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리그너스 대륙전기 069화
“오빠는 이런 점까지 미리 예상하고 엘프들로만 군대를 편성한 건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엘프 병사들을 보며 한시진이 중얼거렸다. 안테로리에는 아이스 스파토이라는, 여러 측면에서 굉장한 장점을 보이는 마족의 C랭크 보병이 사천 이상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 보병이 있는데도 호는 아이스 스파토이를 뒤로 한 채 엘프 보병들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최근에야 엘프의 D랭크 보병인 엘븐 나이트들의 연구를 끝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엘프 보병 연구를 진행하며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현재 안테로리에서 양성할 수 있는 엘븐 나이트들은 아직 D랭크 병종에 불과했다. 아이스 스파토이와 비교하면 랭크가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술과 전략이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부대를 지휘하는 병종의 랭크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엘븐 나이트가 아이스 스파토이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빠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었나 보네. 영주가 되면 보는 눈도 달라지나?”
한시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만약 엘븐 나이트가 아닌 아이스 스파토이나 정예 실리스들을 이끌고 이 엘프 마을에 도착했다면, 지금과 같은 엘프들의 호의는커녕 오히려 공격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코르다를 공격하는 병력이 아닌 지원 병력이라는 사실 또한 그들이 믿을 리 없었다.
“코르다 성에는 아직 이백의 엘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 정도의 수인들이 두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있다고, 마을의 엘프들이 전해왔습니다.”
“아직 버티고 있는 건가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다행히 인시네라 호수 때문에 수인족이 제대로 된 공성전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령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병력의 차이가 극심합니다.”
“흐응…….”
한 엘븐 나이트의 보고를 들으며 한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마을의 엘프가 건네준 코르다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로 향했다.
수인과 엘프의 전력을 생각해보면 코르다 성은 일찌감치 수인족의 공격에 무너졌어야 했다. 하지만 성을 둘러싸고 있는 인시네라 호수가 코르다를 지켜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지도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한시진의 눈에 코르다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언덕이 들어왔다.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았다.
“이 언덕은 뭐죠?”
“루시의 언덕입니다. 코르다 성에서 고작 30분 거리에 위치한 언덕이지요. 그 언덕 정상에서 손을 흔들면 코르다 성벽 위에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거긴 수인족이 차지하고 있겠군요.”
한시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닙니다. 수인족의 군대는 이곳에 주둔지를 펼쳤습니다.”
그런 대장의 말에 엘븐 나이트가 고개를 흔들더니 호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코르다 성과 밖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의 끝부분을 가리켰다. 수인족은 성 안으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진영을 구성한 것 같았다.
“이런 좋은 지형이 있는데도 그냥 두었다고요? 여기에 엘프들이 주둔하면 자신들의 뒤통수가 따끔할 텐데요?”
“수적으로 자신들이 유리한 것을 아는데다가 지원군이 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아멘드마에서는 아직 지원군이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그 말을 듣자 한시진은 씨익 웃었다. 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그녀는 고지대가 전투에서 얼마나 유리한 이점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그 어떤 상황도 판단해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안테로리에서 코르다로 지원이 올 수도 있다는 가정까지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수인들은 너무 자신들의 전력을 믿었고, 방심하고 있었다.
“루시의 언덕? 이 고지대를 우리가 차지합시다. 엘프 대신 우리가 먼저 수인족의 뒤통수를 향해 무기를 꺼내들 겁니다.”
“밤마다 서늘해서 잠도 잘 오지 않겠군요.”
“물론이죠.”
한시진의 명령이 떨어졌고, 곧바로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시진이 이끄는 부대가 루시의 언덕에 도착했을 때 쯤, 코르다 성 주위는 짙은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인시네라 호수 때문이었다.
제대로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때문에 코르다 성의 병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는 수인족도 공격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는 엘프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이 수인족의 공격에 희생되었고, 요새가 점령당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아멘드마의 지원군이라는 희망 하나만 믿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이제와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인시네라 호수를 건널 수 있는 배가 없기 때문이었다. 몇몇 나룻배들이 있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네다섯 명의 엘프만 태울 수 있는 크기였다.
“……후우.”
엘 샤난은 코르다의 성벽 위에서 밖과 코르다 성을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다리를 바라보았다. 마차 세 대 정도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는 그 다리는 수인들이 코르다 성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로였다.
다리의 폭은 좁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군대가 공성전을 펼치기에는 넓은 공간도 아니었다. 까닥하다가 다리에서 떨어지게 되면 깊은 인시네라 호수에 익사할 게 뻔했다. 이런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해 엘 샤난은 지금껏 수인족 병사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될수록 용맹했던 자신의 친구들은 하나둘 세계수의 곁으로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
엘 샤난은 아멘드마의 영주이자 하이 센터널인 자신의 어머니 엘 라이린을 떠올렸다. 지금쯤 그녀는 코르다로 보내기 위한 지원군을 편성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멀리서 수인들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짙은 안개를 타고 샤난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 * *
“우크. 우크크크.”
수인족의 대장 고르엘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늘의 안개가 코르다 성에 있는 엘프들의 마지막 발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전투로 인해 이제 코르다 성을 지키는 엘프들은 고작 백여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에 반해 수인족들은 그 배가 넘는 수를 전투에 투입시킬 수 있었다. 엘프들의 화살이 까다롭긴 했지만,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원숭이 투석병들의 돌팔매질도 매서웠다.
“크힛! 크히힛!”
코르다 성에서 엘프들을 지휘하는 여인, 엘 샤난을 떠올린 고르엘은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이 가라앉질 않고 있었다.
짙은 안개로 인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고르엘은 딱히 두렵지 않았다. 엘프들의 지원 병력이 아멘드마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한데다가, 코르다 성의 엘프들이 이 안개를 틈 타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시네라 호수는 코르다 성을 지켜주는 방벽이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망을 칠 수도 없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힌 다음 날, 수인족은 코르다 성을 뜻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바로 루시의 언덕 정상에 급조된 엘프들의 요새가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안테로리에서 출전한 한시진의 선봉대였다.
“이…… 이럴 수가!”
코르다 성 바로 앞에 있는 루시의 언덕에 주둔지를 만든 엘프 병사들을 보며 엘 샤난은 탄성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코르다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과 주민들 역시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록 마족인 안테로리의 깃발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안테로리의 병사들은 모두 엘프로 구성되어 있었다.
‘엘 아르윈의 말이 맞았어!’
코르다를 찾았던 안테로리의 친구를 떠올리는 샤난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마족에 소속되어 있지만, 소환자인 안테로리의 영주는 다른 마족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들의 친구였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이끄는 코르다에서도 양성이 불가능한 D랭크 병종 엘븐 나이트로 군대를 꾸릴 이유가 없었다. 아니,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이 엘프로 구성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읏!”
그 순간 지난 날 자신의 실수가 떠오르자, 엘 샤난은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때 자신의 성급한 명령이 아니었다면, 이백이나 되는 친구들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미안합니다. 친구들…….”
눈을 질끈 감은 샤난은 지금은 세계수의 품에 있을 자신들을 친구를 떠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어쨌든 엘 아르윈과 안테로리는 자신들의 위험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루시의 언덕 위에 있는 엘프들 때문인지 수인족의 공세도 없었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무기를 정비하고, 수인족의 공격에 방어할 준비를 갖춘다! 우리에겐 친구들이 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 믿음에 보답할 차례였다.
그런 그녀의 잠작대로 수인들은 갑자기 생겨난 엘프의 요새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마족? 마족이 갑자기 왜?”
수인족 군대를 이끄는 대장 고르엘이 엘프 요새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곧 있으면 코르다를 점령할 수 있는데, 난데없이 마족이 등장했다. 그것도 적은 수가 아니었다. 얼핏 봐도 자신이 보유한 병력과 엇비슷한 숫자였다. 상당한 크기의 방패를 들고 겹겹이 진지를 방어하는 그 마족 병사들의 모습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저들이 엘프의 병사들인 줄 알고 식겁하기까지 했다. 하마터면 자신이 들고 있던 우끼끼의 바나나를 던져 버릴 뻔했다. 언덕 위에 나타난 병사들이 전부 엘프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족과 안테로리의 깃발을 들고 있었고, 사실을 정확히 파악한 고르엘은 다행이라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저들이 갑자기 코르다에 나타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었다.
“우끼, 우끼끼. 대장님. 그러면 오늘은…….”
“크흐…….”
고르엘의 시선이 언덕 위에 진을 친 병사들에게 향했다. 안테로리의 깃발을 들고 있는 언덕 위 병력들은 움직일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의 병사들이 자신들이 코르다를 공략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것 같지는 않았다.
마족과 수인은 그다지 사이가 좋은 종족이 아니었다. 만약 엘프가 끼어 있지 않았다면 두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리고 이처럼 세 종족이 대치하는 상황에서라면 먼저 움직이는 쪽이 공격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쉰다.”
고르엘이 거친 콧김을 내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안개가 끼었을 때 무리해서라도 코르다 성을 차지했어야 했다는 후회감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코르다를 공략하는 와중 마족들이 공격을 해온다면 자신들은 그 사이에 끼어 인시네라 호수에 수장될 게 틀림없었다.
마족. 정말로 더럽고 치사한 종족다웠다.
“수인족들이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오늘은 전투 없이 편안하게 지나가겠네요. 강행군으로 인해 피로가 쌓인 것 같은데, 다행이네요.”
주둔지에서 나오지 않는 수인들의 모습을 언던 위에서 내려다보며 한시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마도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할 게 분명했다. 코르다를 공략하자니 뒤통수가 간지러울 테고, 그렇다고 공략하지 않자니 시간이 흐르면 아멘드마에서 지원군이 달려올 터였다.
“세계수의 은혜가 당신 앞에 있기를. 대장님, 우리는 계속 이렇게 진지를 방어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한 남성 엘븐 나이트가 다가와 한시진에게 물었다.
한시진이 이끌고 있는 엘븐 나이트 부대는 안개를 틈 타 루시의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언덕 위에서는 자신들의 친구들이 있는 코르다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코르다 성을 바라보는 엘븐 나이트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코르다 성 아래에는 죽임을 당한 수인과 엘프들이 뒤엉켜 있었고, 인시네라 호수에도 둥둥 떠다니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