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리그너스 대륙전기 072화
“생각을 하는 것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 대체 전에 무슨 일을 했던 거지? 나처럼 군사학교를 나왔나?”
하지만 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게 가끔씩 느껴졌다. 그렇기에 한시진도 자세히 묻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한시진은 호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몸을 돌려 외치기 시작했다.
“수인들이 퇴각한다! 모두들 추격할 준비를 하도록!”
저들이 온전히 퇴각할 수 있게끔 지켜만 본다는 건 멍청한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한시진뿐만이 아니었다.
코르다 성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곧 퇴각하려는 수인 부대를 엘븐 나이트들이 따라잡으며 전투가 벌어졌고, 엘 샤난이 이끄는 코르다의 엘프들도 전장에 합류하며 전투는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밤 어느 한쪽은 전멸이 돼야 전투가 끝이 날 것 기세였다. 그리고 그렇게 산발적으로 시작된 전투는 곧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악!”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롭게 고함을 내지른 고르엘이 자신의 발끝에 체중을 실으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무기인 우끼끼의 바나나를 한 손으로 풀스윙을 하듯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곧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투구를 쓴 엘븐 나이트 하나가 머리가 곤죽이 되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고르엘은 왼손을 쭈욱 뻗어 엘븐 나이트 하나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강하게 힘을 주었다.
“으아아아아!”
고통스러워하는 엘븐 나이트의 비명과 함께 으드득 뼈가 부서지는 기괴한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주위에는 여전히 수많은 엘븐 나이트들이 고르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엘븐 나이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자신의 친구들을 죽인 적장에 대한 복수심만이 눈에 가득 담겨 있었다.
고르엘을 위협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어 버려! 인간에게 도전하는 이 영장류 새끼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목소리에 고르엘은 재빠르게 자신의 무기 우끼끼의 바나나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의 끝부분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짤 주머니에서 크림이 나오듯 고르엘이 든 무기의 끝부분에서 노란색 액체가 물총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마법 약품이었다.
“조심하세요, 대장님!”
한시진을 향해 여러 명의 엘븐 나이트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시진은 마법 액체가 자신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며 액체를 피했다. 고르엘의 저런 공격 방식을 몰랐다면 당해겠지만, 한시진은 이미 저 고릴라 같은 녀석이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쓴다는 것을 전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미 얼마 전 교전에서 한 번 당해 위험한 상황에 빠진 적도 있었다.
“내가 두 번씩이나 당할 만큼 멍청해 보였어?!”
촤아악!
한시진의 검이 무기를 들고 있는 고르엘의 팔 부분을 강하게 찌르며 들어갔다. 고르엘은 날카로운 날붙이조차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고 근육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시진은 이 세계의 힘 중 하나인 마나를 다룰 수 있었다.
그 순간, 마나로 인해 절삭력이 급격하게 상승한 한시진의 검이 어렵지 않게 고르엘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크와아아악!”
검이 파고드는 고통에 고르엘이 비명을 질렀다. 하마터면 우끼끼의 바나나를 놓칠 뻔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무기를 놓쳤다면? 이 전투는 그걸로 끝이었다. 상대는 자신이 무기를 놓친 것을 그냥 지켜보고 있을 멍청이가 아니었다.
고르엘이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엘븐 나이트들의 공격에 죽어 나자빠지고 있었다. 랭크의 차이 때문인지, F랭크 병종인 다람쥐 병사와 원숭이 투석병들은 엘븐 나이트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했다. 그나마 코르기들이 분전하고는 있었지만, 힘에 부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퍼어억!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엘븐 나이트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던 코르기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코르다의 성에서 나온 엘프 궁수였다. 그들은 채 서른도 되지 않는 숫자였지만, 원거리 병종의 존재 유무는 전투에서 상당한 압박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엘프 궁수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화살을 날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정령 궁수만큼이나 궁술 실력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도…… 도망가야 돼.’
고르엘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얼굴 가득 풍기고 있던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목숨을 잃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방에는 엘프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 중 엘프족의 병사는 거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안테로리라는 마족의 영지에 소속된 엘프들이었다.
고르엘은 그 점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안테로리만 아니었다면, 마족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코르다의 성에서 맛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어여쁜 부인과 함께 말이다.
“내가 마족들을 너무 높게 평가했군. 마족이 엘프를 도와? 쉐르난비체가 알면 놀라 나자빠지겠군.”
“쉐르난비체가 나자빠지든 말든. 이제는 그가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걸? 그리고 마족?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마족이 아니라 소환자야.”
고르엘의 말에 한시진은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런 그녀의 눈에 멀리 푸른색 갑주를 입은 한 엘프의 모습이 잡혔다.
엘 샤난. 코르다를 지키는 엘프의 지휘관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르엘을 향해 자신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
바람이 화살촉에 소용돌이치며 모이는 게 한시진의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의 생명체들은 전부 저런 위력을 지닌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단순히 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그 화살에 어마어마한 위력이 담겨 있을 거라는 것은 그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심 엄청나게 놀라긴 했지만, 한시진은 혹시 고르엘이 알아차릴까봐 눈썹을 찡그리며 재빠르게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퇴각을 하는 걸 보니, 킬리드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은 모양이지?”
“그……그걸 어떻게? 설마?!”
“뭐야? 설마 모르고 있던 거야? 이거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고릴라의 모습에 한시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직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고릴라의 아이큐가 80정도라고 하던데, 이 세계의 고릴라는 그 정도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으면 이 모든 게 자신들이 벌인 일이라는 걸 눈치채고도 남았어야 했다.
“……병신. 지금 킬리드를 공격할 수 있는 종족이 마족밖에 더 있어?”
“네…… 네놈들!”
“왜? 우리 애들이 여기에만 있을 줄 알았어? 아직 순진하네. 너 몇 살이니?”
한시진이 고르엘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물었다.
“서른여덟 살이다!”
“……아저씨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순진하게 대답해 주지는 않겠지 라는 그녀의 예상은 삽시간에 깨져 버렸다. 일부러 저렇게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쿵쿵쿵!
그때 눈동자를 빨갛게 물들인 고르엘이 두 발로 일어서더니 자신의 가슴을 쿵쿵 치기 시작했다. 그건 상대에게 위협을 주는 고릴라의 행동과 똑같았다.
고르엘의 커다란 손이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를 내자, 원인족들 또한 소리를 지르며 맹렬하게 엘븐 나이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렇게 가슴을 두드리는 게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효과인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시진이 생각을 할 때였다.
“크리솔라이트의 화살!”
낭랑한 외침과 함께 한 줄기의 빛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엘 샤난의 화살이었다. 순식간에 화살은 레이저 광선처럼 일직선으로 고르엘의 가슴을 꿰뚫었다. 고르엘이 반응조차 보이지 못할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그 순간 고르엘이 우끼끼의 바나나를 놓치고, 균형이 무너져 쓰러지는 모습을 한시진은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우…… 우어……?’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 그리고 땅에 떨어진 화살의 모습에 고르엘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엘프의 짓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나가 엘프에게 오늘의 치욕을, 그리고 이날의 복수를 해야만 했다.
고르엘은 어떻게든 손을 뻗어 자신이 떨어뜨린 우끼끼의 바나나를 잡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손가락이 가까스로 우끼끼의 바나나에 닿을 무렵, 발 하나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무기를 멀리 걷어차 버렸다.
한시진이었다.
“크…….”
고르엘의 눈이 절망감에 물들었다.
한시진은 양손으로 무기를 들고는 고르엘을 향해 내리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르엘의 손이 한시진의 발에 닿았지만, 그녀의 발목을 으스러뜨릴 만한 힘이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뻥 뚫린 가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으, 으어……. 살려…….”
피할 수도,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었다. 킬리드의 대장이자 엘프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 생각으로 출전했던 고르엘은 그렇게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검 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츄아악!
그 순간 한시진의 검이 고르엘의 목을 깊이 가르며 살과 근육을 베어내었다. 곧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고르엘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한시진이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적들의 대장이 죽었다!”
“고르엘이 죽었다! 우리의 승리다!”
“이겼다! 고르엘이 죽었다!”
“우끼! 대장님의 복수를!”
대장의 죽음에 몇몇의 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한시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시진의 곁으로 가기도 전에 원인 병사들은 엘븐 나이트들이 휘두르는 검에 온몸이 조각났고,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곧 전장 정리가 시작되었고,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 사이로 엘 샤난이 한시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세계수의 은혜가 당신 앞에 있기를.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코르다의 센티널, 엘 샤난이라고 합니다.”
“한시진이라고 해요. 이들의 지휘관이죠.”
“아. 혹시 윤호 님과 엘 아르윈의……?”
엘 샤난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자신이 아는 안테로리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샤난은 코르다의 성벽에서 한시진이 얼마나 용감하게 수인들과 싸움을 벌였는지 알고 있었다.
“어……. 음. 동료예요.”
한시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마땅히 서로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 부하, 친구, 애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랬다.
하지만 그런 한시진을 대답을 엘 샤난은 대단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
엘 샤난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료. 마족들은 결코 엘프를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엘프는 노예에 불과했다.
하지만 소환자이기 때문일까? 이들은 달랐다. 안테로리의 마족은 단지 마족의 깃발만 들고 있을 뿐, 자신들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그…… 그렇군요! 동료!”
“……?”
눈동자에 감동했다는 메시지를 가득 담고 있는 엘 샤난의 모습에, 한시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기에 이 엘프가 고마워하는지 속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두 여인의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장님! 윤호 님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
전령으로부터 호의 편지를 받은 한시진은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림드 산맥에 위치한 킬리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호가 킬리드를 점령하였고, 그 이후 이웃 영지를 향해 진격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엘 샤난는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함께 수인족을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코르다의 안정이 먼저였다. 고르엘과의 전쟁으로 인해 코르다는 상상 이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