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리그너스 대륙전기 078화
“세계수의 은혜가 당신의 앞에 있기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오랜만이죠?”
“그렇네요.”
코르다를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간 사람은 한시진이었지만, 호와 엘 샤난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조금 오래된 일이지만 호가 경험치를 획득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몰래 엘프족의 영토를 침입해 던전을 파괴하고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엘 샤난은 호를 죽이기 위해 무모한 돌격까지 행할 정도로 마족들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엘 샤난의 모습은 그런 과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호에게 친근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엘 아르윈의 덕도 있지만 코르다의 위기를 지켜보지 않고 군대를 지원해 주었고, 또 호가 마족의 소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엘프족들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호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런 엘 샤난을 모습을 보며 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젠 더러운 퀘스트의 첫 실을 꿸 수는 있게 되었네.’
SS등급의 퀘스트인 ‘크리솔라이트의 꿈’. 그 퀘스트를 자신에게 선사한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호는 다른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가 아닌 자신에게 퀘스트를 선물해 준 엘 샤난을 이용해 그 퀘스트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SS등급 퀘스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를 동료로 만들어야 했는데, 호는 이미 엘 아르윈의 도움으로 ‘엘 샤난의 마음’이라는 퀘스트를 받은 상태였다.
[마족 혹은 수인족 10회 격퇴 - 10%
엘 샤난과 함께 천여 명이 넘는 마족 혹은 수인과의 전쟁에서 엘프 병사를 이끌고 승리하기 – 0%
엘 샤난과 함께 코르다의 호수를 구경하기 – 0 %
B랭크 이상의 엘프족 병종 연구를 마치기 – 0%]
호는 다시 한 번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의 세부 진행 사항을 살펴보았다. 그녀를 동료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을 진행해야 했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 내용들이었기에 조만간 공략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일단, 지금의 큰 문제가 끝나게 되면 말이다.
어쨌든 호는 이번 전쟁에서는 엘프, 정확히 말하면 코르다와 함께 움직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수인 군대는 결코 자신의 군대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에스트라다의 공격 루트는 어쩔 수 없이 홀로 막아내야겠지만, 안테로리가 있는 남쪽 방향은 달랐다. 커티삭이 있기는 했지만, 커티삭의 전력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수인족의 군대에게 점령당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옳았다.
호의 눈동자가 킬리드의 집무실에 있는 지도로 향했다. 수인 군대가 안테로리를 점령하고,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도시 킬리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코르다를 통과해야만 했다.
호는 적들의 이런 공격 루트를 설명하며 수인 군대가 마족과 엘프족이 있는 붉은 핏빛의 대지를 점령하려고 한다는 말을 엘 샤난에게 전했다. 그녀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한편 엘프 또한 리셴르나의 수인 군대를 막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것을 조금 과장하기는 했지만, 엘 샤난이 킬리드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효과는 굉장히 좋았다.
붉은 핏빛의 대지, 정확히 말하면 코르다에 살고 있는 엘프들은 수인들을 굉장히 싫어했다. 마족보다도 더욱 말이다. 고르엘이라는 녀석이 몇 번이나 코르다를 공격한 게 그 원인이었다.
그에 반해 마족들과는, 아니 호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코르다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 중에는 호의 병사들을 전우라고 생각하는 엘프들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호가 지휘하는 병사들 중 외형적으로 가장 많이 모습을 드러내는 병종은 엘프의 병과인 엘븐 나이트였다. 코르다의 엘프들이 전우라고 생각하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코르다 공성전 때도 한시진의 지휘 아래 지원을 나섰던 안테로리의 병사들도 전부 엘븐 나이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엘프족 보병을 육성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어.’
엘보. 호는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통해 보병만큼은 엘프가 최고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는 중복 연구를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엘프 보병과 관련된 연구 명령을 내린 바 있다. 마족의 C랭크 보병 병종인 아이스 스파토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닌 이상, 내심 엘프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으면 엘프들이 호의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이것을 이용해 엘 샤난을 어떻게 공략해볼까?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이런 사실들이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가 엘븐 나이트의 양성한 것은 이 세계에서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영향력을 엘프들에게 끼치고 있었다.
“수인족이 움직였어요. 아마…….”
“그들의 목적은 저일 겁니다.”
샤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했다. 림드 산맥이라는 작지 않은 땅덩어리를 빼앗긴 수인 왕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수인족은 안테로리를 손에 넣고 림드 산맥을 수복하기 위해 병사들을 계속해서 북쪽으로 보낼 게 분명합니다.”
호는 엘 샤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테로리의 북쪽에는 코르다가 있었다.
“맞아요. 그리고 수인족이 림드 산맥으로 향하려면 엘프들의 땅을 지나야만 하죠. 이미 리셴르나의 휘하에 있다는 키르고스라는 묘인족이 사신을 보내왔어요.”
“음?”
엘 샤난의 말에 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키르고스라는 묘인족 사신이 엘프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우리는 자신들의 터전을 짓밟은 마족과 소환자만 토벌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길을 빌려 달라고 말하더군요. 안테로리의 점령은 이미 확실하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마장기를 앞세운 공격이니 저도 안테로리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거 참. 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호를 보며 엘 샤난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는 이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다니?
그런 호의 모습을 바라보는 엘 샤난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 나참. 죄송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조금 웃었네요.”
호가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키르고스라는 수인이 내세운 말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말하던 내용과 거의 흡사하지 않은가.
그런 호의 웃음에 엘 샤난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수인족의 군대는 우리 코르다의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어요. 어머니의 힘을 빌려도 그건 마찬가지고요. 내부에서는 수인족과 마족의 싸움에 우리 엘프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며 회의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에요.”
“의외로군요.”
그렇게 되면 정말 곤란했다. 만약 코르다가 수인족에게 길을 내주게 되면, 호는 킬리드에서 마장기를 앞세운 수인족의 병사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안테로리에 보험을 들어 놓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수인족의 성질을 건드리면서까지 킬리드를 공략하고, 림드 산맥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이미 의도한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려면 엘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방패가 되어 줘야만 했다.
문득 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엘프들은 현명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왜죠? 수인족의 대군을 맞닥뜨리면 엄청난 피가 흐를 거예요.”
엘프들을 무시하는 듯한 호의 말 때문일까? 엘 샤난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피가 흐를 겁니다. 과연 그들이 순순히 코르다의 길만 빌릴까요?”
“그건…….”
엘 샤난은 말꼬리를 흐렸다. 호의 말 대로였다. 이미 수인족은 코르다를 공격한 전적이 있었고, 그것이 채 몇 달도 되지 않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 아십니까?”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할 때 꼭 등장하는 가장 흔한 문구였다. 그리고 호는 이 말을 고등학교 때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었다.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엘 샤난의 모습에 호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소환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들과는 그리고 이 세계와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고, 배웠습니다. 우리 세계의 역사에서도 지금과 같은 비슷한 상황이 있었죠.”
호는 임진왜란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신은 명나라, 엘프는 조선, 그리고 수인을 일본으로 가정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러면서도 엘프들에게는 최대한 불리하게끔 각색하여 이야기를 꾸며 나갔다.
다른 세계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주제 때문이었을까?
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맛깔스러운 이야기에 엘 샤난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진실의 눈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수인족은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만약 수인족이 안테로리와 킬리드를 차지하고 난 이후,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코르다라는 땅을 내놓으라고 할 경우, 엘 샤난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말 그럴까요?”
“수인족이 코르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달 전에 경험해 봤을 텐데요. 게다가 수인의 탐욕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불안한 표정을 보이는 엘 샤난을 보며 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 한숨과 함께 엘 샤난이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 종족의 군대가 코르다로 오고 있습니다.”
“네? 군대라면……?”
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왠지 말하는 분위기가 아멘드마의 그리 도움도 되지 않을 병력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왕님의 명령이 떨어졌어요.”
“엘프 왕국의 여왕이라면…….”
호는 한때 가상현실 게임에서 자신의 애인이이도 했던 엘 유스타시아를 떠올렸다.
“윈드 라이더 네 기와 로열 센티널 아스린 님이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코르다로 오고 있습니다.”
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가 킬리드를 차지하고 안테로리에서 생산되는 모든 자원을 림드 산맥으로 옮긴 이유는 엘프를 방패로 삼기 위해서였다. 분명 엘프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큰 규모의 군대가 코르다로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열 센티널은 엘프 왕국이 자랑하는 전사들이었다. 엘 아스린이라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직함을 생각해보면 최소 S등급의 영웅인 건 확실해 보였다.
‘이러다 여기서 종족 대전이 일어나는 거 아니야?’
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커티삭에 있는 페릴 예노스가 보내온 전령에 따르면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 역시 움직인다고 했다. 이미 마장기와 선봉대가 커티삭에서 일주일 거리까지 도착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엘 샤난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이 코르다에 도착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 말입니까?”
“네. 최소 보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지금 코르다의 병력으로는…….”
현재 안테로리로 진격하고 있는 일만 이상의 수인족을 상대로는 단 하루도 막아낼 수 없을 터였다.
그것을 떠올리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엘 샤난을 보며 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라면 제가 충분히 벌어줄 수 있습니다. 보름이라고 하셨죠?”
“네……?”
호의 말에 엘 샤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은 삼천 명가량.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고작 그 병력을 가지고 수인족의 군대를 보름 동안 막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인들에게는 두 대의 마장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호의 모습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 * *
엘 샤난과의 만남 이후 호는 삼천의 병사들을 이끌고 안테로리로 향했다. 한시진의 휘하에 있는 에스트라다를 방어하는 병사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력이었다. 호가 킬리드에서 벗어나 안테로리로 향한 것은 엘프의 군단이 코르다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하다는 그 보름이라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병사들을 이끌고 안테로리에 도착했을 무렵, 호는 게릴라전에 나섰던 리아 캬베데가 패잔병들과 함께 안테로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수인족의 군대는 안테로리에서…….”
리아 캬베데의 보고에 따르면 수인족의 군대는 안테로리에서 이틀 정도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A, B랭크의 병종으로 구성된 일만 명가량의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에, 마장기가 두 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제까지 호가 알고 있는 사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