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리그너스 대륙전기 064화
“이제 반 아니 30% 정도 진행한 건가?”
오늘 아침 호는 아스트리드 벨을 통해 리아 캬베데가 엘븐 나이트의 연구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엘븐 나이트는 엘프의 D랭크 병종으로, 정예 엘프 보병의 상위 병종이었다. 그나마 지력 수치가 높은 영웅답게 그녀는 어렵지 않게 연구에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힘든 것은 이제부터였다. A등급 영웅이자 266의 지력 수치를 지닌 그녀로서도 C랭크 이상의 연구부터는 지금처럼 빠르게 완료할 수 없었다. 엘븐 나이트의 연구까지는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A랭크의 병사와 관련된 연구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결국 계속되는 이 연구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그녀를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게 내가 되면 좋겠지만…….”
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은 아이템의 효과를 받고서도 지력 수치가 겨우 75밖에 되지 않았다. F, E등급 수준의 간단한 연구는 호도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연구에서 성과를 보기에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호가 영지 기술 개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한시진이 호의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 마족들의 거주지 공사와 직물 공장 공사가 끝났어요.”
“생각보다 빠른데?”
“커티삭과는 다르게 오크들이 정말 일을 열심히 하더라고요. 일에 대한 영지민들의 만족도가 높아서 그런 것 같아요.”
한시진의 이야기를 들은 호는 당연한 결과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직물 공장이 하나 더 완성되었다면 매달 판매할 수 있는 가젯의 수량이 늘어날 테고, 이는 곧 영지의 돈인 리스 수입이 큰 폭으로 늘어난다는 걸 의미했다.
“오크들에게 포상은 내렸어?”
“네. 먹을 것들을 제공했어요. 영지의 여유 식량이 꽤 많이 남는 터라 풍족하게 나눠줬어요.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성인 오크가 거느리는 가족의 수는 굉장히 많으니까.”
“어쨌든 공사도 끝났으니 이제부터 뭘 해야 될까요?”
한시진이 물었다. 밤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다시 직물 공장과 대시장의 건설에 집중해줘.”
“새롭게 짓는 건가요?”
“응. 빈 공터야 남아 도니까 적당한 곳에 지으면 될 거야. 아직까지 리스가 넉넉한 편이기는 한데 곧 높은 난이도의 영지 기술 연구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리스가 기하급수적으로 필요하게 될 거야. 이 세계에서도 돈이 곧 힘이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지.”
“오빠가 말하는 그 A등급, 그러니까 A랭크 병사 말이죠?”
“그래. 후우. 갈 길이 멀어. 이제 D랭크 병종인 엘븐 나이트의 연구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세 단계를 더 업그레이드 시켜야 해.”
그것도 단계별로 세 개의 연구만 끝내면 되는 게 아니었다. A랭크 엘프족 보병인 엘븐템플러의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연구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30 여 가지의 연구를 끝내야만 했다. 만약 이렇게 일이 진행이 된다면 적어도 내후년쯤에나 엘븐템플러의 연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이나 리셴르나가 기다려주려나.”
“글쎄요. 저라면 기다리지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말을 멈춘 한시진이 창을 통해 영주성 광장에 굳건하게 서 있는 거대한 마장기를 바라봤다. 마족의 B급 마장기 키마라이는 이제까지 소환된 이후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수인족들도 생각이 있다면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는 오너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거예요.”
“그렇겠지.”
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븐템플러의 개발만큼이나 골머리를 썩이는 게 바로 저 키마라이였다. 분명 B급 마장기는 강력하고도 좋은 무기였고, 충분한 전쟁 억지력을 발휘했다. 문제는 저 녀석은 지금의 자신들로는 사용할 수 없는 병기라는 점이었다.
잠시 고개를 흔들던 호가 화제를 돌렸다.
“C등급 클래스의 진척은 어때?”
“윈드레이지 말인가요?”
“응.”
현재 한시진은 E등급 클래스인 숙련 검사에서 전직해 D등급인 소드 비기너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C등급 클래스로 ‘윈드레이지’, 바람의 격노라는 직업을 바라보며 그에 맞게 자신의 세부 능력을 높이고 있었다.
윈드 레이지는 호가 보유하고 있는 전쟁 군주처럼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존재하는 특수 직업 중 하나였다. 전쟁 군주가 하사관과 상급 사관의 상위 호환인 말 그대로 전쟁에 보너스가 있는 특수 직업이라면, 윈드레이지는 일 대 일은 물론 다 대 일의 전투에 특화된 직업이었다. 그러니 검을 잘 사용하는 한시진에게는 궁합이 잘 맞는 클래스였다.
“아직 전직에 필요한 능력치를 만족시키려면 경험치가 많이 필요해요.”
“경험치를 획득하는 건 천천히 생각해.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전직 조건 달성은?”
말을 하며 호는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여 눈앞에 윈드레이지의 정보를 띄어 올렸다.
[윈드 레이지(C) - 격렬한 바람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이 클래스는 빠르고 날카로운 검술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상대를 베어 버립니다. 자신의 무력 수치가 20% 상승하고, 지휘하는 부대의 이동 속도가 아주 약간 상승합니다.
전직 조건.
-전 종족 가능. 검술 계열의 D등급 직업을 보유한 상황에서 통솔력 30, 무력 100, 지력 30, 정치 10, 매력 10이 필요.
-이 세계의 신비로운 기운인 마나를 깨달아 검을 이용해 그 힘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전을 통해 천 명의 적을 직접 죽여야 합니다.(0/1000)]
생각보다 까다로운 전직 조건을 지닌 클래스였다. 어차피 키마라이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B등급 클래스로 전직을 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통과점인 C등급 클래스를 레어 클래스로 결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호가 굳이 한시진에게 윈드 레이지를 추천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윈드 레이더의 상위 클래스인 B등급의 레어 클래스 때문이었다.
‘까다롭긴 해도…….’
클래스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호였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시진의 레어 클래스 획득이 충분히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반은 완료한 거 같아요. 하지만 나머지 반은…….”
“반을 완료했다고?”
이어지는 한시진의 대답에 호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윈드 레이지의 전직 조건 중 한시진이 만족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마나의 기운을 검에 다룰 수 있는 거요. 소드 비기너가 되고 난 이후 며칠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
호는 입을 쩍 벌렸다.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많은 유저들은 저 마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해 징징대는 글을 자주 올리곤 했었다. 마나는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미지의 감각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에디터로도 어떻게 커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 대륙을 통일했던 호도 가상현실 속에서 마나를 느끼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현재 이 세계에서도 호는 전쟁 군주 클래스를 보유한 이후에야 무기에 마나를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가상현실에서나마 오랜 시간 마나를 느끼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었다. 그러니 이미 경험해 본 일을 다시 하는 것에 불과했다. 반면 한시진은 D등급 클래스인 소드 비기너로 전직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기야, 그러니까 저 나이에 대한제국의 제2 화랑기사 단장이라는 직함을 얻었겠지. 이런 재능충 같으니라고…….’
과연 타고난 재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그렇다면 남은 건 실전을 통해 천 명의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경험치는 실전을 치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올라갈 터였다.
‘경험치라…….’
쉽게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던전은 이미 자신이 대부분 파괴해 버린 후였다. 그렇다고 수인족의 경계 지역으로 한시진을 보낼 수도 없었다. 현재 아트리그와의 경계 지역은 잠잠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만약 경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그것은 단순한 탐색전이 아닌 영지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지금은 영지 일을 통해 경험치를 높이면 되지만, 빠르게 한시진의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전직 조건을 달성시키기 위한 방법도 생각해 봐야 했다.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니, 이거 축하해 줘야겠는데? 역시 대단해. 왜 이제까지 말 안 했어?”
“헤헤. 오빠 놀려주려고 했는데, 저 성공했어요?”
“응. 정말 놀랐어.”
수줍게 미소를 짓는 한시진의 모습을 보며 호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런 호의 행동이 싫지 않은 모양인지 한시진이 호의 손길을 느끼며 품에 안겨들었다.
띵동.
-‘엘 샤난의 마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엘 샤난은 엘프의 다양한 부족 중 하나인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이끄는 엘 라이린의 하나뿐인 외동딸입니다. 어릴 때부터 종족간의 충돌이 일어났던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성장한 그녀는 엘프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마족과 수인들에게 큰 적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녀의 마음도 가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메시지에 호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코르다에서 엘 아르윈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엘 샤난과 관련된 퀘스트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빠?”
갑작스럽게 신음성과 함께 허공을 바라보는 호의 모습에 한시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호의 모습에 그녀는 머쓱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영지에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 * *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의 마을 중 하나인 코르다는 호수 위에 지어진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도시였다. 그리고 그런 코르다를 둘러싼 호수는 예로부터 인시네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먼 옛날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가 존재하던 시절부터 불리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에 지어진 명칭이라 그런지 현재는 그 인시네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엘프들은 안타깝게 아무도 없었다.
그때 코르다의 영주 관저에서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인시네라 위를 노니는 물의 요정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명은 전통적인 엘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푸른색 흉갑을 걸친 엘프였고, 나머지 한 명은 부드러워 보이는 천을 걸치고 있었다.
바로 엘 샤난과 엘 아르윈이었다.
“인시네라의 순수하고 깨끗한 물로 인해 요정들이 정말로 행복해 하는 것 같아요.”
“네. 우리들이 지켜야 할 아름다운 자연이죠.”
엘 아르윈의 말에 엘 샤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줬던 것처럼 그대로 우리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들이죠. 그런 샤난의 생각은 호 님과 일치하기도 해요. 안테로리의 엘프들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안테로리.”
동료의 입에서 마족 도시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샤난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안테로리에서 온 여인이었다. 어째서 엘프가 마족과 손을 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타락한 엘프였다면 당장에라도 내쫓았을 테지만, 엘 아르윈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