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리그너스 대륙전기 055화
“좌우로 흩어진다.”
호는 양쪽 귀 옆으로 삐죽삐죽한 나뭇가지를 두르고 온몸에 진흙을 바른 것도 모자라 얼굴에는 검은색의 물감으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뒤에 은신하고 있는 정예 실리스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호의 명령을 들은 실리스들이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
정예 실리스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호는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숨까지 멈추며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주변은 새 소리는커녕 벌레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수색전도 아니고…….’
수인. 정확히 말하자면 수인족의 S등급 영웅인 리셴르나 휘하에 있는 도시 아트리그의 병사들이 호의 상대였다.
그 때였다.
“끼깃?!”
고요한 수풀 속에서 검은색의 인영이 바람처럼 튀어 나왔다.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호가 신호를 내리기가 무섭게 인영이 있던 장소로 벼락같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파앙! 팟!
은신해 있던 정예 실리스들은 네 다리를 이용해 빠르게 지그재그로 전장을 내달리는 수인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 정예 실리스들의 상대는 끼깃거리는 특유의 울음소리를 가진 수인족의 원거리 계열 병사, 다람쥐 석궁수였다.
“다람쥐 주제에 업그레이드가 된 더럽게 강한 녀석.”
다람쥐 창병이 F랭크에 불과한 동네 밥 수준의 병사라면, 다람쥐 석궁수는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B랭크의 병종이었다. 빠른 이동 속도와 영리한 위치 선정 그리고 플레이트 메일도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석궁이라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다람쥐 석궁수는 수성전에서, 그리고 국지전에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내는 병사들이었다.
수인족의 F랭크 병종인 다람쥐 창병에 대한 이미지와 겉으로 보이는 귀여운 외모 때문에 다람쥐 석궁수를 우습게 생각했다가 큰 코를 다친 유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퇴로를 막아!”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는 다람쥐 석궁수들을 발견한 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열댓 명의 정예 실리스들이 바람처럼 내달리며 다람쥐 석궁수가 도망가려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는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끼이익! 끼깃!”
요리조리 쥐새끼같이 화살을 피하던 다람쥐 석궁수 하나가 실리스의 화살에 맞아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울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연이어 그 자리에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며 다람쥐 석궁수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퍼억!
“크억!”
비명 소리와 함께 한 명의 다크엘프가 머리에 구멍이 뚫려 쓰러졌다. 석궁의 강력한 파괴력을 보여주는 소리에 호는 등골이 오싹했다. 저건 제대로 맞으면 바로 사망이었다.
정예 실리스들은 다람쥐 석궁수들을 포위하며 몰이사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B랭크 병사답게 다람쥐 석궁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석궁을 장전할 수 있었고, 끼릭 하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는 어김없이 정예 실리스 한 명이 죽어나갔다.
‘진짜 피 말리네…….’
이런 사격전에서 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빠르게 전황을 파악해 정예 실리스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정예 실리스와 다람쥐 석궁수의 전투는 스나이퍼와 스나이퍼의 대결이었다. 두 발도 필요 없었다. 딱 한 방에 모든 것이 결정이 났다. 누가 먼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화살을 쏘느냐에 목숨이 걸려 있었다.
그 때문에 보병은 투입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스 스파토이조차도 제대로 석궁에 얻어맞으면 해골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정예 실리스들의 사격도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틈만 보이면 그대로 화살이 꽂혀들었다. 수인들도 그 사실을 아는지 다람쥐 석궁수를 제외한 다른 병종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카아아앗! 키킷!”
“적들에게 어둠을 선사하라!”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는 격화되고 있었다. 20 대 10의 전투로 시작되었던 것이 어느덧 이 자리에서만 이백 구의 시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포위된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람쥐 석궁수들이 계속해서 투입되었고, 그에 따라 정예 실리스들도 계속해서 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전쟁 군주로 전직할 수 있겠군. 이크!’
잠시 전직 조건의 달성 상황을 확인하던 호는 머리 위로 번쩍하고 지나가는 화살을 느끼며 손으로 땅바닥을 파며 몸을 숨겼다. 괜히 움직였다가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안테로리와 아트리그의 교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격화되고 있었다. 덕분에 하루가, 아니 반나절이 멀다하고 계속해서 전투가 일어났고, 많은 사상자들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호는 전쟁 군주의 가장 까다로운 전직 조건을 빠른 속도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호의 마음이 딱히 편한 것도 아니었다.
“꺄아악!”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예 실리스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보나마나 죽은 게 틀림없었다.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면 곤란한데….’
매번 이렇게 많은 수의 병사들이 죽어나가면 결국 손해를 보는 쪽은 자신들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아트리그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다람쥐 석궁수들이 영지의 접경 지역으로 배치가 되고 있었다.
안테로리도 계속해서 정예 실리스들을 양성해서 보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중도시인 안테로리와 대도시인 아트리그는 기본적으로 병력의 양성 속도에서 차이가 났다. 그렇다고 커티삭에서 정예 실리스를 양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람쥐 석궁수는 B 랭크, 정예 실리스는 C 랭크 병사에 불과했다.
그나마 정예 실리스들이 다람쥐 석궁수들을 상대로 잘 버티고 있는 것은 호의 통솔과 무력 수치의 영향을 받아 그 능력치가 뻥튀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모색해야겠는데.”
수인족의 도발도 어느 정도 잘 막아내고 있었고, 곧 있으면 전쟁 군주로도 전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결국 아트리그의 병력 양성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너질 터였다.
* * *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윤호
2. 성별 : 남(28)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50
6. 직업 : 전쟁 군주(C)
7. 세부능력
통솔 : 150(+10) / 200(+10)(B)
무력 : 150(+10) / 200(+10)(B)
지력 : 70(+5) / 200(+5)(B)
정치 : 50 / 100(C)
매력 : 60 / 100(C)
8. 특성 : 부대 강화, 통솔 상승(소), 사기의 외침, 호위병 소환.
9. 스킬 :
<침착하라!> D랭크.
많은 전투를 경험한 상급 사관은 다양한 악조건 속에서도 부대의 병사들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효과 : 병사들이 혼란 및 이상 상태에서 쉽게 빠져나옵니다. 또한 부대의 공격력을 10% 상승시킵니다.
<지휘관의 독려> B+랭크.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인 전쟁 군주는 자신의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의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효과 : 휘하에 있는 모든 병종의 공격력, 방어력 수치가 4 상승합니다.
“좋아.”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정보창을 확인하며 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 수 없는 희열감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탈을 쓴 이 이상한 세계로 끌려온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은 지금, 드디어 C등급 클래스인 전쟁 군주로 전직한 것이다.
D등급 클래스인 상급 사관으로 전직하고 전쟁 군주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레어 혹은 스페셜 클래스답게 전쟁 군주의 능력은 그 시간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역시 참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니까.”
전쟁 군주는 C등급 클래스에 불과하면서도 B등급에 가까운 능력을 보이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리그너스 대륙전기에는 전쟁 군주와 같은 특수한 직업들이 여럿 존재했다.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일반 클래스와 비교해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특수 직업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부 유저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였다.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언제나 게임 속에서 자신이 특별하기를 원했고, 그런 욕구는 곧 좋은 장비나 특별한 직업으로 나타났다. 이는 온라인 게임뿐 아니라 싱글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특히나 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는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다른 게이머와 차별된 모습을 보이려는 욕구가 더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특이한 인간들도 굉장히 많았는데.”
호는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게임 게시판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던 다양한 스크린 샷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게이머들은 1등급 마장기나 특별한 조건을 만족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유니크한 클래스, 쉽게 얻을 수 없는 아름다운 영웅을 동료로 삼았다는 것을 자랑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해내곤 했다. 전쟁 군주 역시 그런 게이머들의 욕구가 발견해 낸 스페셜 클래스 중 하나였다.
“C등급 클래스라고 해도 스페셜 클래스는 역시 다르단 말이지.”
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C등급 클래스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쟁 군주가 보여주는 한계치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전쟁 군주는 정치와 매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을 B랭크의 한계까지 상승시킬 수 있었다.
이는 C등급 클래스를 뛰어넘어 B 아니 B–등급의 클래스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새롭게 배운 지휘관의 독려 역시 굉장히 유용했다. 더욱이 지휘관의 독려는 자신이 직접 스킬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잠시 후, 경험치를 이용해 능력치의 배분을 끝낸 호는 자신의 정보창을 닫았다.
“마음 같아서는 세부 능력을 더 높이고 싶지만 고수는 실력의 삼 할을 감춰 둔다고 했어.”
호는 자신이 보유한 모든 경험치를 능력으로 바꾸지 않았다. 혹시 모를 위기 상황을 대비해 유동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높일 생각으로 약간의 경험치를 남겨 놓은 것이다.
어쨌든 전쟁 군주로 전직한 이상 계속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이 경계 지대에서 더 이상 몸을 담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전장에 찾아온 이유는 전부 전쟁 군주로의 전직을 위해서였다.
“리아 캬베데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아트리그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이 지역의 수비는 리아 캬베데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한시현은 여기서 하루도 버티지 못할 테고, 이는 사드나인과 엘 아르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믿을 만한 영웅은 리아 캬베데밖에 없었다.
적어도 A등급 영웅인 그녀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C랭크와 B랭크라는 병종의 격차를 어떻게든 줄여나가며 전투를 소강상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호의 연락을 받은 리아 캬베데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전투 지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