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리그너스 대륙전기 076화
‘볼은 뭐야? 후우. 네이밍 센스하고는. 볼이나 공이나 똑같은 거 아니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개와 견인은 그래도 다른 존재일 텐데, 로우덴이라는 눈앞의 견인은 현실 세계의 개라고 생각될 정도로 행동거지가 너무나 똑같았다. 그것도 귀찮을 정도로 말이다.
만약 일이라도 못하면 화라도 내겠는데, S등급이라는 클래스는 날로 먹은 게 아닌지 일을 잘해도 너무 잘했다. 게다가 로우덴의 장점은 단순히 이 녀석의 능력치가 뛰어나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제 도움이 필요 하십니까?’
그것은 로우덴이 보유한 스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스킬 효과로 인해 추가적으로 정치력이 상승한 다섯 영웅의 활약으로 디르시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력이 상승한 영웅들의 활약도 지력 SS급, 정치력 S급의 로우덴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로우덴은 홀로 여러 개의 임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속도도 무지하게 빨랐다. 아르윈이 열흘 걸릴 만한 일을 로우덴은 단 하루면 끝내곤 했다. 정말 아끼고 아껴야 할 녀석인 것은 맞지만, 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이 녀석의 존재가 점점 귀찮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와 함께 볼을 이용한 놀이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머엉?”
한참이나 호가 동그란 공을 들고 머뭇거리는 모습에 로우덴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딴에는 영주인 호에게 놀이를 하자고 말하는 게 그의 기분을 거슬리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귀를 축 늘어뜨리고 대놓고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로우덴의 모습은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공 한 번 던져주는 게 뭐가 어려울까……. 일도 잘하는 녀석인데, 포상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호는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온몸의 힘을 집중시켜 저 멀리 성 밖을 향해 공을 획 던졌다.
“멍!”
그리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공을 보며 네 발로 뛰어가는 로우덴의 뒷모습을 보며 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S등급 영웅을 득한 것은 좋은데, 뭐랄까. 조금은 아니, 많이 이상한 녀석이었다. 혹시 다음에도 S등급 영웅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웬만하면 견인족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
로우덴을 포함해 세 명의 영웅이 합류하고 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호는 해양석이라 불리는 디르시나의 특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안테로리의 지원으로 인해 재정적인 문제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자금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해양석은 바다 속에서 커다란 조개를 잡아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직 개발하지 않은 영지 기술도 몇 개를 완료해야만 했다.
하지만 로우덴의 등장으로 해양석 생산에 필요한 영지 기술은 순식간에 개발이 완료되었고, 바로 어제 특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해양석 어장 건설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디르시나의 특산품 생산 공장이 건설되는 모습을 보며 호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안테로리의 지원이 없이도 리스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영지 정보(Status)>
디르시나(소도시[C등급]) - '림드 산맥'
인구 – 22,311
보유 리스 – 429,313
보유 식량 – 881,212
병사 – 엘븐 나이트(D) 5,500, 정예 실리스(C) 1,000.
내정 건물 - 중형 식량 저장고 28, 주점 1, 대시장 28, 중형 어장 12…….
군사 건물 - 대형 망루 18, 병영 2, 대장간 2. 마법 연구소 1, 튼튼해 보이는 성벽
리스 수입 – 19,270 / 월
식량 수입 – 46,472 / 월
특산품 – 해양석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발전이 된 디르시나였다. 안테로리에 비하면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따라온 상황이었다.
문제는 적어도 이런 식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영지가 아직 네 개나 더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느긋하게 영지 발전에만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안테로리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경계 지역 가까이에서 수인족의 마장기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아스트리드 벨의 보고도 있었다.
“림드 산맥의 전 영지에서 월수입 오만 가량만 획득할 수 있을 때까지, 수인들이 기다려 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로우덴이 있더라도 최소한 다섯 달, 아니 1 년가량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수인족이 인내심이 넘쳐나는 종족도 아니고,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 준다는 것은 꿈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어쨌든 원인족의 공격이 예상되는 에스트라다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인족의 군대가 모이는 게 지지부진하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테로리는 조만간 수인족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제 슬슬 키마라이를 옮겨야 하겠는데?”
마족의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 현재 키마라이는 안테로리에 보관되어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오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테로리를 노리는 수인들에게 계속해서 위압감을 주며 전쟁 억지력을 발휘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 키마라이마저 없었다면, 수인들은 벌써 이때다 하고 안테로리를 공격했을 터였다.
호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자신의 뺨을 짝짝 쳤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안테로리는 분명 빼앗길 영지였다. 막고 싶어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전력이 집중된 수인족의 힘은 자신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림드 산맥은 달랐다. 만약 리셴르나가 지휘하는 수인들이 이곳 림드 산맥까지 오게 된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보험을 들어 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호…… 호 님! 호 님!”
그때였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엘 아르윈이 호의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는 모습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진 것 같았다.
그런 엘 아르윈의 모습을 보며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수인족의 대군입니다!”
“젠장!”
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역시나 나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고, 올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급한 상황인 만큼 아르윈의 보고는 빠르게 이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아트리그에서 안테로리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였다.
C등급 마장기까지 동원한 공격에 경계 지대의 엘븐 나이트와 정예 실리스들이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 후 패잔병들을 수습한 리아 캬베데가 안테로리에서 오 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유격전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A등급 영웅이라는 능력치 때문인지, 현재 간신히 수인 군대의 발을 묶어 두고 있다는 보고였다.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당장 아스트리드 벨에게 연락을 취해 키마라이를 포함한 안테로리의 주민들과 재화를 디르시나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이미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철수는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또한 ‘로리는 싫어’ 작전도 실행하라는 말도 덧붙이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마친 호는 재빠르게 책상에서 편지를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이것을 코르다의 영주 엘 샤난에게 가져다주도록 해. 또한 지금 당장 로우덴을 불러 줘. 병사 삼천을 이끌고 킬리드로 가야겠어.”
“네!”
이미 예상했던 일인 만큼 호의 대처는 굉장히 빨랐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큰 위기 상황인지 충분히 알고 있는 만큼 한시라도 미적거릴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호가 이끄는 삼천의 병사들이 디르시나에서 킬리드로 향했다.
* * *
“예노스 님!”
멜리아 비쉬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가 있는 집무실을 찾았다. 멜리사 비쉬가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페릴 예노스는 자리에 있었는데, 그녀가 일주일 중 오 일 정도를 집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매번 영지의 일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밍기적거리며 노는 모습만을 보여 온 그녀였지만, 오늘 페릴 예노스는 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굳은 표정과 진지한 분위기는 정말 커티삭의 지배자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페릴 예노스가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멜리아 왔어?”
페릴 예노스의 시선이 멜리아 비쉬에게 향했다. 그렇게 한동안 눈빛을 교환하던 두 여인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볼 베르니체스 각하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조건 마장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해줘. 최소 1개 군단 이상으로 보이는 수인족의 대대적인 공격이다. 커티삭의 전력으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어. 호와 안테로리의 상황은 어때?”
“호는 안테로리가 아닌 림드 산맥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테로리의 병사들은 성 밖에서 유격전을 펼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수인족의 C등급 마장기인 카니앗산이 등장한 이상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유격전? 마장기를 상대로 유격전은 한다고? 왜?”
페릴 예노스가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C등급이라고 해도 마장기는 마장기였다. 마장기가 발포하는 마력탄은 모여 있는 적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력한 합금으로 만들어진 마장기의 동체는 부드러운 생명체의 피부를 가볍게 짓누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기 위한 용도인 것 같습니다. 안테로리의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주민을 대피시켜? 그것도 호의 명령인가?”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
페릴 예노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에게 있어 도시의 주민들은 소모품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페릴 예노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마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환자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페릴 예노스는 그런 호의 명령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마족의 깃발이 꽂혀 있는 영지가 마장기를 앞세운 수인족의 병사들에게 공격을 당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위대한 마족에 대한 수인족의 도전이나 다름없어. 전쟁을 준비한다. 전면전이다!”
페릴 예노스가 말했고, 멜리아 비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각 종족의 경계가 맞닿은 분쟁지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마장기를 동원한 군단급 이상의 규모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전력이었고,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마족은 걸어온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그날 커티삭의 전령이 곧바로 볼 붸르니체스가 머무는 성으로 향했고, 페릴 예노스의 보고를 받은 볼 붸르니체스는 리셴르나의 진격에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약자를 물어뜯는 건 이 세계의 당연한 법칙이지. 그리고 약자는 우리가 아닌 동물 녀석들이다. 자! 나의 용감한 전사들이여! 붉은 핏빛의 대지로 향한다! 건방진 짐승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보여주자!”
곧 볼 붸르니체스 휘하의 마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대규모 전투에 그들은 신이 나 있었다. 마족의 C등급 마장기인 기즈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캐터필러를 이용해 이동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데스 나이트들을 비롯한 최정예 병사들이 커티삭을 향해 진군했다.
그 시각, 이런 마족과 수인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또 다른 종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