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리그너스 대륙전기 073화
“이거 흥미롭군. 그리고 어이가 없어.”
수인족의 대왕 아쉬토.
그 거대한 호랑이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엘프 그리고 인간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수인족의 국경 중 한 곳인 림드 산맥이 공격을 당했다. 그것도 단순히 마을 하나를 빼앗긴 게 아니라 림드 산맥에 위치한 다섯 개의 수인 마을이 불타오르더니 깃발이 바뀌었다.
대전을 가득 메운 다양한 동물들이 모두 고개를 푸욱 숙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선다는 것은 아쉬토의 이빨에 목을 내밀고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이미 희생자는 나왔다.
“커헉……!”
아쉬토의 노예 하나가 목과 몸이 분리되어 대전을 나뒹굴었다. 그는 2년 전 선택의 신전에서 끌려온 소환자였다.
‘머엉. 저들의 지식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건만…….’
그 모습을 보며 견인족의 장로 말라뮤트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여신 라헬이 다른 세계에서 소환했다는 소환자가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누구의 짓이지?”
“마족이라네. 군대를 지휘하는 인물은 윤호라는 녀석이지.”
그때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말했다. 원인족의 장로였다. 그녀의 표정은 아쉬토 만큼이나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림드 산맥이 대대로 원인들이 지배하던 영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섯 개의 마을을 마족에게 빼앗겼고, 이는 원인족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는 여러 종족의 연합체로 구성된 수인 왕국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치명적인 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군가는 원인족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더군다나 마을만 빼앗긴 게 아니라 원인족의 이름 있는 전사들도 몇 마리 목숨을 잃었다.
그때 아쉬토는 원인족 장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윤호? 마족에 그런 녀석이 있었던가?”
“아니, 소환자라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엘프들과 연합해서 공격을 했다고 하더군. 림드 산맥에서 원인족이 밀린 이유가 전부 엘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엘프 때문이 아니라 그냥 원인족들이 바보니까 그렇겠지.”
그때 아쉬토와 원인족 장로의 대화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쉬토와 비슷한 외형을 지닌 묘인족이었다. 그의 이름은 랙돌. 묘인족 최고의 전사이자, 장로를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뭐라고? 랙돌, 네 이놈!”
“시끄러워, 원숭이. 마족, 그것도 이 세계에 나타난 지 이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한테 영지를 다섯 개나 빼앗겨 놓고서, 아직까지도 더 할 말이 있는 모양이지?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영토로 내려갈 텐데 말이야?”
랙돌의 말에 각 종족의 장로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원인족의 장로를 바라보았다. 마왕 쉐르난비체라던가 고위급 마족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었다. 고작 소환자에게 영지 다섯 개를 빼앗긴 게 다들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랙돌이 옥좌 위에 앉아 오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쉬토를 향해 말했다.
“이미 윤호라는 녀석을 향해 리셴르나가 움직이고 있다. 처리는 우리에게 맡겨 줬으면 하는군.”
“리셴르나가?”
랙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전에 엄숙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아쉬토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셴르나. 묘인족을 대표하는 전사이자 수인족의 상급 대장이었다. 그녀는 드워프들의 맹렬한 공격에도 한 번도 자신의 영지를 빼앗긴 적이 없는, 바리안스 대지를 다스리고 있는 전사 중의 전사였다.
“그 윤호라는 녀석에게 리셴르나가 아끼는 부하가 당했던 모양이더군.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지금은 윤호라는 녀석을 꽤 따르는 모양인가 봐.”
“수인족이 마족을?”
“마족이 아니다. 놈은 소환자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쉬토의 눈은 랙돌에게만 향해 있었다.
묘인족. 방랑기질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해 수인 왕국이라는 집단에 대한 충성도는 높지 않았지만, 개개인의 능력만큼은 견인족 만큼이나 출중한 녀석들이었다.
“좋아. 리셴르나라면…….”
“자, 잠깐! 이 일은 우리 원인족의 일이다. 우리가 직접 처리하겠어!”
“이 일은 묘인족에게 맡겨보도록 하지. 리셴르나라면 적어도 영지를 다섯 개나 빼앗길 일은 없을 테니까.”
잽싸게 원인족 장로가 나섰지만, 이미 아쉬토의 명령은 떨어졌다. 곧 각 장로들의 찬성표가 던져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랙돌에게 명령을 받은 리셴르나는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안테로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안테로리부터 시작해, 엘프들의 영지까지 박살을 낸 후 림드 산맥으로 진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런 리셴르나의 의도는 안테로리에서부터 막히고야 말았다. 바로 호가 코르다로 출전하기 전 아스트리드 벨과 리아 캬베데에게 맡겼던 모종의 임무 때문이었다.
* * *
“아르테미스 상단이 도착했습니다.”
“아, 나가보도록 할게요.”
메이드의 말에 안테로리의 내정을 담당하고 있는 아스트리드 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 아스트리드 벨은 아르테미스 상단을 대표해 안테로리로 찾아오는 그녀가 껄끄러웠다. 마치 자신이 있던 세계의 대기업 총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틈이 보여도 치고 들어올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과거 자신도 벨기에 연합의 공주였던 몸이었다.
“다시 뵙네요. 정말 안테로리는 찾아올 때마다 영지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한창 커나가는 영지니까요.”
레드 벨벳의 말에 벨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안테로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해 나가는 영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과는 또다시 달라진 안테로리의 모습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혹은 눈치챘다 하더라도 모른 척하고 있거나.
최근 안테로리는 그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호가 이끄는 군대가 림드 산맥을 차지하면서 안테로리에서 생산되는 리스와 식량 그리고 많은 인구들이 림드 산맥으로 비밀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림드 산맥의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후우…….’
림드 산맥의 도시들은 모두 한결같이 발전도가 낮았다. 마치 예전의 커티삭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런 도시들의 발전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식량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돈들은 전부 안테로리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물건은 가져오셨나요?”
“물론이죠. 구하느라 굉장히 애썼답니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마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까닭에 구할 수 있었죠. 솔직히 좀 놀랐어요.”
“어째서요?”
“아르테미스 상단이 마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는 레드 벨벳의 눈빛은, 마치 어떻게 너희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느냐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후후.”
하지만 벨은 그런 레드 벨벳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해주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지시는 바로 윤호가 내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벨 또한 어떻게 호가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네, 그래요.”
“그럼 그렇다 치죠. 어디 물건을 볼까요?”
벨이 화제를 돌리자, 레드 벨벳은 눈웃음과 함께 이를 살짝 보이더니 밖을 향해 박수를 두 번 쳤다.
곧 건장한 남성 네 명의 두 개의 상자를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상자가 놓이자 두 여인의 시선이 상자 쪽으로 향했다.
레드 벨벳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남성이 가져온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수많은 양피지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양피지를 보며 아스트리드 벨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마법 스크롤이라는 아이템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는 마법 스크롤이 어떤 것인지, 또한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호라던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영웅들이라면 소스라치게 놀랐을 테지만.
“아스트리드 벨 님께서 주문하신 3등급 화염계 마법인 파이어 볼 스크롤 백오십 장입니다. 장당 1만 리스씩. 총 150만 리스죠. 앞으로 있을 수인족과의 전쟁에 대비하시는 모양이죠?”
“아마도요?”
말끝을 살짝 흐리는 아스트리드 벨의 모습에 레드 벨벳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아마 자신의 추측은 95% 이상 맞을 게 틀림없었다. 상단은 그 어느 단체보다 정보가 중요한 단체였다. 그리고 아르테미스 상단으로 오가는 정보 중에는 수인족, 특히 묘인족이 안테로리를 공격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너무 무모했어.’
안테로리의 소환자들은 수인족의 성질을 긁어도 너무 심하게, 그것도 제대로 긁었다. 안테로리를 점령한 것도 모자라 엘프를 도와 림드 산맥에 있는 수인족의 마을 모두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인 왕국 입장에서는 다섯 개의 마을과 함께 림드 산맥이라는 영토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이는 수인족의 체면이 깎아내리다 못해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수인족의 B, C급 마장기와 함께 사막의 꾀주머니이자 수인족의 상급 대장인 리셴르나가 직접 움직인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리셴르나의 군대는 소환자들이 이제까지 상대했던 허접한 수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드워프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룬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좋은 고객이었는데.’
레드 벨벳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안테로리의 가젯 의복은 그동안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이다.
그녀는 소환자들이 리셴르나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이미 확정짓고 있었다. 그 만큼 전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그건 볼 붸르니체스와 같은 상위 마족이 나선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만약 남쪽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리셴르나의 군대를 상위 마족이 막아준다고 해도, 북쪽 림드 산맥을 통해 공세를 갖추는 원인들을 과연 이들이 막아낼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레드 벨벳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아스트리드 벨은 백오십만 리스라는 돈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후. 비싸네요.”
“그만큼 스크롤은 구하기 힘든 물품이에요.”
레드 벨벳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손에 깍지를 끼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상당한 돈이지만 안테로리에는 그 정도의 큰돈을 지불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벨은 백오십만 리스라는 물건대금 전부를 레드 벨벳의 손에 쥐어주고픈 마음은 단 한 톨도 없었다. 가뜩이나 림드 산맥 때문에 들어갈 돈이 엄청나게 늘어난 판국이었다. 그리고 거래의 묘미는 바로 밀고 당기는 흥정에 있었다.
곧 두 여인의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아스트리드 벨은 레드 벨벳을 상대로 백이십만 리스와 가젯 의복 이천 상자로 거래를 마무리했다.
“이게 그거야?”
“네. 그래요.”
병영에서 엘븐 나이트를 양성하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리아 캬베데가 아스트리드 벨을 향해 물었다. 처음 벨은 리아 캬베데가 자신에게 서슴없이 반말을 쓰는 것이 조금 언짢았다.
키도 작달만한 귀여운 고양이 주제에, 인간에게 반말이라니?
게다가 고양이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게 벨이 지니고 있던 상식이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게 다반사였지만.
어쨌든 최근 들어서 고양이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로 인해 주인이 집사로 격하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벨은 동물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리아 캬베데는 호를 향해 가끔씩 호 님, 혹은 주인님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와 사드나인의 나이가 자신의 증조할머니뻘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생명체들은 대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전부 기본적으로 백 살은 훌쩍 뛰어넘은 존재들이 많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