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리그너스 대륙전기 063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제가 머무르는 장소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을게.”
그렇게 호는 엘 아르윈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거주하는 집의 생김새는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손을 댄 게 아닌, 커다란 나무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줬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외형이었다.
실제로 이 세계에서 엘프들이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은 연장이나 도구를 사용해 집을 짓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들의 건축이란 나무의 묘목을 빼곡할 정도로 심고, 자연의 힘을 빌어 나무를 키우는 게 주된 일이었다. 그런 점 때문에 엘프들의 주거지 건설을 가리켜 드워프들은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귀만 큰 녀석들의 소꿉장난’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기야, 공사 현장이라기보다는 묘목 심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업이니 타고난 인부들인 드워프들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호는 엘 아르윈의 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큰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환경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아르윈의 집 내부는 간소 아니, 검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특별한 가구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옷을 보관할 소박한 가구와 침대 그리고 손님 접대용 식탁과 의자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것마저도 나무를 깎아서 만든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겨난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군.”
“엘프는 인간들과는 다르니까요. 저희들에게는 굉장히 편한 공간이랍니다.”
호의 중얼거림을 들리자 엘 아르윈이 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희미한 향기가 호의 코끝을 간질였다. 깊은 내음이 나는 향기였다.
“엘프들의 특산품이에요. 숲의 이슬이라고 불리기도 하죠.”
“엘프들의 특산품이라……. 이것도 팔 수 있는 건가?”
“네. 그렇긴 하지만 숲의 이슬을 대량으로 키우는 곳은 따로 있어요.”
호의 질문에 아르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특산품으로 생산을 할 수는 있었지만, 현재 안테로리에서 생산되는 숲의 이슬은 특산품으로 판매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은 아니었다.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극소량에 불과했다.
‘사탕과 비슷한 맛을 내는 수인족의 간식과 비슷하군.’
엘프들의 차인 숲의 이슬. 그 맛은 호가 살던 세계의 연한 녹차와 비슷했다. 하지만 뭐랄까? 차에서 풍기는 느낌은 달랐다. 조금만 입에 머금어도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크리솔라이트 부족에 관한 이야기라면?”
호는 숲의 이슬의 향과 맛을 음미하다가 엘 아르윈의 물음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르윈이 안테로리에 합류한 지도 제법 됐지?”
“제가 마스터를 모시게 된 지는 고작 반년이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엘프들의 삶에서는 짧은 시간에 불과하죠.”
수백 년을 사는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기준에서 생각한다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데? 아르윈이 살던 마을에서의 일 말이야.”
“제 친구들도 호 님의 뜻을 깨닫고 저처럼 호 님을 모셨다면 모두 세계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걸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엘 아르윈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런 아르윈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는 조금이나마 소름이 끼쳤다. 오너 시스템은 이들의 사상과 기억 그리고 생각까지 바꿀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공략본이라고 쓴 글들을 보면 매번 오너 시스템을 잘 이용해야만 대륙을 정복할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이 세계에서도 통하고 있었다.
‘충전 시간이 긴 게 단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오너 시스템이었다.
“그랬으면 더욱 좋았을 테지. 어쨌든 아르윈을 만나기 전, 난 엘프들의 영지에서 던전을 토벌하고 있었어. 전부 엘프들을 위한 일이었지.”
“역시 엘프들을 위하시는 호 님의 마음은 정말…….”
그건 엘프들이 아닌 호 자신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엘 아르윈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호가 자연스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만난 엘프가 하나 있었지. 엘 샤난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호의 말에 엘 아르윈이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엘 샤난! 하이 센티넬인 엘 라이린 님의 딸이에요. 그 무예가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무예가 대단하다라. 뭐, 그랬던 것 같긴 하네.”
엘 아르윈의 말을 들으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레벨이 100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력 수치가 200에 가까웠던 것 같았다. 그 정도는 대륙의 수많은 영웅들과 비교한다면 길거리에 치이는 돌멩이 수준의 무예에 불과했지만, 엘 아르윈의 기준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쨌든 완벽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해 본 호는 엘프들의 생리와 그들의 체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이 센티널.
그 의미나 할 수 있는 행동과 권한은 상당히 차이가 나지만, 어떻게 보면 수인족의 리셴르나처럼 엘프의 변경백 역할을 하는 책임자라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다른 종족과 경계를 맞대며 엘프들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 전투를 치르는 엘프들의 대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엘 샤난에 대한 엘 아르윈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엘 샤난은 마족과 수인족을 증오하기로 유명한 엘프인데, 만약 호 님과 마주쳤다면…….”
“까불긴 했는데, 엉덩이를 두들겨서 보내줬지.”
그렇게 말하며 호는 인상을 썼다.
엘 샤난. 그녀의 엉덩이를 두들겼다기보다는 더러운 퀘스트만 하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엘 아르윈은 호의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어머? 그렇다면 그녀도 호 님의 이름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그녀와 친해지고픈 마음은 있어.”
마음만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친해져야만 했다. 어떻게든 호감을 사 엘 샤난을 동료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SS등급의 퀘스트인 크리솔라이트의 꿈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하. 하지만 저도 엘 샤난과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안테로리에 많은 수의 엘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엘 샤난은 호 님에게 관심을 가질 거예요.”
“흐음. 그럴까?”
“네. 우리 종족에게 호 님은 영웅이니까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이야기하는 엘 아르윈의 모습을 보며 호는 다시 한 번 오너 시스템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르윈이 자신을 향해 저주를 내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잠깐 떠올린 호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엘 아르윈에게 넌지시 말했다.
“나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크리솔라이트 부족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어. 오직 바리안스의 대지에 있는 수인들만이 나의 적일뿐이지.”
“리셴르나가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저도 들었어요.”
“맞아. 그런데 듣기로는 엘 샤난, 그녀가 대표로 있는 코르다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다른 지역의 수인들과 잦은 교전을 벌이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네. 맞아요. 제가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 살다가 제가 있는 곳으로 옮겨온 친구들은 매번 야만적인 수인족의 공격 때문에 많은 엘프들이 피를 흘렸다고 말했어요.”
엘 아르윈의 말에 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은 즉 그녀는 나와 같은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거네.”
“아, 그렇군요.”
“그러니 엘 샤난을 만나 나에 대해 잘 말해 줄 수 있어? 마음 같아서는 직접 가고 싶지만, 나는 안테로리의 영주.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은 아니거든.”
오히려 영주인 덕에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활동할 수 있기는 했지만, 마스터인 호의 명령인지라 엘 아르윈은 그 말에 담긴 모순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엘프 영지에서 있었던 충돌 때문에 그녀는 나를 경계하고 있어. 하지만 아르윈은 엘 샤난과 똑같은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니까…….”
호는 말끝을 흐리며 엘 아르윈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 내가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머?! 호 님이 나쁘다니요. 호 님은 우리 안테로리에 거주하는 엘프들의 영웅이에요.”
뭐,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일자리도 만들어 주니 거짓은 아니었다.
“알았어. 어쨌든 엘 샤난에게 이렇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마족이 아닌 소환자로서 우리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인족과 함께 대항하고 싶다고 말이야.”
“아……. 정말이신가요?”
“물론이지.”
엘 아르윈의 커진 눈동자를 보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엘 샤난의 호감을 산 후 그녀를 동료로 만들 생각이었다. 분명 멜리아 비쉬 때처럼 그녀의 공략과 관련된 퀘스트가 나타날 터였다.
“그러면 코르다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니, 오늘 거주지 공사를 마치면 바로 출발할게요. 준비할 것도 따로 없거든요.”
엘 아르윈이 자신의 기다란 귀를 빠르게 파닥이며 말했다. 자신의 부족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녀는 당장이라도 엘 샤난을 만나러 갈 기세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엘 아르윈은 엘 샤난을 만나기 위해 곧바로 코르다로 떠났다. 그렇게 한 명의 일손이 사라지고 나서도 안테로리는 계속해서 바쁘게 시간들을 보내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의 띄게 변한 것은 바로 엘프 보병들의 성장이었다. 풋내기가 아닌 어느 정도 군인 티가 나는 엘프족의 E+랭크의 병사인 정예 엘프 보병들이 정예 실리스 들과 함께 안테로리의 치안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기존에 안테로리의 치안을 담당했던 아이스 스파토이들은 안테로리 주위에 퍼져 있는 대형 식량 저장고의 방어를 맡았다.
“냐앙.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멍.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리아 캬베데와 사드나인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한쪽은 세계수를 섬기를 엘프, 그리고 다른 한쪽은 세계수를 버린 타락한 엘프. 서로 만나기만 하면 싸워야 할 존재들이 오히려 힘을 합쳐 안테로리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으니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도 서로의 임무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애당초 싸우지 않고 저렇게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엘프와 다크엘프의 관계를 아는 이들에게는 경악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게 다 호 님 때문이지. 냥.”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대단한 인간입니다. 커엉! 왜…… 왜?!”
리아 캬베데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사드나인은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는 리아 캬베데를 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였다.
“인간이라니?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주.인.님이라고 해야지. 견족의 충성심은 어디 가져다 버렸어? 이 개새끼야.”
“……네, 그렇죠. 주인님이죠.”
리아 캬베데가 자신의 발 사이에 숨겨진 발톱을 스윽 드러내자, 사드나인이 빠르게 위아래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 진짜 저런 양아치 같은 년. 언제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렇게 사드나인은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 했다. 결코 고양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