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리그너스 대륙전기 070화
“명령만 내리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엘븐 나이트.
D랭크 병종인 그들은 단단한 방어력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보병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원거리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주문도 사용할 수 있었다.
랭크가 낮은 병종인 탓에 엘븐 나이트들이 사용하는 방어 주문의 효과는 상당히 미흡한 편이었지만, 수인족의 F랭크 병종인 원숭이 투석병의 공격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 팔백의 엘픈 나이트라면 어느 정도 희생은 있겠지만, 고르엘이 이끄는 병사들과 충분히 한 판 붙어볼 만했다.
“아뇨. 일단은 이렇게 지켜볼 참이에요. 저 수인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상황에 맞춰서 우리도 움직일 생각입니다.”
“네? 어째서……? 지금이라도 당장 코르다의 친구들과 연합해서…….”
“아니죠. 물론, 우리가 코르다의 엘프들을 도와주기 위해 출전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엘프가 우리의 편인 것은 아니랍니다. 우리는 안테로리의 병사들이지, 코르다의 병사가 아니에요.”
“…….”
말을 꺼낸 엘븐 나이트가 입을 다물었다. 한시진의 말대로 자신들은 안테로리의 윤호 영주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이었다.
“뭐, 시간을 끌면 끌수록 엘프들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있기야 하겠지만…….”
“네?”
그러나 뒤를 이은 한시진의 말에 엘븐 나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지휘관이 말한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시진은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림드 산맥의 킬리드가 코르다와 일주일 정도의 거리라고 했지?’
이곳에 주둔지를 만들기 전 머물렀던 엘프들의 마을에서 얻은 정보였다. 그렇게 인시네라 호수와 코르다 성 그리고 수인족들의 주둔지를 내려다보던 한시진은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뒤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엘븐 나이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수인족의 대장, 그러니까 그 커다란 고릴라가 들고 있는 커다란 바나나는 뭐죠?”
“아, 우끼끼의 바나나! 마법 아이템입니다. 강력한 무기죠.”
“하?”
한시진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이 세계는 알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쯤이면 안테로리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했을 터였다.
“아쉽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만약 호가 단순히 엘프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이 전장에서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
한시진의 시선이 림드 산맥이 있는 북동쪽으로 향했다.
* * *
“출전한다!”
코르다 성으로 향하는 호의 본대는 엘븐 나이트 천삼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코르다 영지에 있는 엘프들의 마을에 도착한 호는 곧 추가 병력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안테로리로 보냈다. 그것은 코르다 성의 전투의 양상이 서로의 치열한 눈치 싸움으로 고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엘프들의 보고 때문이었다.
“사흘 전, 엘븐 나이트들과 수인들이 크게 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전투에서 무려 100마리 이상의 수인들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한시진 대장이 쉰 마리나 되는 수인을 베었다고 합니다. 코르다의 성에 있던 서른의 엘프 궁수들이 아군을 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르엘과 한시진 대장이 맞붙었지만, 무승부로 끝이 났습니다.”
숲에서는 엘프 만큼 뛰어난 전령도 없었다.
그렇게 코르다 성에서 펼쳐지는 전투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호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내가 코르다 성으로 가면 단숨에 수인들을 전멸시킬 수 있겠지?”
현재 고르엘이 이끄는 수인 병사는 약 오백여 마리로 추정되고 있었다. 자신이 이끌고 있는 천삼백의 엘븐 나이트라면 어렵지 않게 코르다를 공격해 온 수인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병종 랭크에서도 그리고 머릿수에서도 크게 앞서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인들을 지휘하는 영웅이 S등급 이상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유한 녀석인 것도 아니었다.
고르엘. 림드 산맥에 위치한 도시 킬리드의 영주인 그는 다행이 C등급 영웅에 불과했다.
“내가 없어도 한시진이라면 충분히 고르엘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한시진은 정말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게다가 검술실력도 뛰어났다. 그녀라면 고르엘쯤은 가뿐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라면 역시나 그녀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수인이라는 이종족과의 직접적인 전투였지만, 호는 한시진의 실력이라면 수인족과의 전투 또한 무리 없이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호의 눈이 자신의 막사 안에 있는 지도로 향했다. 안테로리가 커티삭과 아트리그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코르다 또한 아멘드마와 킬리드 그리고 안테로리로 대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호의 시선이 림드 산맥에 위치한 킬리드로 향했다.
‘소문에 의하면 고르엘은 코르다를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마을에 있는 전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다고 했어.’
그렇다면 현재 킬리드는 아무런 방어 병력이 없는 무주공산일 게 분명했다. 이게 호가 안테로리로 지원 병력, 정확히 말하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병인 정예 실리스들을 추가 병력을 요청한 이유였다.
안테로리에서 킬리드로 공세를 취하려면 어쩔 수 없이 코르다의 영역을 지나야만 했다. 이는 코르다를 지배하고 있는 종족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특수 상황에서는 코르다의 길을 빌려 바로 킬리드로 향할 수 있었다.
“엘븐 나이트 사백을 따로 편성해 한시진에게 보낸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서 안테로리의 병사들을 기다린다.”
“알겠습니다.”
“숲의 향기가 호 님에게 있기를.”
호의 명령에 따라 사백의 엘븐 나이트가 호에게 인사를 하고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뒤, 대규모의 군대가 호가 머무르는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바로 이천에 달하는 정예 실리스 부대였다.
“출전한다! 목표는 림드 산맥의 킬리드다!”
호가 들고 있는 검으로 지도의 한쪽을 찌르며 외치자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갑작스러운 킬리드 공격 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령은 떨어졌고, 엘프와 다크엘프로 구성된 병력들은 누가 숲 속에서 빠른지를 경쟁하기라도 하듯 엄청난 속도로 림드 산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아름다운 낙조가 주변을 불긋하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불긋한 것은 낙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방을 가득 에워싼 조그마한 인영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들이 붉은색을 더욱 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방을 가득 메운 시체들.
그들은 모두 땅딸막한 몸체와 두터운 팔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드워프들이었다. 그런 드워프들의 시체에 수인들이 재차 무기를 찔러대며 확인 사살을 하고 있었다.
“땅속의 난장이들도 이제는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겁니다. 각하.”
“그렇겠지. 이렇게까지 당했는데도 계속해서 덤벼들 생각을 하면 머리에 든 게 없다는 걸 계속해서 증명할 뿐이지.”
검은색과 녹색이 섞인 제복을 입은 묘인족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 앞에는 각하라는 호칭으로 불린 왼쪽 눈에 검은색 안대를 쓴 묘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한쪽 눈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셴르나.
수인 왕국에서 몇 되지 않는 상급 대장이라는 호칭을 받은 여인이자, 바리안스의 대지라 불리는 영토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묘인이었다.
“쿠퍼쏘우의 생사는?”
“드…… 드워프 호위대 때문에 목숨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맹렬하게 저항을 하는 터라.”
“슬픈 소식이군. 난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리셴르나의 얼굴에 아쉬움이 감돌았다.
쿠퍼쏘우. 그는 바리안스의 대지를 노렸던 멍청한 드워프들의 수장이었다. 마족과 수인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수인과 드워프들 역시 해묵은 앙금을 가지고 있었다. 쿠퍼쏘우는 드워프의 한 갈래를 이끄는 대장답게 바리안스의 대지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인해 바리안스의 대지를 차지하려고 했던 드워프들은 무려 10만이 넘는 수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그들이 자랑하는 마장기도 열 대가 넘게 파괴되었다. 그 만큼의 피해를 입었으니 다시 전쟁터에서 마주칠 일은 조만간 없을 터였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각하.”
“그래. 그렇지.”
부하의 보고에 리셴르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죽을죄를 지었다? 그렇다면 죽어야 했다. 그게 리셴르나의 생각이었다.
곧 리셴르나가 손을 들어 올리자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 형태를 한 수인족의 C급 마장기 카니앗산이 한쪽 다리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그리고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리자 온몸이 납작하게 변한 시체가 땅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리셴르나는 섬뜩하고도 징그러운 그 모습을 잠시 눈동자에 담더니 곧 몸을 돌렸다.
“이제 귀찮은 놈들은 처리했고.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마족의 동태는?”
리셴르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까 죽었던 남성 묘인과 똑같은 제복을 입은 여성 묘인이 재빠르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안테로리에서는 계속해서 병사를 모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랭크가 전부 높지 않은 병사들입니다. 그런데 특이점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특이점?”
“네. 최근 엘프가 끼어들었다고 합니다.”
“엘프가? 어디에? 안테로리에?”
“네, 그렇습니다.”
리셴르나의 눈이 반짝였다.
여신 라헬이 보낸 소환자라는 것들은 참으로 흥미가 가는 존재였다. 특히 안테로리를 지배하고 있는 윤호라는 소환자는 더더욱 그랬다. 마족임에도 불구하고 수인족을 융화시킨 마을을 만들어 내더니, 이제는 거기에 엘프까지 융화시킨 모양이었다.
“최근 엘프와 다크엘프가 함께 마을 경비를 하는 모습을 봤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큿! 꺄하하하하!!”
천족과 마족이 함께 손을 잡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부하의 보고에 리셴르나는 배꼽에 손을 얹고는 웃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하더니, 정말 머릿속에 상식이라곤 조금도 없는 황당한 녀석이었다.
마족과 수인족 그리고 엘프를 융화시켜 군대를 만들었다고?
절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마족의 무식한 송아지인 볼 붸르니체스가 어째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그에게 마장기를 보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안테로리의 움직임은? 엘프와 다크엘프가 부딪쳤다면 분명 문제가 벌어졌을 텐데?”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히려?”
“서로의 공통적인 영역을 만들어 친근하게 지내는 모양입니다.”
부사의 보고에 리셴르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흐으응! 냐앙…….”
소환자 윤호.
얼굴을 알 수 없는 그 인물에 대해 흥미가 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리셴르나는 곧 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뒤에 있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이스파한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트리그를 지휘하는 녀석이 누구지?”
“견인족, 르크락입니다.”
“그래. 르크락에게 안테로리를 한 번 건드려보라고 말하도록. 마장기를 동원해도 상관없다. 그 윤호라는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한 번 보고 싶군.”
“마장기를 동원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부하의 말에 리셴르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냐아아앙. 마족의 소환자가 얼마나 재미있는 녀석인지 정말로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쪽 소환자들은 영 변변치 않단 말이지.”
말을 마친 리셴르나는 저 멀리 무기를 들고 수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인간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았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두 남녀는 눈에 생기를 잃은 체 시체처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인족의 대장 아쉬토가 잘 키워보라면서 내준 다섯의 소환자 중 이제 남은 것은 저 둘뿐이었다. 나름 신경을 써서 키우긴 했는데, 전장에 몇 번 보냈더니 벌써 세 명이나 죽어 버렸다. 나름 아끼며 전쟁터에 보냈는데도 말이다.
“저 녀석들과는 달리 윤호라는 녀석은 가만히 두어도 잘 성장할 놈이겠지? 마족 녀석들이 뽑기 운은 좋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리셴르나는 숨겨진 자신의 발톱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가볍게 자신의 발톱을 휘둘렀다.
“커……억?!”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방금 전까지 옆에서 보고를 하고 있던 여성 묘인의 목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리셴르나가 한 번 손을 휘두르자 찌익 하며 살갗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묘인의 목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쓰러진 여성 묘인의 눈에서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묘인을 향해 리셴르나가 말했다.
“내가 똑같은 명령을 내리게 하지 말았어야지. 치워.”
리셴르나의 명령에 수인들이 황급히 움직이며 재빠르게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리셴르나는 자신의 전용 마장기 ‘퀸 캣츠’에 올라탔다.
“윤호라…….”
수인들에게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이름의 소환자. 그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안테로리의 일이었다. 본래 안테로리는 수인 왕국의 영역. 반드시 다시 수인이 찾아야 할 땅이었다.
바리안스의 지배자, 사막의 꾀주머니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 리셴르나. 그녀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스킬라드라는 별칭이었다.
스킬라드는 바리안스의 대지 내 사막에 살고 있는 뱀의 이름이었는데, 한 번 자신을 건드린 적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물어버린다는 습성을 가진 뱀이었다.
끼기기긱!
우렁찬 소리와 함께 수인족의 캣츠급 마장기가 몸을 일으켰고, 그 뒤를 따라 여러 대의 마장기와 수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