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리그너스 대륙전기 074화
“흐흥. 불량품은 아닌 모양이네.”
리아 캬베데가 상자에 가득 쌓인 스크롤을 하나 집어 들고는 말했다.
그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 스크롤에 불량도 있나요?”
“응. 냐아앙. 있지. 마법 스크롤이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려면 마나를 사용할 줄 알아야 되거든. 그것을 악용해 가짜를 진짜처럼 파는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있긴 해. 주로 수인 상단이나 마족 그리고 인간 상단에서 그런 짓을 하지.”
“……그렇군요. 앞으로 주의해야겠네요.”
리아 캬베데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이 세계의 또 다른 힘이라는 마나라는 것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레드 벨벳이 자신을 속이려고 했다면?
자칫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했을 게 분명했다. 아스트리드 벨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미 한시진은 이 세계의 고유 능력이라는 마나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걸 의식한 것이다.
“그나저나 호 님은 어째서 파이어볼 스크롤을 이렇게나 대량으로 구입한 거지? 냥냥. 일반 병사들이라면 이게 유용하겠지만, 마장기나 고위 병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을 텐데. 땅바닥에 묻으라는 걸 보면 전쟁에 쓸 건 아닌 모양이고. 왜지? 왜지?”
파이어 볼은 사실 마법 방어력이 좋은 병과나 마장기에게는 그리 쓸모가 없는 마법이었다. 3서클의 범위 공격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마장기는 무려 7서클의 마법 공격에도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C등급 마장기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법 스크롤이나 낮은 클래스의 마법사들은 전쟁에서 그리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고 서클의 마법사가 아닌 이상 궁극적으로 전쟁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마장기를 막기란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리아 캬베데의 중얼거림에 벨은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 그녀가 말했던 대로 호는 파이어 볼 스크롤을 안테로리의 성안 곳곳에 묻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언제든지 찢어 마법을 발동할 수 있게끔 말이다. 거기다가 원거리에서도 스크롤을 찢을 수 있는 타이머 기술까지 현재 엘븐 메이지 엘 카닐슨이 개발 중에 있었다.
아스트리드 벨은 호가 어떤 이유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세계의 역사에서는 몇 번이나 등장했던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종족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전술인 것 같았다.
‘특이한 세상이야.’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의 종족들에게는 자신들이 살던 마을이나 성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 자신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전쟁에 벌어지고 마을의 주인이 바뀐다 해도 거기에 살아온 주민들 대부분은 도망을 가지 않은 채 바뀐 현실에 순응했다. 심지어 자신의 처지가 노예가 되어도 말이다.
하지만 소환자는 달랐다. 열심히 마을을 성장시키고 키워나가기는 했지만, 마을이나 성에 대한 애착은 없었다. 아니,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위험하다 싶으면 쉽게 버릴 수 있는…….’
특히나 지금같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지역에 위치한 마을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열심히 성장시켰던 마을의 모든 것을 적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화려한 불꽃놀이라도 하고 싶으셨나 보죠.”
“냐앙?”
스크롤을 보던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리아 캬베데에게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곧 스크롤을 파묻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리아 캬베데와 사드나인 그리고 다크엘프들이 이 일을 맡았는데, 아주 비밀스럽게 작업을 수행하라는 호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영웅과 함께 어둠 속에서는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다크엘프들이 이번에 스크롤을 파묻는 작업을 도맡은 이유는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이거 며칠 뒤에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아깝다. 그렇지?”
한 여성 다크엘프가 얼굴 가득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유리병에는 찰랑거리는 노란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크엘프의 기름이라는 특산품이었다.
다크엘프들이 소량으로 생산하는 물품인 이 기름은 다크엘프 종족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특별한 날마다 사용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자신들의 매끈한 몸매를 더욱 도드라지게 해 매력을 한껏 발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
다크엘프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쪼르륵 소리와 함께 다크엘프의 기름이 스크롤을 적시며 땅바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현재 이러한 광경은 안테로리 성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 *
수인 왕국을 이루는 종족 중 하나인 원인족.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림드 산맥의 도시에는 현재 모조리 마족을 의미하는 검은색 날개가 그려진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그건 안테로리의 영주이자 마족 소속인 호의 작품이었다.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호는 미간을 찡그리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스케일이 커져도 너무 커져 버렸다. 킬리드를 시작으로 베코바, 디르시나, 해머스, 에스타라다까지 림드 산맥의 도시 다섯 개를 모조리 손에 넣어버린 것이다.
원래의 계획은 킬리드의 점령이었다. 하지만 림드 산맥 내의 도시를 통치하는 수인족의 전력이 너무나 허약했던지라 하나씩 점령해가다 보니 어느새 림드 산맥의 패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마을을 지키는 병사들이 다람쥐 창병 마흔 마리, 원숭이 투석병 여든 마리에 불과한 것을 보고 그냥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호는 순식간에 한 지역의 패자로 급부상하며 엄청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일개 영주와는 달리 한 지역의 패자는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특혜라 할 만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런 면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틀을 딴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흡사한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장기의 제작이었다. 마장기는 한 지역의 패자가 아닌 이상 연구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걸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빌어먹을 원숭이 녀석들. 허약해 빠져가지고서는…….”
자신이 직접 통치할 수 있는 도시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건 단순히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의 규모와 군대의 모집과 양성 속도가 빨라진 것 정도가 아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다섯 개의 도시를 발전시키고 전력을 키워나간다면, 훗날 충분히 대륙을 도모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한 지역의 패자가 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전력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안테로리처럼 도시를 발전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수인들도 바보는 아닐 것이다. 그들이 지역을 통째로 빼앗겼는데도 그것을 그냥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곧 무시무시한 반격이 있을 거라는 것은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호는 그것에 대한 대비책까지 어느 정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미 림드 산맥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어 수인 왕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도시 에스트라다에는 아이스 스파토이와 정예 실리스가 포함된 육천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리고 골칫거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
지도를 바라보던 호의 시선이 에스트라다 바로 왼쪽에 위치한 도시로 향했다. 그곳은 해양 도시 디르시나였다.
“지도가 조금 이상하긴 하네.”
자신의 집무실에서 림드 산맥의 지도를 보던 호는 디르시나의 위치를 좀 더 오른쪽 위로 옮겼다. 디르시나의 위치가 해양 도시 치고는 너무 육지 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인들이 만든 지도 같은데, 정확성이 높지 않은 것 같았다. 뭐, 지도 치고는 조금 귀엽게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보니 아마도 계급이 높은 어린 수인이 그린 것 같았다.
어쨌든 에스트라다가 수인족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최전방 도시라면, 디르시나는 인간들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항구 도시였다. 그리고 디르시나는 현재 호를 비롯한 영웅들이 모여 있는 도시기도 했다. 한 마디로 디르시나는 현재 이 림드 산맥의 수도나 다름없는 도시였다.
타 종족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도시로는 엘프족과 경계 지역에 위치한 킬리드도 있었다. 하지만 코르다의 센티널인 엘 샤난은 현재 자신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기에, 호는 킬리드에는 거의 방어 병력을 꾸리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는 정예 실리스 백 명을 배치한 게 전부였다. 심지어 킬리드에는 주둔하고 있는 영웅도 없었다.
“뭐, 코르다에서 생산할 수 있는 병종은 현재로서는 기껏 E, F랭크 병사들뿐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 그렇다고 엘 샤난이 뒤통수를 칠 것 같지도 않고.”
정예 실리스 백 명이면 설령 엘 샤난이 딴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녀가 쳐들어오는 것 정도는 막아낼 수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인간들의 도시는 아니었다. 호의 눈동자가 지도에 그려진 디르시나의 북쪽에 위치한 인간들의 도시로 향했다.
“림드 산맥의 일로 인해 이제 수인들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이렇게 완전히 돌아선 마당에 인간들과의 트러블은 어떻게든 막아야 해.”
호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인간들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인간이니 같은 편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다. 게다가 자신이 소환자라는 사실은 이 근방에서는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족의 구성을 떠올렸다.
먼저 이 세계의 인간들은 여덟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인간들의 대표 격인 왕국은 바로 SSS등급의 영웅인 이레네 아르티아가 지배하고 있는 골든 크로우였다. 실제로 호는 골든 크로우의 기사와 이레네 아르티아를 선택의 신전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
그때 서른 명의 소환자가 그녀에게 끌려갔다는 사실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되었을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었다.
디르시나 북쪽에 위치한 인간들의 도시 카틀라스는 인간 왕국의 순위로 지차면 7순위쯤 위치한 블루 스케일 왕국의 영토였다. 블루 스케일은 바다에 근접해 있는 해양 왕국이었고, 카틀라스 또한 지도로 살펴보면 바다 근처에 표기되어 있었다. 그건 항구 도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블루 스케일은 여덟 개의 인간 왕국 중 말석에 위치한 약소국이지만, 해군력만 따진다면 전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비록 C등급이지만 바다 속에서 가동할 수 있는 마장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상 마장기를 보유한 것은 전 대륙에서 블루 스케일이 유일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인간들의 왕국 중 약소국답게 육상 병력은 형편없었다. 그 말은 블루 스케일이 육로를 통해 디르시나를 공격할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에 블루 스케일을 지배하는 인물이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온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금상첨화였다.
“블루 스케일의 국왕이 누구였더라? 아아…….”
잠시 기억을 더듬던 호는 곧 한 여인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 세계에 온 지도 이 년이나 흘렀고 이 세계의 흐름에도 어느 정도 관여를 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특별히 무언가 변한 게 없다면 블루 스케일의 주인은 아직도 그녀일 게 틀림없었다.
“세이라 클리퍼드.”
그 이름을 읊조리는 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추억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추억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과거 자신이 플레이했던 가상현실 게임에서라면 또 모를까, 지금의 세이라 클리퍼드에게 예전처럼 손을 흔들면서 반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보나마나 극성 세이라 빠돌이들과도 같은 왕실 기사들에게 처형을 당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게임 내에서는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 중 한 명이었는데. 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당면한 일부터 좀 처리해야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이라 클리퍼드는 전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쨌든 이제는 수인을 상대하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해도 될 것 같았다.
“후…….”
하지만 생각해보면 결국 수인족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는 문제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저지르기는 했지만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게임이었다면 세이브를 해 놓고 진행 상황에 따라 로드를 반복하면 되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외줄타기처럼 한 번 발을 잘못 삐끗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