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리그너스 대륙전기 061화
“모두 모인 것 같으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카리스마가 절로 느껴지는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록 가상현실이었지만 호 제국의 황제로서 많은 회의를 주도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호의 그런 새로운 모습에 처음으로 회의에 참가한 아스트리드 벨과 한시진이 살짝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분위기에 곧 적응하고는 회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현재 안테로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영지를 성장시켜 나갈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안건들이 나올 것이다. 특히 안테로리가 근시일 내에 리셴르나가 이끄는 수인들과 전쟁을 치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했다.
“냐앙. 먼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영웅은 리아 캬베데였다. 안테로리의 유일한 A등급 영웅으로, 호를 포함해 회의실에 모인 소환자와 영웅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영웅이었다.
“안테로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리셴르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수인족의 십이멀인 그녀는 마족으로 따지자면 볼 붸르니체스와 같은 상급 마족과 동일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하나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패자이기도 합니다.”
“리셴르나에 대한 이름은 우리 엘프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아주 탐욕스럽고 포악한 묘인족으로, 호시탐탐 붉은 핏빛의 대지를 노린다고 해요.”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장 먼저 수인족의 도발을 막아낼 병사, 그 병사의 수를 늘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아 캬베데는 품속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냈다. 그 지도에는 안테로리를 중심으로 바리안스의 대지와 그 주변 영지들의 위치가 표시돼 있었다.
“아시다시피 묘인족의 장로인 리셴르나는 바리안스의 대지를 지배하는 수인족의 상급 대장입니다. 냐앙.”
바리안스의 대지.
그곳은 수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으로, 안테로리가 있는 붉은 핏빛의 대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영토였다. 바리안스의 대지에는 총 다섯 개의 도시가 존재했는데, A등급 영지이자 C등급 마장기 두 대를 보유하고 있는 아트리그 또한 그중 하나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냐앙. 우리의 전력으로 리셴르나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리셴르나의 모든 전력은 고사하고, 그녀가 보유한 영지 중 하나인 아트리그만 해도 우리 안테로리보다 전력이 높은 상황입니다.”
리아 캬베데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아트리그는 A, B랭크의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C등급 마장기까지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하물며 그 아트리그를 제외한 리셴르나의 다른 도시에는 얼마만큼의 병력과 마장기가 있는지 정확히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키마라이가 있잖아요?”
시현의 물음에 리아 캬베데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달랑 한 대 있는 거? 리셴르나가 자신의 전력을 총동원하면 최소 세 개의 편대, 그러니까 열다섯 대 이상의 마장기를 동원할 수 있을걸? 냐앙.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리 B등급 마장기가 있다고 해도, 마장기 하나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법이지. 냥.”
“…….”
너무나도 당연한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안테로리의 전력은 약 육천 명 정도. 하지만 리셴르나의 세력은 아트리그 하나만 해도 주둔해 있는 병사가 만 명이 넘었다.
결국 현재의 전력으로 리셴르나를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맞아요.”
“당장은 영지의 군사력을 끌어올리는데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을 마치며 리아 캬베데가 자리에 앉자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민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한 달간 얼마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죠?”
“기병은 양성할 수 있나요?”
“기병과 관련해서는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어요. 현재 안테로리는 엘프족의 보병과 관련된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새롭게 회의에 참여한 시진과 벨은 조금이라도 더 영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영웅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호 역시 영지의 군사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리셴르나의 말에는 찬성이었다. 다만 군사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미사일로 먼 거리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현대의 전쟁이라면 또 모를까, 외향적으로는 중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이 세계에서는 머릿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랭크의 차이도 쉽게 여길 수 없었다.
결국 양 혹은 질의 선택이었다. 안타깝게도 안테로리의 능력으로는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건 불가능했다.
호는 이 선택에 대한 답을 이미 내려놓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의 경험상 많은 계란을 바위에 던져대는 것보다 하나의 계란을 바위보다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양보다는 질.’
수적 우위만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리셴르나를 이길 수 없었다. 안테로리의 생산력이 바리안스의 대지에 존재하는 수인들의 다섯 영지에서 나오는 생산력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질로 승부를 본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리셴르나가 보유하고 있는 병사들은 전부 A, B랭크의 병종이었다. 그에 반해 현재 안테로리의 주 전력은 C랭크에 불과했다.
결국 리셴르나는 자신과 비교해 군대의 질과 양 모두 우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안테로리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가 포함된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 때문이었다.
‘볼 붸르니체스.’
호는 심연의 미노타우르스라는 별명을 지닌 근육질의 황소 한 마리를 떠올렸다. 머리 양쪽에 운동선수의 허벅지보다도 더 두꺼운 뿔과 헬로나이움보다 단단한 피부를 보유한 검은색의 미노타우르스 영웅.
그는 호가 이 세계에서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게임 속에서는 몇 번이나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 영웅이었다. 그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안테로리의 안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일 년 동안 그의 군대가 주둔했던 사실 때문에 리셴르나는 안테로리가 볼 붸르니체스 휘하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안테로리를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안테로리와 볼 붸르니체스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그 사실은 최후의 최후까지 비밀로 감춰야만 했다. 만약 안테로리의 진실이 리셴르나의 귀에 들어가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녀가 이끄는 군대가 안테로리의 경계를 넘을 터였다.
어쨌든, 만일 지금 당장 리셴르나가 안테로리를 공격한다고 하면 도움이 될 만한 영지는 커티삭밖에 없었다. 그런데 커티삭의 발전도를 생각해보면 있으나마나한 도움이었다.
결국 리셴르나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적어도 그녀가 이끄는 군대와 대등하게 전투를 펼칠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하고, 기상천외한 전략을 이용해 전황을 풀어나가야만 했다.
‘나에게는 수많은 유저들이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든, 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병력 구성 방법과 전략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가 이미 리그너스 대륙전기라 불리는, 이 세계와 너무나도 똑같은 가상현실 게임에서 대륙을 통일했던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
그때 호의 시선이 시진에게 향했다. 마장기를 보유한 세력끼리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장기전. 그것을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호는 키마라이의 오너로 한시진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어…?’
그렇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호는 리아 캬베데가 펼쳐 놓은 지도를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리안스의 대지 아래쪽에 희미하게 그려진 새로운 지형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수인족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리아 캬베데의 의도였는지, 거기에는 바리안스의 대지와는 다른 옅은 검은색이 칠해져 있었다.
“리아 캬베데. 저 영지는 어느 종족의 영지지?”
“냥? 아, 어. 드워프족입니다.”
“드워프?”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가 흙을 빚어 만들어 낸 종족이라고 알려진 드워프는 130~140cm의 단신이었다. 그들은 단단한 몸집에 체력이 강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종족이었다. 그리고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설정으로 인해 드워프의 마장기는 전 종족의 마장기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났고, 많은 유저들이 눈이 호강했다고 감탄을 터뜨릴 정도로 멋진 외형을 자랑했다.
게다가 드워프 병사들은 전 병종을 가리지 않고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높은 방어력과 무시무시한 전투 지속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짧은 다리 때문에 이동 속도가 느렸고, 마법에 취약하다는 큰 단점도 있었다.
‘뭐, 그것도 드워프 성애자 게이머들로 인해 극복 방법이 나타나긴 했지만.’
바로 엘프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인 리플렉스 마법을 아이템에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방어 아이템을 만들어 드워프 병사들에게 장비를 착용시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방법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유저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의 관계는 마족과 천족의 관계 못지않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유저만이 두 종족을 함께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리플렉스 마법 또한 상당히 고위급에 속하는 마법이었다.
“흐음.”
호는 지도에 나와 있는 드워프의 영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드워프의 영토는 바리안스의 대지 남쪽 전부와 경계를 맞대고 있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왠지 이것을 이용하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을 이용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단을 통해 정보를 알아봐야겠군.’
드워프의 영지까지 첩보원을 보낼 수는 없었다. 첩보원이 리셴르나의 영토를 무사히 통과하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가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소환자와 영웅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호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현재 진행 중인 병사들의 훈련은 사드나인이 맡도록 하세요.”
“멍? 알겠습니다.”
의외의 명령이기 때문일까? 사드나인이 화들짝 놀라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병사들의 훈련은 사드나인보다도 더욱 효율적으로 시킬 수 있는 영웅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병사들의 훈련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을 맡겨야 했다.
“당장 양성할 병종은 정예 실리스. 사드나인은 정예 실리스의 숫자를 사천까지 맞춘 후, 바로 엘프 보병의 훈련에 들어가세요.”
“멍……? 엘프 보병이요?"
호의 명령에 사드나인이 다시 한 번 놀라며 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호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고작 F랭크로 아이스 스파토이보다 랭크가 훨씬 떨어지는 엘프 보병을 양성하라고 명령하니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이건 안테로리의 영주가 내린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리아 캬베데는 현재 진행 중인 신성한 목재의 연구가 끝나면 고급 목공술 연구를 시작하세요. 그 후 바로 정예 엘프 보병과 엘븐 나이트 연구에 들어가세요.”
“네에…….”
사드나인과 마찬가지로 리아 캬베데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수인인 그녀에게 엘프와 관련된 연구 기술을 개발하라니, 본능적으로 저항감이 생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