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리그너스 대륙전기 065화
“그래봤자 그 인간은 마족이 아닌가요? 엘 아르윈, 그는 소중한 제 동료들을 죽였어요. 저주받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 스켈레톤들과 세계수를 버린 다크엘프들이 제 동료들과 제 친구들을 죽이는 모습을 저는 톡톡히 봤어요.”
“샤난. 당신의 슬픔은 저도 마찬가지로 겪었어요. 그리고 저도 한때는 호 님을 미워하고 저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엘 샤난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르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샤난. 지금의 안테로리를 가보셨나요? 지금 안테로리는 이곳 코르다에 살고 있는 엘프들보다도 더욱 많은 엘프들이 살고 있어요. 전부 전쟁에 지쳐서 도망쳐 온 엘프들입니다.”
“…….”
“그리고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죠. 전부 호 님의 은혜 때문이에요. 예전 안테로리는 아이스 스켈레톤이라는 저주받은 존재들이 마을을 지켰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마족들이 아닌 엘프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어요.”
“…….”
“과거에 집착하지 말아요. 사냔. 호 님은 진심으로 엘프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호 님을 오해하고 있어요.”
아르윈의 말에 샤난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투명한 눈동자로 아르윈을 바라봤다. 진실의 눈으로 바라본 그녀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샤난은 몇 번이나 진실의 눈으로 아르윈을 바라봤고, 그럴 때마다 진실의 눈은 언제나 아르윈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후.”
샤난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 며칠째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한결같이 그녀는 안테로리의 영주 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칭찬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안테로리를 정탐했던 엘프들한테서 정말로 안테로리의 한 지역에 커다란 엘프들의 마을이 건설되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많은 수의 엘프들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엘프들의 E랭크 병종인 정예 엘프 보병이 성벽을 지키고 있는 걸 목격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마족들의 도시를 엘프가 지키고 있다? 엘 샤난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이 엘 아르윈의 말대로 지금 안테로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엘프를 사랑하는 사람일까?’
그 질문에 엘 샤난은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고는 있었다. 아르윈의 말대로 그는 자신들을 정복시킬 힘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의 영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프들의 골칫거리이자 현재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는 수인족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만 들릴 따름이었다.
“…….”
반 년 전, 마족들이 엘프들의 영지에 침입했을 때, 샤난은 처음으로 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엘프들의 영역 내에 있는 던전의 파괴에만 열중해 있었다.
‘그때 내가 실수한 걸까?’
호가 지휘하던 엘프들과 충돌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엘프들이 먼저 마족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투를 끝낸 그는 자신에게 그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고 순순히 풀어주었다.
그때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록 샤난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샤난의 모습을 보며 아르윈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혼란스러워하는 엘 샤난의 표정이 꽤나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엘 샤난. 최근 고르엘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들었어요.”
그때 아르윈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는 코르다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아르윈의 입에서 나온 고르엘이라는 인물은 림드 산맥에 위치한 수인족의 도시 중 하나인 킬리드의 영주였다. 그는 호시탐탐 코르다를 노리고 있었고, 매번 병사들을 코르다로 보내곤 했다. 그 때문에 현재 킬리드와 코르다의 경계에서는 엘프와 수인들의 전투가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네……. 맞아요.”
엘 아르윈의 말에 샤난이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고르엘이 이끄는 수인 병사들로 인해 경계 지역에서는 엘프들의 피가 덧없이 흐르고 있었다. 개중에는 고르엘이 영주로 있는 킬리드까지 끌려가 수인들의 노예가 된 엘프들도 여럿 존재했다.
“호 님과 함께해요. 호 님은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어요.”
아르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샤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벌써 몇 번째나 듣는 말이었다. 엘 아르윈은 코르다를 방문한 이후 매일같이 저 이야기를 꺼냈었다.
“코르다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호 님은 분명 엘프들을 이끌고 당신을 돕기 위해 올 거예요. 샤난. 호 님을 마족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우리 엘프들의 친구입니다.”
계속되는 엘 아르윈의 말에 샤난이 눈을 감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샤난은 처음 아르윈을 만났을 때보다 자신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
“……그렇게 계속해서 설득을 했더니 넘어왔다는 건가?”
“네.”
엘 아르윈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코르다에서의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었다. 엘 샤난의 호감도를 높일 수 있는 퀘스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를 완료하게 되면 그녀 또한 엘 아르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동료로 만들 수 있었다.
[마족 혹은 수인족 10회 격퇴 - 0%
엘 샤난과 함께 천여 명이 넘는 마족 혹은 수인과의 전쟁에서 엘프 병사를 이끌고 승리하기 – 0%
엘 샤난과 함께 코르다의 호수를 구경하기 – 0%
B랭크 이상의 엘프족 병종 연구를 마치기 – 0%]
‘영웅의 등급 차이인가?’
생각 외로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힘들어 보이는 것이 B랭크 엘프족 병종 연구를 끝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확신하기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 세계의 호감도 관련 퀘스트의 수가 너무나도 적었다.
그래봤자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여성 공략 퀘스트는 멜리아 비쉬와 엘 샤난 둘뿐이었다. 멜리아 비쉬는 B등급, 그리고 엘 샤난은 C등급의 영웅이었다. 등급으로만 보면 멜리아 비쉬의 공략이 엘 샤난의 공략보다 어려워야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엘 샤난보다 멜리아 비쉬의 공략 퀘스트가 더 쉬어 보였다. 전투를 벌여야 하는 엘 샤난의 공략 퀘스트와는 달리 멜리아 비쉬의 공략은 돈만 있으면 금방 클리어할 수 있었다.
‘어……. 아닌가? 한두 푼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다만 그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뿐이었다.
“엘 샤난은 호 님이 정말 엘프들을 사랑한다면 엘프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고르엘을 물리쳐 주기를 원하고 있어요.”
“고르엘?”
“네. 그는 림드 산맥에 위치한 수인족의 마을 킬리드의 영주예요. 원인족이죠.”
“원숭이인가?”
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원인족. 수인 왕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족 중 가장 비열하고, 약고, 배신을 잘 때리는 녀석들이었다. 그 때문에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한국 유저들 중 대다수는 수인 왕국을 이루는 부족 중 원인들을 가장 싫어했다. 특히나 견인족과 원인족은 같은 자리에서는 식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거 사드나인이 좋아할 만한 일이 생기겠군.”
그들은 플레이어들에게 더럽고 치사하고, 약은 녀석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인들 중에선 꼼수나 잔머리를 잘 굴리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꼼수나 잔머리는 정석적인 플레이에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호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고르엘을 물리치기 위한 병력은 언제까지 보내야 하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도 코르다와 킬리드의 경계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 같아요.”
“그렇군.”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호는 지금 당장 킬리드를 정복하기 위해 병력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정보는 필수였다. 그리고 아직 호는 고르엘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
상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병사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엘 샤난의 마음에 생겨난 퀘스트에 한 방울의 물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예 엘프 보병 사백을 편성해 코르다로 이동시킨다. 엘 샤난에게 ‘그대의 호의에 대한 나의 선물’이라고 전해주도록 해. 그리고 예전의 일은 서로의 실수였다는 말도 함께 전해줘.”
“네? 네.”
갑작스러운 호의 명령에 아르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자신의 친우에게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녀의 귀가 파닥파닥 움직였지만, 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코르다의 발전도를 생각하면 정예 엘프 보병 사백은 엘 샤난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아직까지 점령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킬리드 또한 코르다와 비교했을 때 발전도가 별반 차이가 없을 거야.’
호의 눈동자가 빛났다. 정확한 정보는 정보원들이 알아오겠지만 대략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코르다가 길을 내어준다면, 고르엘의 병사를 물리치는 것 뿐 아니라 주변 상황에 따라 킬리드를 점령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엘프들의 마을인 코르다의 길을 빌리기 위해서는 엘프들로만 구성된 병과로 군대를 편성해야 했다. 그렇기에 호는 본격적으로 엘 샤난을 돕는 것은 최소 D랭크 이상의 엘프 병종의 개발이 끝난 후로 가닥을 잡았다.
‘한시진의 경험치도 올려야 하는데, 때마침 만만한 녀석이 붙었군. 이거 일석이조잖아?’
엘 샤난의 마음에 빛의 씨앗을 개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한시진에게 경험치를 몰아줄 수 있는 전쟁. 거기에 상대가 만만하다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 * *
사백의 정예 엘프 보병을 데리고 코르다로 떠났던 엘 아르윈이 다시 안테로리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후였다. 안테로리에 도착한 그녀는 편지 한 통을 호에게 전해 주었는데, 엘 샤난이 직접 쓴 편지였다.
호는 엘 샤난의 편지를 한 번 스윽 읽어보고는 자신의 방에 있는 책상에 집어넣었다.
엘 아르윈이 코르다로 떠났던 그 일주일 사이, 안테로리에는 새로운 얼굴이 생겼다. 그는 엘 카닐슨이라는 이름의 엘프족 D등급 영웅이었다. 그는 다른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피해 도망쳐 오다가 안테로리에 정착한 엘프였는데, 마을을 돌아다니던 한시현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호에게 직접 등용하길 권유한 케이스였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엘 카닐슨
2. 성별 : 남(418)
3. 종족 : 아날치드
4. 소속 : 엘프 왕국
5. 레벨 : 47
6. 직업 : 엘븐 메이지(D)
7. 세부능력
통솔 : 27 / 30(E)
무력 : 29 / 30(E)
지력 : 99 / 100(C)
정치 : 41 / 50(D)
매력 : 37 / 50(D)
8. 특성 : 생명의 축복, 엘프의 노래
9. 스킬
<연구에 미치자> B랭크
세상의 진리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마법사들의 공통된 특성입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유독 진리 탐구에만 관심을 보이는 마법사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연구실에서 실험기구를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야죠. 심지어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진 남성이 있어도 말입니다.
-효과 : 스킬을 보유한 영웅이 맡은 영지 기술 개발 연구의 달성 속도가 20% 빨라집니다.
엘 카닐슨은 높은 등급의 영웅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력에 특화된 클래스를 보유한 영웅으로, 많은 영지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호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등용해야 할 영웅이었다. 게다가 그가 지니고 있는 스킬도 환상적이었다.
“그러면 바로 연구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영지에서 다른 일이 아닌 오직 연구 개발에만 일을 맡기겠다는 호의 제안에, 엘 카닐슨은 얼굴에 화색을 띠고는 마법 연구소로 향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지닌 스킬 때문인 듯했다.
그런 엘 카닐슨의 뒷모습을 보며 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엘 카닐슨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마법 연구소에서 영지의 발전을 위해 인생과 시간을 쪽쪽 빨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