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리그너스 대륙전기 066화
“엘 카닐슨과 리아 캬베데가 동시에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하면 좀 더 빨리 연구 기술을 완료할 수 있겠어.”
거기에 자신까지 가세한다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터였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행운에 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리셴르나가 안테로리를 노리고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더 빠르게 대비를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안테로리의 훈련소에서는 계속해서 사드나인이 정예 엘프 보병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정예 엘프 보병이 양성되는 속도가 예전보다 조금 빨라지고 있었는데, 원인족이 영주로 있는 마을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일어난 변화였다.
견원지간이라는 말은 이 세계에서도 통용되는지, 사드나인은 얼굴도 모르는 원인족을 향해 맹렬한 적대감을 불태우고 있었고, 이는 곧 훈련소에서 성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한시진의 손에 의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건물 건설도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재정도 넉넉했고, 건설에 필요한 자재도 충분했다. 그렇게 안테로리는 별다른 문제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도 조금 있으면 2년째가 되어 가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감성에 젖었기 때문일까? 호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던 때를 떠올렸다.
여신 라헬을 만나고 선택의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은 이 세계가 자신이 플레이하던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세계라고 생각했었다.
웃기게도 그런 생각은 지금도 가끔씩 들곤 했다. 가상현실 게임과 너무나도 똑같은 시스템 메시지와 이벤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이곤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아마도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들 것 같았다.
“돌아갈 수는 있을까……?”
오랜만에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이삼 일에 한 번씩 통화를 했었는데. 그리운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은 지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대쉬해서 행복한 연애를 했던 혜연의 모습도 잠깐이나마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세계를 통일하면, 정말 현실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갈 수 있어. 윤호. 약한 모습 보이지 말자.”
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한 다크엘프가 호의 눈앞에 나타나 말했다. 그녀는 안테로리의 영주성 내에서 일하는 메이드였다.
“호 님. 아르테미스 상단이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상단은 어디에 있지?”
“아스트리드 벨 님이 접견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다크엘프의 말에 호는 상념을 접고 다크엘프의 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최근 아르테미스 상단은 안테로리의 전용 상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독점적으로 가젯을 구입하고 있었다.
다른 상단이 몇 번 가젯 의복을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오기는 했지만, 호는 그런 상단들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건 다른 상단들보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쳐주는 값이 가장 높은데다가, 아르테미스 상단과의 거래가 지속될수록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판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이제 관심이 높아질 때가 되었는데?”
상단의 평판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어느 정도 관리를 해줘야 하는 스텟이었다. 굳이 관리를 하지 않아도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관리를 하면 할수록 쉽게 게임을 클리어해 나갈 수 있었다.
상단의 평판이 높아질수록 상단은 플레이어들에게 좋은 아이템들을 판매했고, 희귀한 정보를 알려주곤 했다. 또한 가끔씩 고 랭크의 병종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잊지 않고 있던 호는 아르테미스 상단의 평판을 높이기 위해 계속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상단들의 거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다 아르테미스의 평판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상단 – 아르테미스 상단(관심)[21 / 10000]]
아르테미스 상단의 정보창을 열어보니,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보통에서 관심으로 한 단계 높아진 상태였다.
“또 보는군.”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테로리의 지배자이시자 소환자이신 윤호님.”
레드 벨벳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살며시 웃었다.
“나도 만나서 반갑군. 아르테미스 상단은 언제나 우리의 좋은 고객이지.”
최근 직물 공장이 늘어나면서 가젯 의복의 생산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다행히 안테로리에 거주하는 수인족도 많은 터라 노동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가젯 의복들은 대부분 아르테미스 상단이 사들이고 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안테로리의 가젯 의복은 품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지요. 그리고 오늘도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거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드 벨벳은 아쉬운 눈으로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레드 벨벳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 것을 보니 아마 거래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미 거래는 끝난 모양이군.’
현재 안테로리의 회계 업무는 전적으로 아스트리드 벨이 맡고 있었다. 호는 상단과의 거래 또한 그녀에게 맡겼는데, 방금 레드 벨벳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르테미스 상단과의 거래에서 꽤나 깐깐하게 군 모양이었다.
뭐,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만족스럽지 않을수록 그만큼 안테로리는 이득을 봤다는 이야기니까.
어쨌든 거래가 체결되었다는 것은 아르테미스 상단에게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거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스트리드 벨이 몸을 일으켰다. 피곤이 꽤 쌓여 있는지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커티삭보다 훨씬 거대한 영지인 안테로리의 재정을 그녀는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몇 있기는 했지만, 영웅이 아니라 그런지 대부분의 일을 아스트리드 벨 혼자서 처리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영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녀의 부담은 더더욱 커질 터였다.
‘정치 능력이 높은 영웅 하나가 또 굴러 들어왔으면 좋겠네.’
호는 엘 카닐슨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안테로리에 언제 다시 찾아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응접실에서 멀어지는 아스트리드 벨의 뒷모습을 보던 레드 벨벳이 호를 보며 말했다.
“협상에 꽤나 능한 여인이네요.”
“덕분에 그대에게는 내가 있을 때보다 더 골치 아픈 상대겠지.”
“호호호. 네. 하지만 서로 예상했던 가격에서 큰 차이는 없었답니다.”
호의 시선이 레드 벨벳에게 향했다. 아르테미스 상단과의 관계가 보통에서 관심으로 올라갔기 때문일까? 자신을 대하는 레드 벨벳의 행동이 예전보다 친근한 것 같았다.
“최근 코르다의 엘프들과 친근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역시 상단이라 그런가? 정보가 빠르군.”
“그래야 상단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호의 말에 레드 벨벳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르테미스 상단은 1년 넘게 호와 가젯 의복을 거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상단과 영지 양쪽에 큰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르테미스 상단은 수량도 많고 품질도 좋은 가젯 의복을 생산하는 안테로리에 대한 평가를 다른 영지들에 비해 한 단계 올린 상황이었다.
“최근 상단 수뇌부에서는 안테로리의 호 영주님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요.”
“내가 기쁘게 생각해야 할 일인가?”
“물론이죠.”
레드 벨벳은 호를 바라보며 아까보다도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꼭 토끼를 덮치려고 작정한 여우처럼 느껴졌기에 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상단에서는 호 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드리려고 하고 있어요.”
“도움? 무슨 도움이지?”
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레드 벨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아르테미스 상단의 평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술자입니다.”
레드 벨벳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술자?”
자신만만한 레드 벨벳의 표정을 보며 호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그녀가 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면 귀찮아 질 것 같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떨리는 눈동자는 감추기 힘들었다. 그 이유는 호가 플레이했던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너무나 흡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씩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 세계의 모습 때문이었다.
플레이어에 대한 평판이 좋은 상단들은 플레이어에게 여러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것은 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는 오랜 시간 동안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해 온 경험으로 인해 상단이 주는 선물이 어떤 것들인지 대략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이 어떤 종류이며,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수량인지까지, 제법 많은 케이스를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공략본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기술자라는 것은 없었다.
‘후…….’
거기까지 생각을 한 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은 이 세계가 가상현실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자각하고자 했다. 그러니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는 충분히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과는 달리 정해진 시스템, 규칙이라는 게 없었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 또한 자신에게 큰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이 또한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만 했다.
어쨌든 기술자가 무슨 선물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레드 벨벳의 말을 들어보면 아마 기술자는 현재 영지에서 개발이 가능한 영지 기술 하나를 바로 완료시켜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정치와 관련된 영웅을 등용할 수 있게 해주거나.
“……?”
그런 호의 눈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드 벨벳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칠흑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호의 모든 것을 관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호는 그런 레드 벨벳의 시선을 피하며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어떤 기술자지?”
“자애로운 마음씨를 익힌 기술자입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영지의 기술을 하나 완료시켜 주는 능력인 모양이었다.
“자애로운 마음씨?”
호의 인상이 약간 일그러졌다. 자애로운 마음씨는 E등급의 영지 기술이었다. 그건 리아 캬베데나 엘 카닐슨 그리고 자신 정도라면 일주일 안에 연구를 시작해서 완료할 수 있는 난이도의 기술이었다.
마치 대단한 것을 줄 것처럼 말해 놓고 고작 E등급의 영지 기술이라니? 조금은 실망이었다. 뭐, 아르테미스 상단과의 관계가 관심이라는 것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레드 벨벳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사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레드 벨벳이나 아르테미스 상단이 다른 조건을 내밀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이런 기술은 안테로리에서도 쉽게 개발할 수 있으니 다음에는 좀 더 도움이 될 만 한 것들을 가져오라는 액션이었다.
역시 레드 벨벳은 영리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