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리그너스 대륙전기 075화
“일단은…….”
고개를 크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호는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다섯 개나 되는 도시를 동시에 발전시키기에는 영웅의 수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현재 호의 휘하에 있는 영웅은 자신과 소환자를 포함해 여덟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중 셋은 아직 안테로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영지를 놀리는 것은 아깝지만, 모든 도시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호의 결정은 바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었다. 림드 산맥의 지리적인 상황을 보면 킬리드, 베코바, 해머스 이 세 도시는 일단 안전지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당장 급하게 발전을 시킬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디르시나와 에스트라다는 달랐다. 여기서 호가 우선적으로 선택한 곳은 교통의 요충지인 디르시나의 발전이었다.
디르시나는 우선 블루 스케일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또 설령 수인족이 에스트리다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림드 산맥 내에 위치한 다른 도시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디르시나를 통과해야만 했다.
“좋아.”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디르시나에 주점과 방어 건물을 건설하고, 리스 수입을 올려줄 수 있는 특산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법에 따르면 디르시나의 특산품은 해양석이라는 돌로, 마나를 이용한 무기에 들어가는 원재료였다. 그리고 병장기와 관련된 특산품은 가격이 꽤 비싸게 나가는 편이었다.
* * *
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디르시나와 에스트라다에서 동시에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에스트라다에서는 요새와 방어 시설을 비롯해 군사 시설이 건설되고 있었다. 수인족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었다. 마장기를 앞세운 공격은 막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호는 영지 하나를 공짜로 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에스트라다에서 건설을 지휘하는 인물은 한시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호에게 임명을 받은 에스트라다의 영주이기도 했다.
현재 호와 함께 한시현, 사드나인, 엘 아르윈이 머물고 있는 디르시나는 전체적으로 모든 게 바뀌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구가 영지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지 곳곳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망치와 톱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영지의 대부분을 뜯어고치는 대공사였다.
두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대규모 공사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호는 이 돈들을 전부 안테로리에서 얻어내고 있었다. 안테로리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의 판매액과 자체적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다행히 공사비용은 간신히 충당되고 있었다.
하지만 호는 안테로리의 물자를 이동시켜 다른 영지들을 발전시키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빨리 영지를 리스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바꿔야 해.”
호는 더욱더 디르시나의 영지민들을 독려했다. 안테로리가 수인족의 공격을 받게 되면 리스와 식량 지원은 곧 끊어지기 때문이었다.
이 두 도시와는 다르게 킬리드, 베코바, 해머스는 관리하는 영웅조차도 없어 완전히 방목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바람에 세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영지민들의 불만도도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에게는 나머지 세 영지를 관리할 수 있는 영웅도, 자원도,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디르시나의 주점이 완성되자 호와 디르시나에 머물고 있는 영웅들은 조금이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새롭게 세 명의 영웅이 호의 휘하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라는 명성 때문인지, 호도 아닌 한시현의 제안에 몇몇 영웅들이 등용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헤헤. 오빠 저 잘했죠?”
안테로리에서 그랬듯 디르시나에서도 주점 관리를 맡다가 이번에 제대로 한 건, 아니 세 건을 올린 한시현은 이번 일로 상당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래, 아주 잘했어. 언니보다도 더욱 멋진데?”
“와아? 그 정도예요?”
혀를 내미는 시현의 모습에 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시현도 슬슬 D등급 클래스를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조만간 괜찮은 클래스를 추천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호는 시현의 추천으로 새롭게 등용한 영웅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인간 남성과 여성 엘프 그리고 남성 견인족이었다.
“잘 부탁한다. 영지에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군.”
“나만 믿으세요! 멍멍!”
“세계수의 은혜가 당신 앞에 있기를…….”
세 영웅의 인사에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얼굴과 정보를 바라보았다.
먼저 삼십 대로 보이는 대머리 남자는 철퇴를 무기로 사용하는 전사로 보였다. 이름은 케반스. 그는 D등급의 상급 사관 클래스를 지니고 있는 영웅으로, 통솔력과 무력수치에 강점을 보이고 있었다.
여성 엘프의 이름은 엘 라디아였다. 케반스와 마찬가지로 D등급 영웅이었는데, 지력과 정치 수치가 굉장히 높았다. 그에 반해 직업은 근접 전투 직업을 지니고 있는 언밸런스한 영웅이었다.
게다가 D등급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스킬조차 없었다. 뭐, 그래도 지금 한 손이 아쉬운 마당인데다가 지력과 정치 수치가 높은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영웅이었다.
‘그런데 엘프가 어떻게 등용이 됐지?’
안테로리에서 다시 이주해 온 엘프들이 림드 산맥 곳곳에 많이 거주하고 있기는 했다. 이곳 디르시나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엘프가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는 마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프 영웅이 등용이 되다니, 한 지역의 패자라는 명성이 꽤나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드디어 제 지혜로 도울 위대하신 분을 찾았습니다. 멍.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멍.”
그리고 마지막은 이 견인족 남성이었다. 이미 호의 휘하에 있는 견인족 사드나인과는 다른 종인지 생김새가 꽤 차이가 있었다. 사드나인이 도베르만을 닮았다면, 이 녀석은 사모예드? 혹은 시베리안 허스키? 를 닮은 외모였다.
그의 이름은 로우덴. 안경을 쓴 이 견인족은 지적인 이미지를 상당히 강하게 풍기는 녀석이었다. 본능을 우선시하는 수인족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종족의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을 주는 녀석이었다.
어쨌든 시현의 말에 따르면 로우덴은 자신을 셰필드라는 종족이라고 소개했고, 원인족에게 큰 피해를 준 호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호를 기다리며 시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디르시나의 상황에 푸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일손을 거들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사이가 꽤 안 좋았나 보지?’
이런 로우덴의 반응은 수인 왕국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호가 수인 왕국의 영토를 빼앗기는 했지만, 다양한 종족의 연합체답게 수인 왕국은 종족 간의 분쟁이 상당히 잦았다. 시현의 말에 의하면 로우덴이라는 이 견인족은 원인족에게 원한이 꽤 깊은 모양이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다.
‘어쨌든 나야 대환영인데, 저 녀석을 어떻게 써야 되려나…….’
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로우덴에게 향했다. 그는 케반스나 엘 라디아와는 격 자체가 다른 영웅이기 때문이었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로우덴 셰필드
2. 성별 : 남(131)
3. 종족 : 견인족
4. 소속 : 마족
5. 레벨 : 447
6. 직업 : 진실의 현자(S)
7. 세부수치
통솔 : 442 / 500(S)
무력 : 96 / 100(C)
지력 : 711 / 750(SS)
정치 : 499 / 500(S)
매력 : 287 / 300(A)
8. 특성 : 상재, 꿰뚫는 마음, 바람의 발걸음, 견인족의 충성, 거짓 간파.
9. 스킬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S랭크.
세상에는 가끔 천재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범인들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홀로 해결할 수 있는가 하면, 동시에 여러 일을 함께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천재가 하나라도 당신의 주위에 있어 도움을 준다면? 모든 게 편해질 겁니다.
-효과 : 도시에 주둔한 모든 영웅들의 정치력이 이 스킬을 보유한 영웅 정치력의 20%만큼 추가적으로 상승합니다.(모든 영웅의 정치력 +100)
-효과(2) : 동시에 여러 임무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진행하는 임무의 수가 많을수록 효율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효과(3) : 천재는 천재를 알아봅니다. 만약 같은 스킬을 지닌 영웅이 있다면 1.5배의 효율을 낼 수 있습니다. 이 효과는 중복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견인족의 충성> S랭크.
몇몇 특별한 견인들은 자신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합니다. 이런 견인족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면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견인족의 충성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효과 :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한 능력치였다. 특히나 로우덴이라는 이 녀석의 지력 수치는 한계치가 무려 SS등급이었다. 만약 지력 랭크를 한 등급만 더 올릴 수 있게 된다면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대한도인 1000까지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런 녀석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지?!’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통일한 자신이 SS등급의 지력 수치를 지닌 이런 특별한 녀석을 모를 리 없었다. 삼국지 게임을 주로 플레이하는 게이머가 제갈량이나 곽가라는 인물을 모를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의 능력은 가상현실 게임 속에서도 상위에 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을 향해 멍청한 웃음을 보이고 있는 로우덴이라는 녀석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호는 생각을 포기하고는 로우덴을 바라봤다. 자신이 아무리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덕후라고는 해도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영웅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게임을 할 당시 호는 수인족의 공략을 꽤 늦은 시간에 진행했었다. 만약 게임 속에서 일찌감치 죽은 녀석이라면 자신이 모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살펴보면 뭔가 정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공략본을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땡잡았으니까.’
정말 시현이 제대로 한 건 해냈다. 눈앞의 견인족 로우덴은 현재의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녀석이었다. 비록 이 드넓은 대륙에 S등급 클래스를 지닌 영웅들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S등급 영웅들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잘 부탁하지. 로우덴 셰필드.”
“버…… 벌써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멍! 정말로 영광입니다. 멍.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헥헥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로우덴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푼수 끼가 가득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S등급 영웅이라는 위력 때문일까? 저런 푼수 같은 모습도 왠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정말로 위험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 님! 시키신 일을 모두 끝냈습니다. 멍!”
“특산품 조사 말씀이십니까? 멍! 전부 끝냈습니다. 여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오늘도 호 님의 모습에서 절로 아우라가 느껴지는군요. 역시 제가 충성을 맹세한 분답습니다.”
“저…… 외람된 부탁입니다만,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거 말씀이십니까? 견인족이 놀이에 사용하는 볼이라는 물건입니다. 견인들끼리 서로 멀리 던져서 물어오는 놀이에 많이 사용되는데…….”
“…….”
로우덴의 이런 수다는 끊이질 않았다. 그날도 마을 순찰을 돌던 호는 로우덴이 내민 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에 묘한 기대감을 담은 채 로우덴은 계속해서 혀를 내밀고 있었다. 문득 호는 현실 세계에서 주인이 던진 공을 개가 계속해서 물어오는 것을 반복하는 모습이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