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리그너스 대륙전기 083화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인시네라 호수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한 여인의 머리카락이 너울거리듯 나부끼기 시작했다. 살짝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불어오는 요정의 장난에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코르다에 주둔하고 있는 엘프 군단의 군단장을 맡고 있는 로열 센티널이자 S등급 영웅인 엘 아스린이었다.
“아스린 님. 마족이 찾아왔습니다.”
한참 인시네라 호수의 바람을 즐기고 있던 아스린에게 엘프 왕국의 B랭크 궁병인 에머넌스 아쳐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마족? 아. 또 그 녀석이겠군.”
“그렇습니다.”
에머넌스 아쳐의 보고에 아스린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족과 마족은 먼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종족이었다. 당연히 서로의 영토를 오갈 일이 없었다. 그건 공격해 달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코르다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마족이 한 명 있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는 마족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시 소속된 곳이 마족일 뿐이었다.
몇 년 전, 이 세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다른 세계의 존재. 바로 소환자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특이한 녀석.’
윤호라는 이름의 소환자를 떠올린 아스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올해 543세였다.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삼십 대인 아스린은 3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내며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엘프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한 로열 센티널이기도 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족들을 만났고, 인연을 맺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아스린는 이제까지 호라는 이름의 소환자처럼 뻔뻔하고 웃기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족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군대를 마족이 아닌 엘프로 구성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대를 이끌고 자신들과 연합해 수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쉐르난비체요? 하아. 선택의 신전에서 그녀가 한 짓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립니다. 정말 까닥하다가 죽을 뻔했거든요. 실제로도 많은 소환자들이 목숨을 잃었죠. 그것만 생각하면 진짜 마족은 정이 안 갑니다.”
심지어 호는 엘프들에게는 세계수와 같은 존재나 다름없는 마족의 마왕 쉐르난비체를 비난하는 말까지 한 적이 있었다.
“어?! 에…… 엘 아스린?! 만나서 반갑습니다. 드디어 엘프 군단이 도착했군요. 우와. 한시름 놓았습니다.”
엘 아스린은 처음 윤호라는 소환자가 자신을 만났을 때 건넸던 인사를 떠올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사였기에 아스린이 그가 마족의 소환자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엘프족의 소환자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에게는 마족과 엘프뿐 아니라 수인들도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종족들을 섞어서 잘 융화시키고 있었다. 이 대륙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최근 소환자들에 대한 엘프들의 시선도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어디에 있지?”
“엘 샤난 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군.”
역시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여러 차례 전우로서 전쟁터를 함께 누볐기 때문일까?
엘 샤난과 호라는 소환자의 만남이 굉장히 잦아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엘프들 사이에서 여러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아스린은 그것에 대해 자신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함께 전쟁을 경험하고 전투를 누빈 전우로서 만남을 자주 가진다는 게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족에 소속되어 있지만 호는 엘프에 대해 굉장한 관심과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엘 샤난이 호라는 소환자를 설득해 엘프 왕국으로 데리고 온다면…….’
엘 아스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남녀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은 않았다. 목숨을 함께한 전우끼리 묘한 사랑에 빠져 연인관계가 되는 모습을 아스린은 굉장히 많이 봤었다. 지금의 엘 샤난과 윤호라는 소환자처럼 말이다.
게다가 윤호라는 인물은 마족이 아닌 소환자. 그것도 엘프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신들게 굉장한 호감을 보여주는 소환자였다.
“흐흥.”
기분 좋은 콧소리가 아스린에게 흘러나왔다. 윤호라는 소환자는 그녀가 알고 있는 엘프 왕국의 여느 소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나약한 엘프족 소환자와는 다른 진정한 전사였다.
현재는 마족에 소속되어 있지만 만약 그런 호를 엘프 왕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엘프 왕국은 다른 소환자들과는 다르게 두각을 드러내는 괜찮은 인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림드 산맥이라는 영토를 자신들의 왕국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거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현재 리셴르나가 이끄는 수인 군단은 코르다를 향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티삭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마족 군단의 영향도 있었지만, 언제 윤호라는 인물이 안테로리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였던 그들 세계의 능력을 사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면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엘 아스린 님?”
“후후후. 둘의 관해서는 그냥 신경 쓰지 말도록. 알다시피 나쁜 짓을 할 녀석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사라지는 에머넌스 아쳐를 보며 아스린은 다시 인시네라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프 왕국을 이루는 부족 중 하나인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이름 모를 전설이 담겨져 있다는 인시네라 호수의 풍경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했다.
“…….”
하지만 왜일까? 보고를 받기 전과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연인이라…….”
엘 아스린의 입에서 씁쓸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오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대를 만나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상대는 전쟁터의 치열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나갔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나도 연인을 만들어 봐야겠군.”
543세의 로열 센티널이자 S등급 영웅인 엘 아스린. 그녀는 세계수에서 태어난 이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한 모태, 아니 세태솔로였다.
* * *
“역시 엘프들.”
코르다 성 내에 있는 녹조지 안으로 들어선 호는 기지개를 펴듯 몸을 쭈욱 뻗었다. 싱그러운 내음이 가득한 엘프들의 녹조지인 공원은 숨만 쉬어도 몸이 정화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킬리드와는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디르시나로 돌아가게 되면 나도 엘프들의 공원을 건설해야겠어.”
안테로리에 있었던 수많은 엘프들은 현재 전부 디르시나로 옮겨가 있었다. 힘겹게 지은 자신들의 터전을 불과 몇 달 만에 버리게 되었지만, 엘프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디르시나라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다시금 자신들의 마을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풀이 우거진 공원을 누비던 호는 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분수 앞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한 엘프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엘 샤난이었다.
‘좋아.’
어제 막 디르시나에서 에바스 나이트의 연구 개발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거기에 몇 번이나 그녀와 함께 수인족을 격퇴하기까지 했다. 이제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를 끝내기 위해 남은 조건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녀와 함께 코르다의 호수를 구경하기였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동료로 만들 수 있는 한편, SS등급의 퀘스트인 ‘크리솔라이트의 꿈’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아니, 정정해야겠어. 진행은 무슨…….’
이제 막 발걸음을 디딘 것에 불과했다. 총 9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는 가장 먼저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들 중 하나를 동료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퀘스트는 높은 난이도의 퀘스트답게 2단계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관우는 내 여자’라는 유저의 공략에 따르면 1단계에서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 동료를 얻고, 그 이후 엘프 동료와 함게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떠한 장소를 함께 찾아가야 했다.
그곳은 바로 퓨리온의 산맥이었다. 공략본에 따르면 퓨리온의 산맥에 있는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을 자신의 엘프 동료와 함께 만나야 했다.
하지만 당장 그 퀘스트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퓨리온의 산맥은 바리안스의 대지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현재 드워프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였다. 그리고 호가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이나 다름없는 리셴르나의 세력을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결국 현재 퓨리온의 산맥을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퓨리온의 산맥으로 가려면 리셴르나를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키워야만 했다. 결국 엄청난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게다가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퓨리온의 산맥을 찾아가기 전,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영지 또한 손에 넣어야만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아……!”
호가 분수대 앞 의자에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엘 샤난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눈부신 외모가 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호를 발견한 엘 샤난의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
“오, 오셨어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을 건네는 엘 샤난의 모습은 처음 호를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퀘스트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함께한 전투로 인해 서로 가까워진 탓인지 연유는 알 수 없었다.
“더 예뻐졌네요?”
“아…….”
호의 칭찬에 엘 샤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는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땅을 바라보는 엘 샤난을 보며 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퀘스트를 완료할 차례였다. 하루라도 빨리 SS등급 퀘스트인 크리솔라이트 꿈 1단계를 마치고 디르시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리셴르나가 이끄는 수인 군대는 엘프 군단과 마족 군단이 막아주고 있었지만, 에스트라다 쪽의 공격 루트는 아직까지도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나마 이번에 노획한 수인족의 C등급 마장기 카니앗산이 에스트라다의 성벽에 배치되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와 멍멍이, 아니 로우덴이 킬리드에 있는 까닭에 카니앗산을 사용할 수 있는 영웅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손에 넣은 림드 산맥의 다섯 개 영지 중 디르시나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성장이 이뤄지는 곳도 없었다. 중도시까지 성장시켰던 안테로리를 버리고 옮긴 본거지였다. 한 지역의 패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영지의 발전에 신경을 쏟아야 했다.
‘남은 것은…….’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의 완료까지는 이미 뜸이 들고 밥이 다 된 상황이었다.
그때 호는 아직까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엘 샤난의 귀에 입을 가져다댔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진짜 같아도 가상현실 게임은 어디까지나 0과 1로 이루어진 프로그램.
그러나 이 세계의 엘프들은 달랐다. 외모는 흡사할 정도로 비슷했지만, 이들은 자신과 똑같은 생명체였다.
“샤난. 코르다에는 유명한 호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아?! 네! 맞아요. 인시네라라 불리는 호수가 있어요.”
“혹시 함께 구경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인시네라를요? 무, 물론이죠! 네! 좋아요!”
갑작스러운 호의 말에 엘 샤난의 귀가 빠르게 파닥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뜨거워지고 있었고, 시선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엘프에게 아니,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에게 인시네라를 함께 보자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는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퓨리온 산맥이라…….”
호는 인시네라 호수를 산책하면서 엘 샤난이 말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먼 옛날부터 인시네라 호수와 함께했던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사랑하던 한 드래곤이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드래곤은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버려둔 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드래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아멘드마에서 남쪽으로 날아갔다고 해요. 저는 그게 아마 퓨리온 산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어째서죠?”
“퓨리온 산맥에는 제 친구들이 살고 있거든요.”
엘 샤난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어째서 드워프의 영지인 퓨리온 산맥에 엘프인 크리솔라이트 부족이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였기에, 그에 대해서는 호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를 완료한 호는 킬리드에 남아 있는 두 명의 수인 영웅과 함께 디르시나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진짜로 영지의 발전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최소한 엘프나 마족의 군단이 없어도 리셴르나와 원인족의 도발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을 끌어 올려야만 했다.
리셴르나 쪽은 다행히 이미 방패는 만들어 놓은 상황. 거기에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였던 에스트라다를 노리고 있던 수인족의 병력 편성이 안테로리의 사건으로 인해 지지부진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바로 이 리그너스 대륙에서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 종족의 영웅들은 전부 알고 있는 사건이지만, 소환자들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바로 여신 라헬에 의한 제2차 소환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