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리그너스 대륙전기 059화
아스트리드 벨의 능력치를 확인한 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어쨌든 한시진만큼이나 벨은 지금의 자신에게는 놓칠 수 없는 인재였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모두 안테로리로 떠난다면 그녀는 이 세계에서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많이 했죠. 엄청나게요. 누군가가 일을 전부 떠넘겨주고 일 년 동안 어디론가 떠나버린 바람에요.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피부도 엉망이라고요.”
아스트리드 벨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댔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여섯 시간은 주무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커티삭으로 완전히 돌아오신 건가요?”
“아뇨. 그 반대예요.”
“그 반대?”
“네. 벨 님께서 저와 함께 안테로리로 가셔야 합니다.”
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유혹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호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뭐라 반응하지 못했다. 한시진과 함께 커티삭에서 지내는 동안 언젠가는 마족들의 영역에서 떠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오자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 얘기 정말로……?”
“아스트리드! 여기 있어?!”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벨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노크도 없이 들어온 여인은 바로 커티삭의 B등급 영웅 멜리아 비쉬였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녀는 방 안에 호가 있는 것도 모른 채 아스트리드 벨을 향해 소리를 쳤다.
“빨리 돈을 줘! 환락가를 더 늘려야 한다고!”
“하, 하지만 멜리아 비쉬 님. 현재 커티삭의 자금으로는 환락가를 늘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 개 이상은 줄여야 할 판국이라고요.”
“크으! 이번 달에는 안테로리에서 돈이 들어오잖아? 저번에는 그걸로 지을 수 있다면서?!”
“페릴 예노스 님이 군사를 늘리시는 바람에 병사들의 유지비가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그 바람에 어떻게 할 도리가…….”
“꺄아아아! 안 돼! 안 된다고! 내 꿈이!”
벨의 대답에 멜리아 비쉬가 좌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
그때 어정쩡한 모습으로 집무실 한구석에 서 있는 호의 모습이 멜리아 비쉬의 눈에 들어왔다.
“네가 왜 여기……?!”
멜리아 비쉬가 호를 향해 물으려던 찰나, 벼락같이 하나의 사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테로리. 커티삭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영지였다. 그리고 그런 안테로리의 주인이 바로 윤호였다.
“오랜만이네요? 정말 반가워요. 우리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요?”
흘러내린 외알 안경을 위로 고쳐 쓰며 멜리아 비쉬가 호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고, 갑작스레 태도가 변한 그녀의 모습에 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왜 가만히 있어요?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니까요?”
서큐버스, 멜리아 비쉬의 은근한 유혹에 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 아스트리드 벨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술 더 떠 그녀는 입으로 한시진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손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다행히 호는 멜리아 비쉬가 어떤 목적으로 집무실에 찾아왔는지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바로 돈 때문이었다.
“환락가를 증축시킬 자금이 필요하신 거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호는 멜리아 비쉬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그녀가 원하는 것을 꺼냈다. 환락가를 증축시키는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경험을 통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삼만 리스 이내일 터였다.
“오?!”
단숨에 자신이 원하던 말이 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멜리아 비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 흐흐흥! 역시 부자 영지의 주인답네요. 쪼잔한 누군가와는 다르게 통이 아주 커.”
“제가 쪼잔한 게 아니라 이 영지의 수입이 적은 거뿐이라고요.”
하지만 가볍게 벨의 대답을 무시한 멜리아는 호를 향해 살짝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그러면 원하던 것도 달성했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요.”
“환락가 증축에 관한 건설 자금은 안테로리로 돌아가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능력이 좋으신 우리 호 씨.”
호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낸 멜리아 비쉬는 곧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하아.”
그렇게 멜리아 비쉬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두 남녀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 같네요. 매번 저럽니까?”
“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것 같아요. 누가 서큐버스 아니랄까봐. 정말 환락가의 건축에 목숨을 걸었다니까요.”
그 후의 이야기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호는 아스트리드 벨에게 안테로리로 함께 가자고 말했고, 그녀는 순순히 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테로리에서도 대부분 영지와 관련된 업무를 맡길 생각입니다.”
“걱정 마요. 영지의 내정이라면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니까요.”
하지만 그녀 또한 한시진과 마찬가지로 커티삭의 업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인계를 해야 했기에 바로 커티삭을 떠날 수는 없었다.
“후. 이 두 명이 합류하고 나면 앞으로의 일이 좀 편해지겠는걸?”
벨의 집무실에서 나오며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시진과 아스트리드 벨까지 안테로리로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품속에서 만져지는 열쇠까지. 이번 커티삭 행은 얻은 게 많은 방문이었다.
“안테로리에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겠어.”
앞으로 안테로리는 S등급의 수인 영웅 리셴르나와 영지의 존폐를 걸고 한 판 싸움을 벌어야만 했다.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리셴르나가 안테로리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리셴르나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B등급 마장기가 있다 해도 전력의 차이가 극심했다. 고작 안테로리라는 영지 하나만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비해 리셴르나는 바리안스의 대지라는 커다란 영토의 모든 도시를 다스리는 수인족의 상급 대장이었다.
‘준비는 철저히 해야 돼.’
어느 정도 맞상대를 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 훗날까지 대비하며 전력을 꾸려야만 했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그런 만큼 안테로리를 지금보다도 훨씬 많이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허어어억?!”
그때 바로 뒤에서 들려온 여인의 속삭임에 호는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노란색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그 격렬한 호의 반응에 곧 모습을 드러낸 여인이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아! 멜리아 비쉬 님!”
호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멜리아 비쉬가 듣기 싫다는 듯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다크엘프들은 좋아라만 하던데?”
“전 다크엘프가 아닙니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사는 존재들이니 이런 멜리아 비쉬 님의 장난을 즐기겠지만 저는 하아……. 그런데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환락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지.”
“환락가의 증축 자금에 대해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나요?”
“좀 더 확답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아스트리드 벨 고년이…….”
멜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힐끔 벨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일 년간 영지의 자금 집행을 두고 꽤난 티격태격한 모양이었다.
“후우. 인간 여자애가 어찌나 그리 깐깐한지.”
“원래의 세계에서는 한 제국의 공주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돈에 관해 더욱 민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죠.”
“제국의 공주라면 돈을 더 펑펑 쓰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어쨌든 환락가 증축 자금, 정말로 주는 거겠지?”
“물론이죠.”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환락가 증축에 대해 목숨을 거는 그녀의 모습에 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서큐버스라는 종족의 특성 때문인가 싶었지만, 같은 서큐버스인 페릴 예노스는 환락가보다 피가 난무하는 전장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아마 개개인의 특성 때문인 것 같았다.
“환락가 증축 자금은 제가 안테로리로 돌아가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공사자금이 필요한 겁니까? 벨에게 정확한 내용까진 듣지 못했거든요.”
말이 나온 김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을 생각으로 호가 이야기를 꺼냈다.
“걔는 환락가 증축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니까. 정말 쾌락의 중요성을 몰라요. 이래서 인간들이란…… 쯧쯧. 어쨌든 4만 리스 정도?”
“4만 리스라…….”
중도시인 안테로리의 한 달 수입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인 만큼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특산품인 가젯 의복을 판매하며 얻을 수 있는 자금과 성의 여유자금을 생각해보면 돈을 융통하는 데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대충 계산을 마치자 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충분히 보내드릴 수 있는 돈입니다. 자금 마련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역시, 안테로리의 영주. 통이 커서 마음에 들어. 역시 너 같은 소환자가 커티삭의 재정을 맡아야 하는데.”
다시 한 번 멜리아 비쉬가 활짝 웃었다. 서큐버스. 엘프 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눈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자 호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 순간이었다.
띵동.
‘어라?’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종소리가 호의 귀에 들려왔다.
-‘멜리아 비쉬의 마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서큐버스 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쉬’ 가문 출신인 멜리아 비쉬는 어릴 때부터 서큐버스가 추구하는 욕망 중 하나인 쾌락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멜리아 비쉬는 쾌락과 즐거움이 가득한 낙원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멜리아 비쉬의 꿈을 이뤄주면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지 내에 환락가 건설하기 - 0%
소규모 환락가 건설하기 – 0%
전설적인 환락가 건설하기 - 0%
카지노가 포함된 환락의 대도시를 건설하기 – 0%]
‘이게 무슨?!’
순간 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아무리 게임과 흡사한 세계라 해도 이런 것까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도 아니고…….”
호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고 흘러나왔다. 새롭게 등장한 퀘스트는 여성 캐릭터의 공략과 같은 성질의 퀘스트였다. 오더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 세력의 영웅을 자신의 휘하로 등용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이긴 했지만, 퀘스트를 달성하는 게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런 퀘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큼은 큰 수확이었다. 멜리아 비쉬는 아니더라도 훗날 SSS등급의 영웅들 또한 이런 방식으로 공략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