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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57화 (5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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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57화

“취익! 췩!”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호는 실망스러운 감정을 숨기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돼지 한 마리가 보였다. 오크였다.

“취익! 췩! 페릴 예노스 각하께서 취익! 찾으십니다!”

“가자. 시현아.”

“네, 오빠.”

호의 말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당장이라도 언니를 찾아가 회포를 풀고 싶었다. 안테로리에서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이미 언니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순서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 남녀는 오크의 안내를 받아 페릴 예노스의 집무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로군.”

집무실에 들어선 두 남녀를 향해 한 서큐버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말에 호가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페릴 예노스. 그녀는 만마의 지배자라 불리는 마왕 쉐르난비체의 명령에 의해 선택의 제단으로 끌려온 소환자들을 맡은 마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환자들에게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설명해주고, 어떻게 살아갈지 알려주는 보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소환자들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뭘 교육한다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닌 방임주의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쉐르난비체가 어떤 의도로 페릴 예노스에게 소환자들을 맡겼는지 그 이유는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호는 그런 쉐르난비체의 결정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후후. 그렇네?”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온 호를 보며 페릴 예노스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예전의 모습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었다. 몸에서 풍기는 느낌만 봐도 그랬다.

‘쉐르난비체 폐하의 선택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페릴 예노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안테로리의 영주인 윤호. 처음에는 단순한 소환자에 불과했지만 자신을 보좌하며 재정난에 빠져 있던 커티삭을 크게 발전시켰고, 리아 캬베데라는 수인이 대장으로 있는 영지 하나를 빼앗는데도 큰 공헌을 했었다.

그리고 현재는 수인들의 영지였던 안테로리를 중급 도시로까지 발전시키며 마족 사회에 조그마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을 터였다.

페릴 예노스가 빙그레 웃으며 하나의 물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폐하의 하사품이다.”

‘하사품? 뭐지?’

페릴 예노스의 말에 호는 그녀가 내민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담긴 붉은색의 열쇠였다.

“어…?”

하지만 열쇠의 형태가 어디선가 본 것처럼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잠시 후 호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어째서?!’

페릴 예노스가 자신을 커티삭까지 부른 것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왕 쉐르난비체가 자신에게 하사품을 선사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뿐더러, 눈앞의 물건은 자신의 예상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물건이었다.

[키마라이의 핏빛 열쇠(S등급 유니크)

효과 - 키마라이 소환(마족 전용)

전장 13M, 무게 약 19톤, 헬로나이움이라는 단단한 마계의 금속을 장갑으로 만든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를 소환하는 열쇠입니다. 키마라이는 마족에 소속된 B등급 클래스 이상의 영웅만이 탑승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이미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공략해 본 까닭에 호는 마장기가 이 세계에서 얼마나 대단한 병기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기의 마장기는 일반 병사 수백, 수천보다도 더욱 값어치가 있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안테로리를 굳건하게 지켜주다가 떠나간 나자르 T 스테르의 키마라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것만 있으면.’

호의 머릿속으로 여러 상상이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한 기의 마장기만 있다면 좀 더 쉽게 그리고 빠르게 이 세계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호는 마왕 쉐르난비체가 자신에게 내려줬다는 하사품인 핏빛 열쇠를 선뜻 손에 쥐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물건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있지만, 갑작스레 이제까지 소환자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마왕이 마장기, 그것도 마족의 주력 병기인 B등급 마장기를 자신에게 하사하다는 게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받고는 싶다.’

열쇠를 바라보는 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의 값어치는 엄청났다. C등급도 아닌 무려 B등급이었다.

하지만 덥석 받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독이 든 성배를 보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그때 열쇠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호의 모습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페릴 예노스는 또 하나의 물건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고급스러운 자수로 묶여 있는 붉은색 양피지였다. 양피지 가운데에는 푸른색 빛을 발하는 신비로운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키마라이의 핏빛 열쇠와 함께 위대하신 만마의 제왕 쉐르난비체 폐하가 너에게 하사하신 문서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페릴 예노스의 말에 호는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펼쳐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상한 언어로 쓰여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읽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굉장히 긴 내용이었지만, 줄여 말하자면 소환자로 놀라운 활약을 보이는 자신에게 키마라이 하나를 하사하며, 이것을 이용해 마족의 영광을 대륙 전체에 펼치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키마라이를 사용해 이 주변의 엘프와 수인들을 처리하라는 거군.’

현재 자신의 영지인 안테로리는 엘프와 수인 이렇게 두 종족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었다. 엘프의 영지는 크리솔라이트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퀘스트로 인해 지금 당장은 건드릴 수 없었다.

설령 퀘스트를 무시하고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의 땅을 전부 차지하더라도 중앙으로 진출을 하기 위해서는 엘프들이 마족의 준동을 막기 위해 건설한 요새 토갈론을 점령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요새에 마장기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또한 안테로리는 ‘바리안스의 대지’라는 이름의 영토와도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바리안스의 대지는 모든 영지를 수인들이 차지한 영토로, 수인족의 상급 대장인 S등급의 영웅 리셴르나가 다스리는 땅이기도 했다. 묘인족인 그녀는 수인족의 십이멀이라 불리며, 인간으로 치자면 변경백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영웅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력을 지닌 영웅이었다. 바리안스의 대지에 있는 그녀의 영지 중 하나인 아트리그만 하더라도 대도시급의 영지인데다가 C등급이지만 마장기가 두 기나 존재했다.

‘하필이면 걸려도…….’

엘프나 수인족 둘 다 마장기 하나가 생겼다고 해서 쉽사리 공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상황으로는 공략은커녕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전력이 허약한 영지들만 주위에 포진해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만마의 지배자가 호에게 내린 선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또한 위대하신 만마의 제왕 쉐르난비체 폐하께서는 그대에게 독자적인 작전권을 하사했다.”

“독자적인 작전권이라면?”

“그대도 나처럼 당당한 마족의 구성원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지. 이 ‘키마라이’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아!’

호는 탄성이 터져 나오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은 즉, 이제부터 자신은 페릴 예노스 휘하에 소속된 게 아닌 하나의 마족으로, 또한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페릴 예노스의 앞에서 그 기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는 마족의 일원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게다가 홀로 수인족의 도발을 막아낼 만한 깜냥도 없습니다.”

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릴 예노스의 코웃음이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안테로리를 그렇게나 발전시킨 네 녀석이? 게다가 아트리그의 도발도 제법 잘 막아내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후후. 너도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런 행동들이 인간들에게는 예의라고 들어 알고는 있지만, 마족들 앞에서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우리들은 자신만만한 녀석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 말에 대해서는 그만. 어차피 쉐르난비체 폐하가 내리신 명령. 너도 그리고 나도 거부할 수는 없다.”

“그 말씀은?”

“앞으로 너는 독립적인 작전권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마족으로 수인이나 엘프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이 키마라이를 앞세워서 말이지. 덕분에 나는 좀 편해졌다. 재미없게 편해졌지.”

페릴 예노스가 자그마한 한숨과 함께 자신의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재미없게 편해졌다라……?’

호는 그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안테로리는 수인족의 영토에 있는 도시 중 하나인 아트리그를 비롯해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 족의 두 영지 중 하나인 코르다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커티삭은 달랐다. 커티삭은 아멘드마를 제외하면 안테로리를 포함해 전부 마족들의 영지와 대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아멘드마를 공략할 일이 아니면 직접적으로 다른 종족과 티격태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피와 전쟁을 좋아하는 페릴 예노스에게는 심심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또한 돌아갈 때 시끄러운 두 여자도 데리고 가도록.”

“두 여자라면? 한시진과 아스트리드 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위대하신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폐하께서는 소환자들끼리 힘을 합쳐 수인과 엘프들을 상대해 보라고 하셨다.”

“알겠습니다.”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쉐르난비체는 소환자들의 능력에 대해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쩌면 가볍게 쓰고 버리는 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호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어쨌든 두 여인의 합류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여러 영웅들이 주둔하고 있는 안테로리지만, 영웅이라는 존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게다가 한시진과 아스트리드 벨은 호가 눈여겨본 여인들이기도 했다.

* * *

“취이익! 췩!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종족 특유의 거친 콧바람 소리를 내며 오크들이 호들갑을 떨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커티삭의 치안 대장을 맡고 있는 한시진은 그런 오크들의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과 대화를 나누고 인사를 받는 게 이제는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니, 익숙해졌다는 표현이 옳았다. 벌써 이 세계에 온 지 1년 반이 넘었다.

“자, 돌아가자.”

오크들을 도와주기 위해 한시진은 서른의 다크엘프로 이루어진 정예 실리스, 일명 어둠의 자매들을 이끌고 왔었다. 하지만 시진은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취익! 오늘 밤……?”

“호호호. 좋아요. 오크님들과의 만남이라니, 환영이죠.”

오크의 말에 다크엘프 하나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놓고 오크의 근육질 몸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오크와 다크엘프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시진은 딱히 다크엘프와 오크의 저런 모습에 대해 뭐라고 타박하지는 않았다. 마족. 이제까지 한시진이 봤던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솔직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도 그 누구보다도 충실한 종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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