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리그너스 대륙전기 068화
“샤난. 동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엘 샤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한 모양인지, 엘프가 샤난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그러자 엘 샤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위에 있는 엘프들을 코르다로 불러 모으도록 하세요. 농성 준비를 하겠습니다. 또한 아멘드마에도 지원군을 요청하도록 하세요.”
엘 샤난은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채 말을 이었다. 천오백이 넘는 수인족의 공격. 힘겨운 전투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엘 샤난의 명령을 받은 엘프는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시각, 안테로리에서는 한창 병종의 랭크 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와……. 대단해요.”
한시진이 외치듯 말했다. 색색의 밝은 빛이 마법의 리본처럼 정예 엘프 보병을 하나씩 감싸고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는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는 엘븐 나이트가 어김없이 자리를 잡았다.
“멋지지?”
호의 말에 마치 마법과도 같은 장면에 시선을 빼앗긴 한시진이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돈이 꽤 드네.’
정예 엘프 보병을 엘븐 나이트로 랭크 업을 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은 1인당 육백 리스였다. F랭크 병종인 오크 전사 한 부대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돈이 오백 리스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었다. 단순히 병사 하나의 랭크 업에 필요한 돈이 E랭크 부대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돈과 맞먹고 있었다.
‘이래서 발전도가 높지 않은 영지는 고위 병종의 양성은커녕 보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오지…….’
만약 게임이었다면 밸런스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도 랭크가 높아질수록 양성 비용과 랭크 업 비용 그리고 유지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차이가 났다.
어쨌든 안테로리에 주둔하고 있는 정예 엘프 보병의 수가 이천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려 백만 리스가 넘는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모아둔 돈을 포함해 최근 가젯 의복의 판매대금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기에, 호는 영지가 보유한 대부분의 자금을 사용해 정예 엘프 보병의 랭크 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돈을 물 쓰듯 펑펑 쓰며 영지 건물 공사를 계속 진행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굳이 아이스 스파토이가 있는데 엘븐 나이트를 양성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종족만 다를 뿐 같은 보병이잖아요.”
그때 아스트리드 벨이 말했다.
갑작스럽게 백만 리스가 넘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빠져나간 탓일까?
그녀는 조금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호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같은 보병이라도 종족의 특성에 따라 전투에서 큰 차이를 보이곤 하는데, 엘프 보병은 그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병사들이야. 그리고 직접 훈련소에서 병사를 양성하는 비용보다는 저렴한데다가 양성 시간을 생각하면 이편이 훨씬 나아.”
“그런가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호의 모습에 벨은 말끝을 흐렸다. 영지의 재정 관리는 자신이 하고 있었지만, 이 세계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호가 더욱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안테로리의 영주는 호였다.
영지 내에서 영주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또한 딱히 영지의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많은 리스가 빠져나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큰돈이 쓰인 바람에 걱정이 되었을 뿐이었다.
정예 엘프 보병의 랭크 업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가 제법 많았기에 이틀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마지막 정예 엘프 보병까지 엘븐 나이트로 랭크가 바뀌는 순간, 호는 재빠르게 병력 편성 명령을 내렸다. 킬리드의 원숭이 녀석들이 코르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정예 실리스들의 보고 때문이었다.
“원인족들이 엘프들의 마을인 코르다를 공격하기 시작했데.”
“친구들이 죽어나가는 거 아니야?”
“호 님은? 호 님은? 호 님은 어떻게 하신데?”
수인들이 안테로리의 바로 옆에 위치한 엘프들의 마을 코르다를 공격했기 때문인지, 안테로리의 엘프 거주지에서는 연신 수인족이 공격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동족을 사랑하는 그들은 직접 안테로리에 그리고 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호가 자신의 친구들인 엘프들에게 도움을 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 시각, 회의실로 영웅들을 불러 모은 호가 안테로리의 영주로서 명령을 내렸다.
“코르다의 친구들을 돕기 위해 모든 엘븐 나이트들을 출전시킨다! 총대장은 나! 또한 한시진이 부장으로 이번 전쟁에 참여한다! 내가 없는 동안 안테로리는 리아 캬베데와 아스트리드 벨이 상의해서 안테로리의 안전을 담당한다!”
띵동.
-안테로리에 거주하는 엘프들의 만족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안테로리에 거주하는 수인족들의 만족도가 미미하게 하락했습니다.
명령을 내린 순간 나타나는 메시지를 보며 호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안테로리에 거주하는 엘프들의 만족도가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안테로리를 찾아오는 엘프들의 수 또한 많아질 터였다.
수인족의 만족도가 조금 하락하기는 했지만,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인지 그 하락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 정도는 수인족을 위한 건물을 지어주거나 돈을 이용해 가벼운 포상만 내려도 커버할 수 있었다.
“저는 출전 안 하나요? 냥?”
호의 명령에 리아 캬베데가 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번 전쟁에 호와 같은 소환자인 한시진만 출전한다는 게 못 미더웠다. 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리아는 안테로리를 방어하며 영지의 기술 개발에 전념해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호의 말에 리아 캬베데는 곧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있어 마스터인 호의 명령은 그 어떤 명령보다도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이천의 엘븐 나이트들이 전쟁 준비에 돌입했고, 그로부터 사흘 뒤 한시진이 이끄는 칠백의 선봉대가 먼저 출진 준비를 마쳤다.
“꼭 원숭이들을 물리치고 올게요.”
“본대와 내가 도착할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방심을 금물이라는 거 알고 있지?”
“네. 알겠어요.”
한시진은 충분히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D랭크 병종인 엘븐 나이트를 지휘하고 있으니, 전술적으로 큰 실수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어렵지 않게 수인들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킬리드의 대장 고르엘 녀석의 능력에 따라 어느 정도 애를 먹기는 하겠지만, 호는 한시진이라면 충분히 본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수인족이 코르다를 점령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와 엘븐 나이트들을 믿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어떻게든 한시진의 클래스를 C등급까지 올려야 할 텐데…….”
그렇게 떠나는 한시진의 뒷모습을 보며 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르엘과의 이번 전쟁은 단순히 SS등급의 ‘크리솔라이트의 꿈’이라는 퀘스트를 위해 엘 샤난의 호감을 높이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목적은 키마라이의 오너로 점찍어둔 한시진을 빨리 B랭크로 성장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에 참여하는 영웅을 그녀로 제한했고, 지금도 엘븐 나이트를 이끌고 함께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한시진을 선봉 부대로 먼저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건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명 경험치 몰아주기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
호는 나머지 엘븐 나이트들을 이끌고 엘프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안테로리 영지를 떠났다. 떠나기 전 호는 벨과 리아 캬베데에게 몇 가지 모종의 명령을 내렸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 *
“전군 속보로! 코르다의 친구들이 위험에 빠져 있다!”
한시진이 외쳤다. 이 세계로 오기 전 그녀는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한 부대의 장을 맡았던 지휘관이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참여해 혁혁한 성과를 올린 전적도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미 검증이 끝난 지휘관이었다. 단지 세부 능력과 클래스라는 시스템과 같은 규칙과 이 세계의 차고 넘치는 괴물 같은 존재들에게 치이고 있을 뿐, 군대를 이끄는 그녀의 경험은 결코 적지 않았다.
“마족의 군대가 움직였다!”
“안테로리가 병사를 일으켰다.”
안테로리에서 군대가 출전했다는 소식이 곧 붉은 핏빛의 대지를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물경 이천에 가까운 병사들이 코르다로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엘프들에게 날아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 엘프들은 곧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이미 수인족의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마족까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붉은 핏빛의 대지는 마족과 수인 그리고 엘프라는 세 종족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세 종족의 균형이 크게 깨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처음으로 소환자들이 등장했던 2년 전부터 마족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콜리안의 숲에서 안테로리의 대장 리아 캬베데가 이끄는 수인족이 페릴 예노스가 이끄는 마족과의 결전에서 크게 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수인족의 도시였던 안테로리는 마족이 점령했고, 이어서 마족을 대표하는 B급 마장기 키마라이가 등장하는 등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마족들은 전성기라도 맞이한 듯 급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현재 붉은 핏빛의 대지는 마족과 엘프가 각각 두 개의 성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족이 지배하는 지역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마족의 세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기도 했다.
“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토갈론의 요새로 도망가야 될 것 같은데?”
안테로리에서 군대가 출전했다는 소식에 엘프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평상시의 전력으로도 상대하기가 버거운 와중에 현재 코르다는 킬리드의 영주 고르엘이 이끄는 수인족의 공격까지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머릿수가 차이가 많이 나는 까닭에 요격이 아닌 농성전으로 겨우겨우 수인족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마…… 마족의 군대다!”
그때 한 남성 엘프가 소리쳤다. 그는 코르다의 영지에 살고 있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크리솔라이트 부족 엘프였다.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던 그는 안테로리의 깃발을 들고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병사들을 놓치지 않았다.
“벌써 마족이 왔다고?!”
“코르다 성은 아직 수인족이 공격하고 있잖아?”
“빨리 피해야 되는 거 아니야?”
코르다의 영지에서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엘프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여기서부터 현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코르다 성까지는 거리가 이틀 남짓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많은 친구들이 희생될 게 뻔했다. 그것을 생각하며 모두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안테로리의 군대는 점점 빠른 속도로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어어?!”
그때 안테로리의 군대가 마을 앞에 도착한 순간, 엘프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환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은혜가 당신 앞에 있기를.”
“세계수의 은혜가 당신 앞에 있기를.”
안테로리에서 출전한 병사들은 사악하고 더러운 기운을 내뿜는 마족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시적이고 난폭한 느낌을 주는 수인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동족인 엘프였다.
그 칠백의 엘븐 나이트가 들고 있는 신성한 목재로 만들어진 방패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갑옷들이 엘프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친근한 세계수의 향기와 함께 코르다의 엘프보다도 강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친구들이었다.
“코르다는 아직 잘 버티고 있나 보네.”
안테로리의 군대가 적이 아닌 지원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엘프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마을의 엘프들은 한시진을 비롯해 그녀의 부대원들에게 먹을거리와 머물 장소를 제공하는 호의를 베풀며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한시진은 그런 엘프들의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언질 받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