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리그너스 대륙전기 053화
‘조만간 커티삭에도 한 번 다녀와야겠군.’
그녀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없는 커티삭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커티삭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테로리의 영주가 된 지도 벌써 수개월 째, 이 세계에 도착한 지도 어느 덧 1 년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로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사드나인. 마력 회로진의 연구가 끝나면 곧바로 ‘미노타우르스 뿔의 강화’ 연구에 들어간다.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계산해서 나한테 제출하도록.”
“네. 멍멍!”
사드나인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 개발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테지만, 이러한 기술 개발 및 연구는 영지를 발전시키고 높은 랭크의 병종을 양성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행위였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 뿔의 강화 연구를 마치게 되면 안테로리의 궁병 계통 병사인 실리스들도 아이스 스파토이와 동급인 C랭크 궁병, 정예 실리스들로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었다.
‘이제 슬슬 새로운 병종의 연구도 해야겠는데…….’
호는 공성병과 마법 그리고 기병 계통의 병종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병종들을 모조리 연구하기 위해서는 영지 기술 연구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연구소와 그와 연계할 수 있는 마탑의 건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돈과 자원이 필요한 마탑은 지금 상황으로는 건설 자체가 불가능했고, 연구소 또한 마법사 영웅이 있어야만 건설이 가능했다.
“어디서 마법사 하나 뚝 떨어지면……. 아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호는 리아 캬베데의 얼굴을 보는 순간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현재 안테로리에는 마법사 계통의 영웅이 한 명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안테로리에 적을 두고 있는 영웅은 아니었지만, 곧 그렇게 될 터였다.
회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들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건은 당연히 군사 부문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안테로리를 지켜주던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가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아직 호의 눈에는 어리게 보이는 한시현도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가 떠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지 연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 붸르니체스의 휘하에 있는 나자르 T 스테르가 한 달 뒤,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통보했습니다.”
“몇 달쯤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합니다.”
리아 캬베데의 보고에 호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군대와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의 존재로 인해 바리안스의 대지에 있는 수인족 영웅 리셴르나는 함부로 안테로리를 향해 도발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가 돌아간 이후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상도 장담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 빠르게 안테로리를 발전시켜 이 도시를 B등급 영지로 만들고, C랭크의 병종까지 양성은 할 수 있었지만…….’
S등급 영웅인 리셴르나가 다스리고 있는 아트리그와 비교하면 안테로리는 조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C등급이지만 마장기를 두 대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몇 달 전의 정보인 만큼 지금은 얼마만큼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스무 명으로 구성된 실리스 열 부대를 파견해 아트리그 근처의 국경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이왕이면 근처에 망루 건설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망루 건설은 곧 착공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실리스들에게 정찰 준비를 하라고 일러 놓았습니다. 냥.”
리아 캬베데의 대답에 호는 싱긋 웃었다. 역시 A등급 영웅. 자신들의 대화를 멀뚱멀뚱 듣고 있는 한시현이나 사드나인보다는 훨씬 쓸모가 있었다.
그렇게 망루가 완공되고 실리스들이 아트리그 주위를 정찰하기 시작하면, 아트리그에서 병사들이 움직이는 순간 그 정보는 곧 안테로리로 전해질 터였다.
이왕이면 수인족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강병을 양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안테로리는 더욱 많은 발전이 필요했다.
“기술 연구가 필요하겠군.”
“연구소 건설이 시급합니다. 마법사 영웅이 필요합니다.”
리아 캬베데가 호의 말을 받았다. 노란색을 띠는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졌다. 그리고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 * *
“아…… 아아…….”
사시나무처럼 덜덜 몸을 떨고 있는 여성. 미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엘프, 엘 아르윈이었다.
현재 그녀는 어딘가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 온 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엘 아르윈은 알지 못했다. 검은색의 안대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곳이 굉장히 추운 장소이며, 다크엘프들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과 그들의 인간 대장이 주기적으로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인간 대장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엘 아르윈은 청각과 느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짐작대로 호는 그런 엘 아르윈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여 비스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엘 아르윈
2. 성별 : 여(212)
3. 종족 : 크리솔라이트
4. 소속 : 엘프 왕국
5. 레벨 : 23
6. 직업 : 바람 마법사(E)
7. 세부능력
통솔 : 26 / 30(E)
무력 : 7 / 10(F)
지력 : 46 / 50(D)
정치 : 17 / 30(E)
매력 : 42 / 50(D)
E등급 영웅의 한계 덕분에 엘 아르윈의 능력은 빈말이라도 해도 딱히 좋다고 표현할 수 있는 영웅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마법사 계열의 영웅이 많지 않고, 또한 마법사 영웅이 있어야 연구소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등급은 낮아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영웅이었다.
“제발. 제발 저를 풀어주세요…….”
호의 기척을 느낀 아르윈이 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춥고 어두운 지하, 거기에 두꺼운 검은색 안대로 두 눈을 막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현재 제대로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그녀에게 상당한 공포를 안겨주고 있었다.
철컹!
엘 아르윈이 몸을 움직이자 온몸 가득 묶인 쇠사슬이 그녀의 자유를 가로막았다.
“아아!”
“워워……. 움직이면 안 되지, 아르윈.”
“제…… 제발 절 여기서 풀어주세요. 숲의 친구들이…….”
호가 그녀의 뾰족한 귀에 가까이 대고 천천히 말했다.
“숲의 친구들은 다 죽었다. 아르윈.”
“아……. 아아.”
잠시 후, 안대 사이로 또르르 물방울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미녀의 눈물. 아무리 강심장인 사내라 할지라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저런 모습을 호는 게임 속에서 수십, 수백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저런 눈물에 속아 그녀를 풀어주게 되면 어떠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보나마나 난리가 나겠지.’
아직 오너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은 상황에서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에 못 이겨 힘겹게 포로로 붙잡은 영웅들을 풀어줬다가 Game Over를 당한 리그너스 대륙전기 유저들의 하소연은 이미 공략 사이트에서 지겹도록 본 기억이 있었다.
“퀘스트를 위해. 그리고 안테로리의 발전을 위해 너는 내 부하가 되어줘야 해.”
그녀를 풀어주는 것은 오너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차오른 뒤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엘 아르윈은 마음이 이미 꺾여 있었고, 오너 시스템 역시 얼마 후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우, 우와아……. 우와!”
안테로리의 조그마한 소녀 영웅인 시현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빼어난 외모를 지닌 미녀가 비춰지고 있었다. 긴 귀가 특징이며 시현이 살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미의 종족, 바로 엘프였다.
“엘프군요. 흐음.”
호들갑을 떠는 시현의 반응과는 다르게 수인 영웅인 사드나인은 엘프의 등장에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소환자인 시현과는 다르게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영웅인 그는 엘프와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엘프라……. 멍멍.”
말끝을 흐리던 사드나인의 눈동자가 두꺼운 눈썹 밑에서 살짝 가늘어졌다. 엘프라는 종족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시현을 흘깃 보더니 하려는 말을 참는 모습이었다.
마족과 엘프처럼 수인과 엘프 역시 딱히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테로리의 영주 윤호의 밑에서 함께하기로 한 사이인 만큼 괜한 말로 트러블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 연유로 인해 엘프를 바라보는 사드나인의 눈에는 적의감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이는 리아 캬베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빠? 그…… 에, 엘프님 이름이 뭐예요?”
“엘 아르윈.”
호 대신 엘프 영웅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안테로리의 회의실에 모인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엘프 영웅은 바로 엘 아르윈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리아 캬베데와 마찬가지로 오더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영혼 속에 호의 이름이 새겨진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엘 아르윈은 안테로리에서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다.”
호의 말에 각자 흔드는 횟수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모두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다들 환영하는 모양새였다. 급성장중인 안테로리의 상황에서는 개미의 일손조차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엘 아르윈이 엘프의 예와 함께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세계수의 인도를 받아 윤호 님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띵동.
-E등급 엘프 영웅 ‘엘 아르윈’이 안테로리에 합류했습니다.
-엘프 족 건물 건설 및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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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아르윈의 인사가 끝나는 순간 호의 눈앞으로 많은 메시지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던 무렵 익숙하게 봤던 메시지들이었다. 다른 종족의 영웅을 등용하면서 그와 관련된 건물과 새로운 연구들이 추가적으로 생겨난다는 내용들이었다.
엘 아르윈의 합류에 따라 이제부터 안테로리에서는 수인, 마족뿐 아니라 엘프 종족의 건물 및 병과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엘 아르윈의 직업은 바람 마법사. 마법과 관련된 건물도 추가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다. 특히나 호가 바라는 건물 중 하나였던 연구소의 건설도 가능해졌다.
‘이제부터는 더욱 바빠지겠군.’
호는 슬쩍 안테로리의 영지 정보를 확인했다. 새로운 건물과 연구 가능한 기술이 늘었으니 이를 토대로 좀 더 많은 양의 리스를 벌어들이고, 영지의 내정 상황을 포함한 모든 부문들을 다시 한 번 크게 발돋움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이미 계획은 대략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자신의 계획을 떠올리려던 호를 향해 시현이 탄성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어떻게 엘프를 동료로 만들었어요? 호 오빠?”
“전부 나의 능력이지.”
그녀의 질문에 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오더 시스템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절대로 설명해 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어깨만 으쓱이는 호의 대답에, 한시현은 묘한 표정을 짓고는 앞으로 함께할 동료가 된 엘 아르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