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리그너스 대륙전기 058화
“대장님은 안 즐기십니까?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은 어둠의 진리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예쁘장한 미모의 다크엘프 하나가 한시진에게 물었다. 그녀는 오늘 밤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오크들과 술을 한 잔 하기로 약속을 잡은 후였다. 덕분에 다들 제각각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우리 대장님은 너무 건조해서 안 돼. 보면 몰라? 인간들은 우리랑 다르다고.”
“너 환락가에는 가봤어? 거기에 꽤 재미있는 소환자가 있다고 하던데?”
“난 가봤어. 오크가 아닌 수인도 있다는 말에 가보긴 했는데 굉장히 비싸더라고. 어디서 붙잡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피부의 인간들도 있더라고. 뭐, 물론 우리 대장님께서는…….”
“우리 대장님은 환락가가 뭔지도 모르실걸? 호호호.”
자신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 이어지는 다크엘프들의 이야기에 시진은 이마에 난 혈관을 꾹꾹 눌러댔다. 이게 마족의 텃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크엘프들의 말에 악의는 없다는 걸 알고는 포기한 참이었다. 그래도 울컥하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애인은 있다. 그리고 인간은 너희들처럼 매일 남자를 갈아치우지는 않아.”
감정을 애써 누르며 태연히 말을 내뱉은 시진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매주 두 번 꼬박 편지로 서로의 애정도 확인하고 있었다. 또한…….
한시진의 시선이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가 머무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현재 영주성에는 안테로리의 영주와 그 일행이 찾아온 상황이었다. 바로 자신의 애인 윤호와 동생 시현이었다.
“네에네에~ 대장님의 애인이라면 안테로리의 영주님이신 윤호 님?”
“에이, 참. 대장님도 거짓말을 하시려면 그럴 듯하게 하셔야죠.”
“호 님이 얼마나 인기가 많으신데요. 하지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꽃이죠. 대장님의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사실을 말해도 전혀 믿으려 들지 않는 다크엘프들을 보며 시진은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는 울화통에 뒤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크엘프들의 수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아……. 빌어먹을.”
계속해서 들려오는 그녀들의 놀림에 잠시 울컥한 한시진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볼 때였다.
“어?!”
“히…… 히이익!?”
“뭐야?!”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눈이 몽롱하게 풀리는 다크엘프들의 모습에 버럭 화를 내려던 시진은 어색하고 민망한 느낌과 함께 다시 앞을 바라봤다.
“어어?!”
그때 누군가를 발견한 시진의 입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14~15세쯤 되어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와 남자 하나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일 년 만에 만나는 친동생 시현과 자신의 애인 윤호였다.
* * *
“커티삭의 치안 대장이라……. 다크엘프하고도 꽤 재미있게 놀고 있던데?”
“으으응.”
장난기가 섞인 호의 목소리에 한시진은 얼굴을 붉히며 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치안대장 인계는 얼마나 걸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오빠. 이제 진짜 시현이랑 오빠랑 함께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애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며 묻는 한시진의 모습에 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평생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나 싶었어요.”
호는 말꼬리를 흐리는 한시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매번 주고받던 편지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걱정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한시진
2. 성별 : 여(23)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30
6. 직업 : 숙련 검사(E)
7. 세부능력
통솔 : 10 / 10(F)
무력 : 30 / 30(E)
지력 : 30 / 30(E)
정치 : 10 / 10(F)
매력 : 10 / 10(F)
카리스마 : 30 / 50(D)
8. 특성 : 화랑의 정신
9. 스킬
<임전무퇴> S랭크.
전쟁터에 나가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고 용감히 싸우라는 화랑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효과 :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대가 물러서지 않으며 피해를 입더라도 병사 수에 따른 부대의 공격력 및 방어력의 패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휘하는 부대는 패닉 상태 및 어떠한 해로운 효과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전투 중 병사 수가 10%씩 감소할 때마다 부대의 공격력, 방어력이 10%씩 증가합니다.
‘숙련 검사라.’
예상했던 대로 일 년 동안 그녀의 능력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기껏해야 E등급의 클래스를 획득했을 뿐이었다. 안테로리에서 분주하게 활동한 시현보다도 성장폭이 적었다.
하지만 호는 실망감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그녀를 도우면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한시진의 능력을 보아하니 아스트리드 벨 또한 그녀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둘 다 안테로리에서 성장시켜야겠군.’
그래도 S랭크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무력 수치에 비해 뛰어난 검술 실력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시진은 조금만 성장시켜도 웬만한 D등급 영웅보다도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일 것이다. 게다가 승급에 특수한 아이템이 필요한 이 세계의 영웅들과는 달리 소환자들은 조건만 만족한다면 직업 등급을 높일 수 있었다.
빤히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시진이 고개를 살짝 내밀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말에 얼굴이 화악 붉어지더니 가슴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행동에 호는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에 봤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앞으로는 자신과 함께할 여인이기도 했다.
“안테로리는 커티삭보다 훨씬 위험할 거야. 수인들이 영지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거든.”
“어떻게든 싸울 거예요. 동생과 그리고 오빠가 있는 곳이잖아요.”
시진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또한 영문도 모르게 떨어진 이 세계에서 우리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라고요.”
“……그렇지.”
그런 시진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머무를 수 있는 보금자리. 그게 안테로리였다. 안테로리에서 만큼은 안전했다. 누군가 안테로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리셴르나.’
수인족의 십이멀이자 상급 대장인 묘인족의 영웅을 떠올리며 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시진은 커티삭에서 맡았던 치안대장 직을 인계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호와 일행이 안테로리로 돌아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는 만큼 급할 건 없었지만, 전직 군인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아쉬워하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며 일찍 자리를 뜬 것이다. 덕분에 호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만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이쪽인가?”
일 년여 만에 찾은 커티삭의 영주성은 어제 왔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가 조금 바뀐 것인지 처음 보는 복도들과 방이 꽤 많았다.
그때 금발에 갈색머리를 귀밑까지 기른 다크엘프 하나가 호의 눈에 들어왔다.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영주성의 시녀인 것 같았다.
“말 좀 묻지.”
“네? 네.”
갑작스러운 호의 등장에 조금 놀란 기색을 띠던 다크엘프는 곧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호를 맞이했다.
“아스트리드 벨의 집무실이 어디지?”
“영지의 재정 관리를 맡고 계신 벨 님이시라면 저기 보이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신 후, 오른쪽으로 세 번째 방입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까요?”
“아니, 혼자 가도록 하지.”
다크엘프의 말에 호는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쉬운 탄성이 들려오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다크엘프와 같은 미녀가 자신의 눈에 들려는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문득 현실 세계에서 애인이었던 혜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시간이 너무나 힘들고 길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이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살짝 두드리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화처럼 서류더미를 책상 한 귀퉁이에 쌓아 놓고 펜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식사면 거기에 놓고 가도록 하세요.”
굉장히 바쁜 모양인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집중하는 아스트리드 벨을 보며 호는 훗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호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낀 아스트리드 벨이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아……?”
못 보던 사이에 시력이 나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멜리아 비쉬를 연상케 하는 외알 안경을 쓴 아스트리드 벨의 표정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변해갔다.
“오랜만에 보니 꽤 반갑네요?”
호는 미소를 지었다. 시진과는 다르게 아스트리드 벨과는 간단히 몇 번 편지를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그것도 대부분이 영지의 업무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반기는 표정을 보니 호는 좀 더 그녀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또한 충분히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오랜만이네요. 화랑기사의 애인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뭐,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보시다시피.”
그렇게 말하며 아스트리드 벨은 눈짓으로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가리켰다. 호는 그것이 잘 지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말이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한참 뒤에 나온 자신의 대답에 아스트리드 벨이 서늘한 눈빛을 하자, 호는 뭔가 차가운 것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영지의 모든 일을 맡겨두고 안테로리로 떠난 것에 대해 원망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아스트리드 벨
2. 성별 : 여(24)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50
6. 직업 : 스콰이어(D)
7. 세부능력
통솔 : 18 / 30(E)
무력 : 10 / 30(E)
지력 : 37 / 50(D)
정치 : 72 / 100(C)
매력 : 32 / 50(D)
8. 특성 : 금전출납
9. 스킬
<일해라, 노예들아!> C랭크.
스콰이어는 일반 평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굉장히 높은 계급입니다. 그들은 영지민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세금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신분제인 이 사회에서 영주의 명령을 대신 전해주는 스콰이어의 명령은 힘이 없는 영지민에게는 절대적입니다.
-효과 : 한 달간 영지민의 생산성이 10% 상승합니다. 영지민의 불만도가 소폭 증가합니다.
“……고생 좀 하셨겠네요.”
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콰이어. 내정과 관련된 클래스인 모양인지 내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에 보너스가 부가되어 있었다. 아스트리드 벨의 성향을 생각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커티삭에서 오로지 내정관리만을 통해 저만큼의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것은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편히 잠을 잔 날이 손에 꼽을 터였다.
“…….”
거기까지 생각을 하니 그녀가 어째서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봤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