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리그너스 대륙전기 056화
“냐앙! 호 님의 명령을 받아 수인들을 모두 물리치도록 하겠습니다.”
경례를 하는 리아 캬베데를 보며 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수인이 수인을 물리친다니, 왠지 모를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닭이 계란 후라이를 먹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럼 부탁한다.”
“최선을 다해 수인들을 막겠습니다. 냥!”
그렇게 리아 캬베데에게 지휘권을 넘겨준 호는 열 명 남짓한 정예 실리스들을 호위로 대동하고는 안테로리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정예 실리스들을 계속해서 양성하며 영지의 기술 개발과 엘프 보병 생산을 위한 기초 공사에 전력을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호가 안테로리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시현이 호의 집무실을 찾았다.
“오빠! 오빠! 편지가 왔어요.”
“편지……?”
“네. 커티삭에서 온 편지예요.”
시현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으며 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커티삭과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
“갑자기 왠 편지지?”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를 뜯어 내용을 살펴본 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편지의 내용물은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가 보낸 소환장이었다.
‘웬 소환장?’
어떠한 이유로 출석을 명령하는 문서인 소환장은 호에게 있어 어감이 좋은 느낌을 주는 단어는 아니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법원 등에서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 날아오는 것들이 소환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환장을 건네준 한시현은 싱글벙글 웃었다.
“왜 그렇게 좋아해?”
“당연히 좋죠, 오빠. 소환장이잖아요. 소환장을 받았는데 오빠는 왜 그렇게 심각해요? 안 좋아요?”
“아…… 아니. 조……좋지.”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한시현의 모습에 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소환장을 아주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는 초대장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시현과 자신은 패러럴 월드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소환장의 내용은 거창했다. 하지만 요점만 정리하자면 그냥 안 본 지 오래되었으니 커티삭에 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는 뉘앙스의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안 오면 크게 실망하겠다는 말도 덧붙여 있었으니, 실제로 안 가면 분명 어떤 불이익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밥만 먹고 가라는 것은 아니겠지.”
안테로리의 영주로 일 년이 넘게 커티삭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동안 페릴 예노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분명 뭔가 부르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타이밍이 조금 나쁘다는 생각이었다.
아트리그의 도발을 막기 위해서는 군사 관련 기술 연구에 계속해서 힘을 써야 했다. 강력한 병기인 마장기를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호는 아트리그와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적어도 B랭크, 아니 A랭크 병종 하나는 개발을 마치고 양성 체계까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금같이 할 일이 굉장히 많은 상황에서는 커티삭까지 다녀오는 시간도 아까웠다.
하지만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가 부르는 마당에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결국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커티삭을 방문하는 김에 한시진도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도 만나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편지는 매번 주고받았지만, 그녀들을 보지 못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녀들이 커티삭에서 어떻게 성장했을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도 기대가 되었다.
“빨리빨리 실으라고!”
“그건 저쪽이에요!”
커티삭으로 가기 위한 일행을 꾸리는 것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커티삭까지는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 자신의 주군이나 다름없는 페릴 예노스를 만나러 가는 길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의 영주관 앞 공터에는 짐을 실은 수레로 가득했다. 수레마다 리스들과 가젯 의복들이 선물로 실려 있었고, 던전 탐험으로 획득한 C등급 아이템도 덤으로 수레에 모셔져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에 만난 아르테미스 상단을 통해 페릴 예노스는 물론이고, 멜리아 비쉬와 한시진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에게 줄 선물도 준비를 했다.
“그럼 부탁한다.”
“네. 숲의 평화가 당신을 지켜주기를.”
“머엉!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엘 아르윈의 뒤를 이어 사드나인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뭐랄까, 딱히 신뢰가 되지는 않았다. E등급 영웅과 D등급 영웅이 영지를 발전시키고 기술을 개발해 봤자 얼마나 개발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아 캬베데는 경계 지대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있었고, 한시현은 이번 커티삭의 여정에 동행해야만 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커티삭으로 출발하기 전, 호는 안테로리에 남아 있는 두 영웅에게도 자신이 없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단히 일러두었다.
“와아아아!”
오랜만에 언니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시현은 출발하기 전부터 환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백 명의 정예 실리들과 이백의 아이스 스파토이를 대동한 호는 안테로리를 떠나 커티삭으로 향했다.
* * *
“흐응.”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검고 긴 머리카락이 한바탕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휘어감을 정도로 탐스러운 흑발을 지닌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붉은 루비처럼 고혹적인 빛을 내뿜는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멀리서 다가오는 여러 대의 수레를 발견하고는 붉은 입술 사이에서 혀를 살짝 내밀었다.
서른 대가 넘는 수레가 자신의 영토인 커티삭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는 말을 탄 두 명의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윤호.”
그중 오른쪽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는 그녀, 페릴 예노스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참으로 신기한 소환자였다. 다른 소환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이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 보였고, 적극적이었으며, 또한 다른 이들에 비해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다.
처음 페릴 예노스는 큰 기대 없이 안테로리의 영주로 호를 임명했었다. 커티삭의 내정을 맡겨본 결과 괜찮은 성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영지 자체를 다스리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더욱이 안테로리는 수인들의 영지. 피를 보지 않는 이상 마족의 영웅이 다스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는 빠르게 안테로리를 장악했고, 개척 도시에 불과했던 마을을 커티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영지로 발돋움시켰다. 거기다 지금은 리셴르나라는 수인족의 상급 대장을 상대로도 한 치의 밀림도 없이 국지전을 벌이고 있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본인은 모르고 있을 테지만 호는 그런 활약상과 볼 붸르니체스의 휘하에 있는 나자르 T 스테르로 인해 지금 많은 마족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기도 했다.
“칫!”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린 페릴 예노스가 자신의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다섯 개의 영토나 떨어진 마족 영지를 다스리는 상위 서큐버스 하나가 호가 마음에 든다며 많은 돈을 줄 테니 자신에게 보내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페릴 예노스는 단번에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만마의 제왕 쉐르난비체 폐하가 내려주신 선물을 헐값에 넘길 수는 없지.”
마족은 수천, 수만 년을 사는 존재. 그리고 그동안 마족들은 자신들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다른 종족들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중에는 대륙 전체가 휩싸일 정도로 큰 전쟁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은 주변 영지를 힘으로 빼앗아 손에 넣은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마족이 대규모 군세를 일으킬라 하면 낌새를 눈치챈 천족이나 인간을 중심으로 다른 종족들이 연합군을 이뤄 마족들을 상대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대 전쟁으로 인해 빼앗은 영지보다 빼앗긴 마족의 영지가 더욱 많은 상황이었다.
“다섯 번째 라그나로크가 일어날지도 몰라.”
신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라그나로크.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의 마족들에게 라그나로크는 마족과 빛의 연합군이 펼친 대 전쟁을 뜻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리그너스 대륙에서는 총 네 번의 라그나로크가 일어났다.
현재 위대하신 만마의 제왕 쉐르난비체는 창조신의 뜻을 부여받았다는 소환자라는 존재를 이용해 다시 한 번 대륙에 마의 뜻을 펼치고 싶어 했다. 이번에는 마족이 직접 야심을 드러내는 게 아닌 소환자라는 존재를 앞에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런 마족의 소환자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안테로리의 영주 윤호였다.
“설마 이것을 내려주실 줄이야…….”
페릴 예노스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는 붉은색의 열쇠를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열쇠는 예술작품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열쇠의 진정한 가치는 따로 있었다. 마족의 대 마장기 전용 이족 보행 병기이자 주력 병기로 사용되는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 이 열쇠는 그 키마라이를 작동시킬 수 있는 마력키였다.
소환자를 이용해 마의 뜻을 펼치려는 마왕 쉐르난비체는 소환자인 호에게 키마라이 한 대를 내려주며 그가 수인족의 상급 대장 중 하나인 리셴르나를 물리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페릴 예노스 또한 그런 호를 도와 리셴르나를 상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호를 바라보고 있던 페릴 예노스는 호가 말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우와! 드디어 도착했다!”
“와아…….”
페릴 예노스의 영주성에 도착한 두 남녀가 똑같은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탄성의 의미는 판이하게 달랐다. 시현이 오랜만에 커티삭에 도착했다는 감탄의 목소리였다면, 호는 자신이 떠난 일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커티삭의 모습에 대한 실망감을 내비쳤던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이 커티삭을 떠나기 전 지었던 건물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커티삭이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스트리드 벨이 있었을 텐데?’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가 지닌 능력에 비해 내정이 꽝인 영웅들이라고는 하지만 회계사로 전직한 아스트리드 벨이 커티삭에 있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조금이나마 커티삭을 발전시켰을 텐데, 겉으로 보이는 커티삭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였다.
“현상 유지만으로도 힘들었나?”
그런 의문을 가진 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안테로리에서 보내준 물자들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호는 크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안테로리에서 보내준 병사들이 커티삭의 성곽에 주둔하고 있었다. 더불어 많은 자금도 함께 보냈는데, 그것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환락가라 불리는, 누군가가 좋아할 법한 장소가 화려한 마나의 빛들로 가득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고 하던데…….”
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환락가는 자신이 커티삭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없던 건물이었다. 보아하니 안테로리의 돈이 환락가의 건설에 사용되었을 거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호는 절로 가슴이 쓰라려 왔다.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자신이 커티삭을 떠난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시진과 아스트리드 벨이라는 유능한 인재의 성장이 부진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