버 잭은 사자의 망치라고 이름붙인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생각은 둘째 치더라도,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저 빌어먹을 년을 자신의 무기로 으깨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콜리버 잭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짝!

이제까지 조용히 한시진과 죄의 메아리 단원과의 결투를 지켜보기만 했던 호가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콜리버 잭을 향해 수십의 에바스 나이트들이 달려들었다.

띵동.

-E급 던전 죄의 메아리의 ‘콜리버 잭’을 물리쳤습니다.

-전투성과를 결산중입니다. 3…… 2……1. 결산완료.

이번 전투의 등급은 S랭크입니다. 경험치 660을 획득했습니다.

-총대장으로서의 활약에 힘입어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E급 던전 죄의 메아리를 완벽하게 클리어했습니다. 경험치 500을 획득했습니다.

보스급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E등급 던전의 몬스터가 천이 넘는 병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수십 개의 검을 몸으로 받아내고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콜리버 잭을 잠시 보던 호는 지쳐 있는 한시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수고했어.”

“하아……. 진짜 퀘스트라는 거 엄청나게 힘드네요. 화랑만 있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녀석들인데.”

“이제 전직 조건도 만족했으니까 조금만 더 고생을 하면 윈드 레이지로 전직할 수 있을 거야.”

호의 말에 한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소드 비기너에서 윈드 레이지로 전직해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

한시진의 검은 눈동자가 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에스트라다에서 그녀는 호가 두 대의 마장기가 포함된 일 만의 수인 군대를 물리쳤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 한시진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전력을 생각하면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세계의 최강병기 중 하나인 마장기는 자신의 세계에 있는 화랑과 비슷한 형태와 위력을 지닌 군사 무기였다. 게다가 화랑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한시진은 화랑이, 그리고 이 세계의 마장기가 얼마나 강력한 병기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일반적인 병사들로는 정말로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마장기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호는 그것을 해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들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만들어줄 영웅이자 그녀가 사랑하는 애인이기도 했다.

“하루라도 빨리 전직해서 오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조금은 시무룩한 목소리였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런 한시진의 말에 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는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화랑기사단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마장기를 다룰 줄도 알았고, 검술 실력도 뛰어났다. 더군다나 그녀는 임전무퇴라는 S급 스킬까지 보유하고 있는 인재 중의 인재였다. 포텐 또한 엄청났다.

“그래도 빨리 전직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조금은 답답해요. 언제쯤 전직할 수 있을까요?”

“글쎄……?”

말끝을 흐리며 호는 한시진의 정보창과 퀘스트 창을 열어 보았다. 전직 조건을 거의 달성하기는 했지만, 아직 모든 조건을 달성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능력 포인트를 올릴 경험치도 필요할 것 같았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은빛 갑주를 걸친 에바스 나이트 하나가 한시진에게 다가왔다. 에바스 나이트의 손에서 생겨난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한시진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의 몸에 생겨난 상처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전투를 하다 보면 전직할 수 있을 거야.”

잠시 후 상처가 모두 치료된 한시진을 보며 호가 말했다.

레어 클래스답게 윈드 레이지의 전직 조건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꼭 해야 되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전직하려고 하는 A등급 클래스 ‘제네시스 - 전장의 마에스트로’처럼 말이다.

‘이제 1번 했나?’

‘제네시스 - 전장의 마에스트로’로 전직하기 위해서는 총 100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전투라는 의미로 평가받는 것은 100명 이상의 군대와 군대끼리의 부딪힘이었다. 죄의 메아리에서처럼 300명이 넘는 적과 싸움을 벌인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 일이었다. 림드 산맥의 던전을 모조리 파괴하고 나면 타 종족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상 전직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고, 지금은 일단 한시진의 전직이 먼저였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의 클래스를 B등급까지 올려야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압!”

“이야아아앗!”

“물러서지 마라! 호 님을 위하여! 세계수의 분노를 적들에게 보여주자!”

호와 한시진의 던전 토벌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한시진은 필사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건 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행여나 잘못해서 한시진이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호의 직업인 아크 로얄의 효과와 스킬로 인해 B랭크의 에바스 나이트는 A랭크 보다는 뛰어나고 S랭크에는 약간 못 미치지는 엄청난 공격과 방어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병력을 이끌고 E, F등급의 던전을 공략하는 행위는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조금 어려운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게다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디르시나에서 양성되고 있는 에바스 나이트 부대가 계속해서 합류하고 있었다. 그렇게 림드 산맥의 던전을 하나하나 파괴할 때마다 호와 한시진은 많은 양의 리스와 식량은 물론이고 장비 아이템도 계속해서 획득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림드 산맥에 위치한 다섯 개의 C등급 던전 중 하나인 아둠의 혀 공략을 마쳤을 때였다.

“제법 오래 걸렸네.”

“그러게요. 몬스터들은 그리 위협적이기 않은데, 던전의 깊이가 굉장히 깊었어요.”

아둠의 혀는 보스급 몬스터가 무려 여섯 마리나 있는 던전으로, 호와 한시진은 나흘이라는 시간을 들여서야 아둠의 혀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몬스터를 물리치고 성공적으로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얻은 성과는 많았지?”

“네. 이제 곧 있으면 전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시진의 윈드 레이지 전직 조건도 대부분 달성했고, 자신도 여섯 개체의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며 ‘제네시스 - 전장의 마에스트로’의 조건을 여섯 번이나 달성할 수 있었다. 거기에 경험치도 제법 쏠쏠히 얻었기에 호가 기쁜 마음으로 이번 전투의 성과에 대해 살펴보던 중이었다.

“호 님. 이번에 획득한 아이템 중 심상치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거?”

그 순간 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에바스 나이트가 심상치 않다고 말할 정도면 꽤나 쓸 만한 게 등장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에바스 나이트가 멋들어진 장식이 새겨져 있는 검을 호에게 내밀었다.

[+6 우스바 에스테리온(B등급 무기)

효과 - 무력 36증가(+32)

타고난 장인이라고 알려진 드워프의 무기장인 우스바가 만든 검입니다. 드워프들의 금속 중 하나인 미스릴이 약간 섞인 검으로 웬만한 검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강도를 자랑합니다. 게다가 마법적인 효과를 받아 굉장히 날카롭기까지 합니다.]

“오?!”

무력 수치를 총 68이나 증가시켜 주는 검이었다. B등급 무기인데다가 무려 +6 강화까지 되어 있었다. 현재 자신의 무력 수치는 315. 만약 이 +6 우스바 에스테리온으로 무기를 바꾼다면 368까지 무력 능력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보다도 이 검이 더욱 필요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시진이었다.

곧 호의 부름에 한시진이 다가왔다.

“오빠, 불렀어요? 어머?”

얼핏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검을 보며 한시진의 눈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이 검을 사용하도록 해.”

호는 거리낌 없이 +6 우스바 에스테리온을 한시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드 비기너는 검술 관련 클래스라 그런지 무력 수치에 메리트를 가지고 있는 클래스였다. 하지만 D등급 클래스의 한계로 인해 한시진이 올릴 수 있는 무력 포인트는 100이 최고였다.

하지만 +6 우스바 에스테리온은 그런 한시진의 무력 수치를 거의 1.6배나 상승시켜 줄 수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아이템이었다.

호는 지금 자신의 전력으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중 거의 최상급에 속하는 아이템이지만, 한시진의 손에 검을 쥐어주는 호의 눈에는 아쉬움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

어차피 이 세계가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흡사한 세계라면 이보다 훨씬 좋은 아이템은 널려 있을 게 분명했다. 더불어 호 제국의 황제였을 시절, 자신은 S등급의 아이템이 아니면 취급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시진은 달랐다.

“이, 이런 것을 제가 써도 돼요? 아니, 그냥 오빠가 써요. 저는 이미…….”

명검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심상치 않은 검의 예기에 부담감을 느낀 것일까?

한시진이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을 가리켰다. 이미 닳고 닳은 검, 브리얀드 소드였다.

그런 한시진을 자신의 가슴에 포옥 안으며 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난 이미 검이 있거든.”

“검이요? 아하! 이번에 획득한 아이템이 이거 말고 다른 것도 있나 봐요?”

“아니. 다른 검. 바로 한시진이라는 이름의 검.”

“…….”

장난이 가득 담긴 말이었지만 한시진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느끼하면서도 오글거리는 멘트였지만, 그런 말이 싫지는 않았는지 그녀는 슬며시 자신의 몸을 호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에바스 나이트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두 남녀는 그렇게 떨어질 줄 모른 채 서로를 안고 있었다.

좋은 아이템은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동료 혹은 부하가 곁에 있어야 빛을 발했다. 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경험을 통해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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