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리그너스 대륙전기 077화
“세계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엘 유스타시아 님. 마족과 수인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남쪽의 조그마한 도시인 안테로리를 두고…….”
“이미 숲의 친구들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엘프 왕국의 여섯 장로 중 하나인 엘 카드위드의 말에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엘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장신구와 함께 흰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미의 종족이라는 엘프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 유스타시아.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엘프 왕국의 여왕이었다.
“수인족의 상급 대장인 리셴르나와 상급 마족 중 하나인 볼 붸르니체스가 움직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이 센티널이자 아멘드마를 지키는 엘 라이린이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마족과 수인족의 정면충돌……. 과연 우리 엘프들에게도 피해가 갈까요?”
“네. 두 종족의 충돌 지역에는 저희 엘프들도 끼어 있습니다.”
그 대답과 함께 엘 카드위드는 안테로리와 코르다에서 있었던 일을 여왕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
카드위드가 말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마족에 소속된 소환자가 엘프들의 주거지를 만들어 엘븐 나이트를 양성했다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수인족의 공격을 받은 엘프들을 도와줬다는 이야기에 유스타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족의 소환자는 서로 함께 양립할 수 없는 엘프와 다크 엘프로 구성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어, 어떻게 우리 친구들이?! 그런 타락한 존재들과 함께한다고요?”
“저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호라는 이름의 소환자는 마족이면서도 저희 엘프 친구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놀랍네요. 소환자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일 줄은 몰랐어요.”
선택의 신전에서 엘프 종족이 데리고 온 소환자들은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니, 이건 좋은 의미의 표현이었고, 사실상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오크 한 마리도 상대할 줄 몰랐고, 정령과 마법에 대한 재능도 엘프들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가끔 생활을 지혜를 보여주며 엘프들을 놀라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끔이었다. 게다가 한 남성 소환자가 엘프의 미모에 홀려 강제로 추행을 하다가 들켜 사형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 일 이후, 엘 유스타시아를 비롯한 엘프들은 소환자에 대해 굉장히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여신 라헬에 의한 소환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 왕국 내부에서는 소환자를 받아들이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처럼 호라는 이름의 소환자가 특별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환자들에게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소환의 날에 대한 엘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예전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좋지는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선택의 신전에서 내려야겠군요. 과연 이번에는 몇 명의 이방인들이 우리 대륙을 찾을지…….”
엘 유스타시아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어쨌든 마족과 수인족의 큰 충돌이 일어날 지역에는 엘프들의 소중한 땅도 있었다. 그리고 유스타시아는 마족과 수인들이 엘프의 소중한 땅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래왔기 때문이었다.
“코르다에 윈드라이더 네 기를 배치하도록 하세요. 또한 로열 센티널인 아스린과 십만의 병력을 코르다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엘프 왕국의 여왕 엘 유스타시아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세 종족의 군단급 전력이 붉은 핏빛의 대지에 모이기 시작했다.
* * *
“온다!”
경사면을 타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는 적의 모습을 리아 캬베데가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며 말했다. 적들은 수인족의 B랭크 기병대인 켄타우로스 전사였다. 주위를 살펴보며 조금씩 이동하는 것이 아마 정찰을 나온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들을 찾으려는 녀석들일지도 몰랐다.
리아 캬베데가 이끄는 병사들은 안테로리로 향하는 수인족 병사들을 잦은 기습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만약 자신들을 찾으려는 녀석들이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됐다. 한 마리라도 놓치게 되면 수인족의 마장기 카니앗산이 등장할 테고, 그렇게 되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수는 열. 한 번에 덮친다. 켄타우로스 전사의 이동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니까, 절대 틈을 줘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네, 대장님.”
리아 캬베데의 말에 엘븐 나이트들과 정예 실리스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안테로리의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특전대였다. 특전대라고 해봤자 딱히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몇 날 며칠 동안 나름대로 수인족의 발을 제법 오랜 시간 묶어 놓는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니들은 왼쪽, 너희는 오른쪽으로 덮친다. 무조건 저 녀석들의 다리부터 잘라. 하나라도 자르면 된다. 알았지?”
“네, 대장님.”
한때 수인족 마을을 다스렸던 경험 때문인지, 리아 캬베데는 수인족의 병력 구성을 비롯해 그들의 약점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리아 캬베데가 간략하게 켄타우로스 전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설명을 끝낼 즈음, 놈들이 바스락바스락 풀 밟는 소리를 내며 리아 캬베데와 병사들이 숨어 있는 장소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킁. 여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히이잉! 경계를 늦추지 마. 마족 잔당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 잊지 말라고.”
“그래봤자 패잔병들 아니야? 랭크도 낮은 녀석들이던데? 나타나기만 하면 내 창으로!”
머리가 벗겨진 켄타우로스 전사 하나가 호탕하며 웃더니 자신의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장기를 포함한 많은 아군이 근처에 있기 때문일까? 긴장된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격!”
그렇게 장난스럽게 창을 휘두르던 켄타우로스 전사가 바로 자신들의 앞까지 다가오자, 리아 캬베데가 벌떡 일어나 빠른 속도로 창을 휘두르던 녀석을 지나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가장 뒤에 위치한 녀석이었다.
“저…… 적?!”
“아니, 잠깐. 묘인족이잖아?! 적이다!”
갑작스러운 수인족의 등장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던 켄타우로스 전사들은 곧 마족을 지휘하는 녀석이 자신들과 같은 수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그런 행동은 실수나 다름없었다. 켄타우로스 전사들의 랭크가 B라고는 하지만 리아 캬베데는 일반 병사가 아닌 영웅, 그것도 A등급의 영웅이었다.
퍼어억!
리아 캬베데의 정권을 제대로 복부에 얻어맞은 켄타우로스 전사 하나가 내장이 파열되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수십 발의 화살이 쓰러진 켄타우로스 전사에게 박히기 시작했다. 정예 실리스들이었다.
“혼자가 아니야!”
“엘프와 다크엘프도 있어!”
곧 엘븐 나이트들이 사방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리아 캬베데의 명령대로 켄타우로스 전사의 다리만을 노렸다. 켄타우로스의 발길질에 몇몇 엘븐 나이트들의 머리가 터져나가기도 했지만, 엘븐 나이트들은 집요했다.
“히이잉!”
“으아악!”
“크아악!”
곧 비명이 울려 퍼지며 열 명의 켄타우로스 전사가 차가운 시체로 변했다.
“후퇴한다!”
빠르게 시체를 흙 속에 파묻은 리아 캬베데는 병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 벨은 안테로리의 주민들이 모두 피신시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빌어먹을. 그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런 안테로리의 상황을 떠올리며 리아 캬베데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호는 어떻게든 안테 로리의 영지민들을 림드 산맥으로 안전하게 이주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리아 캬베데는 계속해서 전투를 벌였고, 방금 전 엘븐 나이트들이 또 희생되며 이제 남은 병력은 사백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삐이이이이!!
뿔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고막을 찌르기 시작했다. 리아 캬베데는 드디어 올게 왔다는 생각과 함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들켰다! 모두 흩어져서 도망친다! 모이는 위치는 탐스러운 등짝! 탐스러운 등짝이다!”
리아 캬베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다니? 아까 전 켄타우로스 전사들은 미끼임에 틀림없었다.
“큿…!…”
뒤에서 날아오는 석궁 화살을 피해 달리며 리아 캬베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멀리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게릴라전은 여기서 끝인 것 같았다.
그렇게 리아 캬베데는 약속했던 장소인 탐스러운 등짝에 도착했고, 거기 모인 스물네 명의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어둠을 틈 타 안테로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 리아 캬베데는 수인들의 공격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패잔병들과 조우했고, 그들을 자신의 부대에 합류시켰다. 그로 인해 병력의 숫자가 스물넷에서 육십까지 불어났지만, 그래봤자 백 명도 되지 않았다.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리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마장기 두 대가 포함된 1만여 명에 가까운 군대를 향해 고작 이 정도의 패잔병을 이끌고 돌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수인족들은?”
“저희와 하루 반나절 정도의 차이를 두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발 빠른 녀석은 이미 지근거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네.”
리아 캬베데는 자신의 팔을 혀로 핥다가 지도를 펼쳤다. 벌써 며칠째 목욕을 하지 못한 탓에 털색이 꼬질꼬질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자신들이 있는 대략적인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니 안테로리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했을 경우 이틀 정도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이 없더라도 숲을 통과해 밤새도록 달린다면 이삼 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음.”
리아 캬베데가 날카로운 눈으로 지도를 바라봤다. 수인족의 본대가 안테로리에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나흘 정도. 선봉대라면 약 사흘 남짓 정도면 성벽 위에서 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안타까웠다. 안테로리의 군대는 D랭크 병종인 엘븐 나이트와 C랭크 병종인 정예 실리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뭐, 고블린이나 오크, 다람쥐 같은 녀석들에 비하면 포식자 같은 존재긴 했다.
하지만 이런 녀석들이 아닌 A, B랭크의 병종이 자신의 휘하에 있었다면 좀 더 질기게 리셴르나의 수인들을 물고 늘어질 수 있었을 터였다.
거기에 대마장병들도 함께했다면 리아 캬베데는 저들이 자랑하는 C등급 마장기 카니앗산 한 대 정도는 파괴할 자신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이다.
물론, 자신의 오너인 호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겠지만 영혼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리아 캬베데는 호를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었다.
“곧바로 안테로리로 향한다. 수인족 선봉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튀어야겠어.”
리아 캬베데가 남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안테로리에는 아직 남아 있는 녀석들이 있을 테고, 그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말해야 했다. 수인족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리아 캬베데와 패잔병들이 안테로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귀환하고 있을 무렵, 호는 삼천의 병력을 이끌고 킬리드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킬리드에는 호의 편지를 받은 코르다의 영주 엘 샤난이 방문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