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리그너스 대륙전기 084화
인간, 엘프, 드워프, 정령, 마족, 천족 그리고 수인족. 이 일곱 종족은 드넓은 리그너스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여오고 있었다. 각 종족들은 오랜 세월 리그너스 대륙에서 살아오며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손을 잡거나 때로는 칼을 겨누며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잡기 위해 분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관계는 종족의 대표적인 특성과 성향에 따라 어느 정도 그 틀이 정해지곤 했다.
예를 들어 마족과 수인은 힘과 파괴를 추구했고, 엘프는 자연과 평화, 정령은 자유분방함을 그리고 인간은 질서를 추구했다. 또 드워프는 연구와 탐구 그리고 신비로운 기술과 돈을 좋아했다.
그렇게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가 모습을 감춘 지 수 만 년. 그 시간 동안 이 일곱 종족은 서로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했고, 2년 전 창조신의 딸인 여신 라헬이 이 세계에 처음으로 다른 세계의 인간들, 일명 소환자를 소환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영웅들 중 여신 라헬이 어째서 소환자라는 존재를 이 세계에 소환했는지, 그 정확한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라헬은 다만 창조신의 뜻이라는 말만을 각 종족을 대표하는 영웅들에게 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다른 세계의 소환자들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여신 라헬은 공평하게 정확한 숫자로 나눠진 소환자들을 각 종족에게 맡겼다.
“흥. 그런 녀석들 따위. 대부분은 허약한 놈들이라 다 뒤져 버렸다고.”
선택의 신전 내부.
튼튼하고 두툼한 근육으로 이뤄진 짧은 팔을 지닌 난장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대영웅 골드 스트리안. 그는 대륙의 드워프들을 대표하는 대족장이었다. 드워프와 맥주는 빠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보여주려는지, 골드 스트리안은 선택의 신전 안에서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잔에 맥주를 가득 담아 마시고 있었다.
“맞아, 맞아. 소환자들은 너무 약해. 우리들은 그냥 장난을 친 것뿐인데…… 다 죽어 버렸어.”
그런 골드 스트리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귀여운 정령 세 마리가 그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정령들을 바라보는 S랭크의 드워프 보병인 정예 드워프 쿠스타스들의 얼굴은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정령의 가벼운 날갯짓에서 하얀색 가루가 머리에 떨어질 때마다 정예 드워프 쿠스타스의 얼굴이 중독된 것처럼 시퍼렇게 변해갔던 것이다.
잠시 후, 급기야 자신의 목을 감싸 안고 게거품을 무는 드워프들이 나오자, 골드 스트리안은 거친 콧김과 함께 옆에 놓여 있던 거대한 망치를 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쿠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개바람이 생겨나며 하얀색 가루를 날려버렸고, 그제야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며 리스 스트리안이 세 마리의 정령을 향해 말했다.
“나르코. 너희들이 장난을 치면 튼튼한 우리 전사들도 죽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날아다녔을 뿐인데?”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세 마리 정령의 모습에 골드 스트리안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령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답답하기만 했다.
곧 골드 스트리안의 시선이 두 쌍의 커다란 날개를 지닌 여인에게 향했다.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 드워프 종족을 이끄는 대족장의 시선을 받은 아르넨 리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르코. 돌아와요.”
“네, 여왕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쪼르르 달려가는 정령들의 모습에 골드 스트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드워프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정예 드워프 쿠스타스마저도 저 녀석들의 장난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탄광에서도 죽어나자빠지는 허약한 소환자들이 버틸 리가 없었다.
“크하. 보나마나 정령족에게 걸린 소환자들은 죄다 죽었겠구만.”
“아직 세 사람이 남아 있답니다.”
“허……. 나름 오냐오냐하며 잘 대접해 준 우리 쪽도 일곱 명밖에 남지 않았거늘. 제법 많이 살아있는데?”
아르넨 리네의 대답에 골드 스트리안의 눈동자가 왕방울 만하게 변했다.
까닥하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한 장난을 수시로 치는 저 녀석들의 손에서 살아남다니?
그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 정령족의 1차 소환자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보나마나 귀쟁이 녀석들은 식물처럼 키웠을 테고…….”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켠 리스 스트리안은 자신의 긴 수염에 묻은 맥주 거품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바로 자신들과 앙숙이라 할 수 있는 엘프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남으셨수?”
골드 스트리안의 말에 엘프 여왕 엘 유스타시아는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열두 명이로군요.”
“많이도 살았군.”
“2년 동안 소환자들이 많이 살아남은 게 중요한 건 아닐 텐데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소환자 중에는 정말로 창조신의 축복을 받은 녀석이 있다고 하잖아? 우리 드워프들은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창조신에 관계된 것은 아주 철석같이 믿는다고.”
“창조신의 축복이라……. 글쎄요?”
그런 골드 스트리안의 말에 엘 유스타시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창조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 치고는 소환자들은 너무나도 허약했다. 엘프의 보호가 아니면 그들은 이 세계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 중에서는 제법 괜찮은 소환자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엘 유스타시아의 말에 눈을 감고 조용히 그들이 대화를 듣고 있던 여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을 대표하는 왕국인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기사왕이라 불리는 영웅 이레네 아르티아였다.
“아직 부족하다.”
“그런 것 치고는 최근 검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던데…….”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모양이군. 왕국으로 돌아가면 엘프 담당인 정보부를 교체해야겠어.”
“어머나. 저도 수인들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랍니다.”
“……흥!”
살짝 고개를 숙이는 엘 유스타시아의 모습에 아르티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말대로 인간들이 맡게 된 소환자들은 8왕국에게 골고루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일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중 바라테이온 왕국에 거주하고 있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가 미미하지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크하! 허약해빠진 녀석이 검기를 사용한다고? 어디 이야기 좀 해봐, 이쁜 아가씨. 우리는 곡괭이질 망치질 하나 제대로 못하는 녀석들뿐이라고. 진짜 짐 덩어리야. 짐 덩어리.”
둘의 대화를 들은 골드 스트리안이 눈을 반짝였다.
드워프 대족장의 말에 이레네 아르티아는 못이긴 척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기사였다고 하더군.”
“호오. 기사가 있었어? 이런! 그런 녀석이 우리 쪽에 왔어야 했는데. 쩝.”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골드 스트리안이 선택의 제단을 쭈욱 훑었다. 2년 전 처음으로 소환되어 정령과 엘프 그리고 인간들에게 갔던 소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직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모르는 세 종족의 소환자들이 남아 있었다.
“뭐…… 동물 새끼들 쪽은 보나마나 죄다 죽었을 테고.”
수인 왕국의 대왕 아쉬토를 보며 골드 스트리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사납기로 소문난 호인이 권력을 잡고 있는 수인 왕국에 간 소환자들이 2년 동안이나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골드 스트리안의 말을 들은 수인들의 왕 아쉬토는 말없이 그저 씨익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잔인하게 느껴지는 아쉬토의 웃음을 본 골드 스트리안의 고개가 이번에는 마족과 천족 쪽으로 향했다. 마왕답게 쉐르난비체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외형을 지닌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천족의 여왕 라이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제단 위의 제2차 소환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잔인한 년과 고리타분한 년에게서 버틴 녀석들도 없겠지.”
골드 스트리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만약 살아남은 녀석들이 있다면 분명 제정신은 아닐 터였다. 특히나 천족들에게 간 소환자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들은 힘들어서 죽은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미쳐서 죽었을 게 분명했다. 아마 1년 이상 자신들의 교리와 경전을 주고 독방에 처넣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후후. 그래도 마족은 최근 소환자들 때문에 꽤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던데요.”
“빌어먹을 계집! 쓸데없는 이야기를!”
엘 유스타시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신전의 모든 존재가 들을 수 있게끔 넓게 퍼져 나갔다. 그러자 수인족의 왕 아쉬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엘 유스타시아가 있다면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를 기세였다.
“호오? 호오? 호오오?”
다시 맥주를 들이켜던 골드 스트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리그너스 대륙은 워낙 넓은데다가 종족들끼리 다양하게 국경이 맞대고 있었다. 그러니 각 세력의 인물들이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모조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스타시아의 말에 관심을 보인 것은 골드 스트리안뿐만이 아니었다.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도,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이레네 아르티아도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흥미에 대해 대답을 해줘야 하는 마왕 쉐르난비체는 자신의 입꼬리만 말아 올릴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가 자신들의 호기심을 풀어줄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쉐르난비체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낀 골드 스트리안이 뭐라 말을 하려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2회 소환자들의 소환이 모두 끝났습니다. 총 인원은 136명입니다.]
“크으……. 우리의 여신은 타이밍이 정말 나쁘구만.”
얼굴에 안타까움을 가득 품은 골드 스트리안이 자리에 앉으며 선택의 제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소란이 있었고 제단 위에 핏자국이 보이는 것을 보니, 이번에도 몇 놈이 객기를 부리다가 죽어나자빠진 것 같았다.
[이번에는 2년 전과 반대의 순서로 소환자를 선택하겠습니다. 먼저 만마의 지배자인 여마왕 쉐르난비체. 스무 명의 인원을 선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신 라헬의 음성이 끝나자 이제껏 자신의 의자에서 말없이 앉아만 있던 쉐르난비체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흉측한 외모를 지닌 마족들과 함께 선택의 제단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유. 애들 죄다 겁먹는 거 봐라. 올해도 쓸모 있는 녀석이 몇 없겠어.”
골드 스트리안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쉐르난비체가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신전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담담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는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곧 쉐르난비체의 선택에 따라 스무 명의 소환자가 마족들의 손에 의해 앞으로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소환자들은 계속해서 비명과 고함을 질러댈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숙여라!”
공포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스무 명의 소환자를 향해 마왕 쉐르난비체는 낮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택의 제단 위에서 엄청난 피분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년! 미친 거 아니야?!”
골드 스트리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자신의 황금 맥주잔을 쾅 내려놓았다.
마왕 쉐르난비체가 고른 소환자 중 살아남은 녀석은 달랑 둘뿐이었다.
“하아. 저런 년을 신으로 모시는 광신도들 사이에서 2년이나 넘게 버틴 녀석들이 있단 말이야? 여러모로 엄청난데?”
그렇게 살아남은 소환자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쉐르난비체의 뒷모습을 보며 골드 스트리안은 천천히 목을 돌리더니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2년이나 넘게 마족의 손에서 살아남은 소환자가 있다고? 검기를 사용할 줄 안다는 인간족의 소환자보다 더욱 흥미가 가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마족의 소환자에 대한 골드 스트리안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곧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