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리그너스 대륙전기 052화
‘내가 엘프의 소환자였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만. 후우. 마족이 엘프와의 친밀도를 올리는 것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엘 샤난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상현실에서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단련된 연애 경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당초 엘프는 마족에게 마음 자체를 열지 않았다. 행여나 다른 유저들과 의견을 나누고 토론할 수 있는 인터넷만 되었어도 어떻게 해결책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인터넷은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래도 엘프들이 사는 영역의 모든 던전을 파괴한 게 어떻게든 실마리가 될 것 같았다.
“느긋하게 공략해야겠어. 어차피 SS등급인 만큼 퀘스트 기한이 짧지는 않을 테니.”
“……??”
호의 혼잣말에 리아 캬베데는 시계추처럼 좌우로 고개만을 흔들었다. 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엘 샤난은?”
“코르다로 향하는 것을 봤습니다.”
호가 손을 슬쩍 들어 올리자 어둠속에 숨어 있던 실리스가 나타나 말했다. 그런 실리스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진군 방향을 바꾼다. 근처에 있는 엘프들의 마을은 파악했지?”
“네. 여기서 동남쪽으로 하루 반나절 거리에 조그마한 마을이 존재합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엘 샤난이 향한 코르다와는 완전히 반대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그리고 호가 이끄는 마족의 군대는 안테로리로 향하던 진군 방향을 동남쪽으로 바꿔 이동하기 시작했다.
보통 한 영지에는 영주가 거주하는 성을 기준으로 사방에 마을이 흩뿌려지듯 구성되어 있었다. 마족들의 영지인 커티삭도 그리고 한때 수인족의 영지였던 안테로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구조를 벗어나는 종족은 오로지 정령들밖에 없었다.
호가 영주로 있는 안테로리 곳곳에는 오크와 다크엘프 그리고 수인족들로 구성된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마을들에서 농사를 짓거나 물품을 생산함에 따라 영지의 식량 수입 및 다양한 수치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영주들은 식량저장고라는 시설과 함께 망루라는 시설을 짓거나 병사들을 배치해 몬스터나 다른 종족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곤 했다.
“망루나 마을에 배치된 엘프 병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을 주위 다섯 시간 내의 거리까지 정찰을 했지만, 순찰을 도는 엘프의 군대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시…….”
실리스의 보고에 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 샤난이 이끌었던 병력을 전멸시켰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엘프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호의 눈에 희끄무레하게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는 무방비 상태로 놓인 엘프 마을이 하나 있었다.
“망루가 없는 게 좋네.”
망루의 존재는 단순히 마을을 방어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망루는 영주에게 그 마을이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했는지 알려주는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격전 혹은 영지 자체를 차지하기 위한 점령전이 아니라면 망루라는 존재는 비밀스러운 작전을 펼칠 때 가장 껄끄러운 군사 시설이었다.
“근처에 떨어진 엘프 마을은?”
“반나절 거리에 존재합니다.”
실리스의 대답을 듣는 와중에도 호의 눈동자는 여전히 엘프의 마을로 향해 있었다. 호는 지금 저 마을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바로 코르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엘프의 영웅 또한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100%는 아니지만 저런 마을들에는 가끔씩 숨겨진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에 따르면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등용할 수 있는 엘프 영웅 중 한 명이 저런 마을에 숨겨져 있다고 했지.”
“관우는 내 여자?”
“아. 그런 사람이 있어. 드래곤보다 더욱 위대한 사람이.”
호의 말에 리아 캬베데가 화들짝 놀라며 캬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리아의 반응을 무시한 채 호는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자신만 볼 수 있는 공략본을 바라보았다.
“소속된 종족이 하필이면 마족인 탓에 엘프 영웅들을 등용할 수는 없어도 포로로 붙잡을 수는 있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오너 시스템을 통해 내 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좋아, 마을의 모든 엘프들을 전멸시킨다. 단, 최대한 몬스터의 짓으로 꾸미도록.”
“네. 어둠에게 영광을.”
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실리스들이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굳이 아이스 스파토이까지는 투입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이런 은밀한 행동에는 실리스들로만 작전을 펼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단번에 낙점이면 좋겠는데.”
호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공략본에 따르면 이런 마을에는 아직 재야로 남아 있는 엘프 영웅들이 여럿 존재한다고 했다. 엘프족으로 플레이해 혹시나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세력을 꾸릴 경우 등용해서 유용하게 쓰라는 추신까지 덧붙여 있었다.
뭐, 이렇게 영주성에서 무방비로 떨어진 몇 개의 마을을 전멸시키다 보면 분명 그중 한 마을에는 포로로 붙잡을 수 있는 엘프 영웅이 있을 터였다.
“공략본이 참 좋다니까.”
에디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공략본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있어 굉장히 유용했다.
“아아아악!”
“으아아악!”
호의 명령대로 실리스들은 한 명의 엘프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엘프들의 마을을 포위하고는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엘프들도 무기를 들며 반항하긴 했지만 D+랭크인 실리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현실 세계에서는 국보급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는 외모를 지닌 선남선녀들이 화살 세례에 하나둘 목숨을 잃고 있었다.
“이 더러운 마족의 부하들이!”
“오?!”
그리고 리아 캬베데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엘프들의 마을로 접근하던 호는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에 눈을 반짝였다. 엘프의 재야 영웅을 엘 샤난 몰래 포로로 잡기 위해 엘프 마을을 공격했는데, 단번에 홈런이었다.
“감히 내 친구들을!”
곧 그녀는 실리스들에게 붙잡혀 호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여성 엘프를 보며 호는 그녀의 정보를 살펴보였다.
E등급 영웅으로 엘 아르윈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성 엘프였다. 종족은 역시나 크리솔라이트 족으로 궁수가 아닌 마법사 영웅이었다. 어쨌든 호가 원하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엘프였다.
“흐흠.”
호는 손가락을 이용해 실리스들에게 양팔이 단단하게 결박된 아르윈의 턱을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자니 마치 미인이라는 상품을 감정하는 감정사가 된 것 같았다.
그때 자신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친구들을 모조리 죽인 실리스들의 대장을 향해 아르윈은 입을 오물거리더니 퉤 하며 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카아앙!”
둥근 고양이의 손이 나타나 호의 얼굴로 향하는 침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양이 손은 이어서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아아악!”
리아 캬베데의 주먹질에 그대로 기절한 엘 아르윈을 두고 몸을 일으킨 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는 진짜로 안테로리로 돌아갈 차례였다. 그리고 이 엘프의 마음속에 절망을 심어야만 했다.
“오너 시스템의 명령이 충전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네.”
호는 기절한 엘 아르윈을 바라봤다. 오너 시스템의 명령 횟수가 충전되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에 절망의 씨앗을 심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E등급에 불과한 영웅. 어렵지 않게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 * *
‘안 돼! 안 돼……!’
엘 아르윈은 다크 엘프들의 공격에 죽어나가는 자신의 친구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평화롭게 숲속의 동물들과 놀던 자신의 친구들이 하나둘 끔찍한 모습으로 세계수의 곁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아아……!”
숲이 불타오르고 숲속 친구들이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게 전부 마족 때문이었다.
‘전부…… 마족…….’
그 순간 분노에 찬 엘 아르윈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도저히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렇게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그녀가 몸을 꿈틀거리던 순간이었다.
“으읏!”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배꼽 아랫 부분에 푹 박히는 순간 아르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그녀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자신에게 화살을 쏜 인물은 자신들의 친구들을 죽였던 다크엘프가 아니었다. 인간 남자였다.
“네……네놈은.”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엘 아르윈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인간이지만 마족에게 영혼을 판 남자. 그리고 다크엘프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이 살던 마을을 파괴하고 친구들을 학살한 남자.
그렇게 한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가 갑자기 히죽 웃는 순간 엘 아르윈은 자신의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차가운 냉기가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녀가 묶인 장소는 다름 아닌 안테로리의 감옥이었다.
* * *
아이스 스파토이와 실리스들을 이끌고 엘프의 영지 내에 있는 대부분의 던전들을 성공적으로 파괴한 호는 리아 캬베데와 함께 안테로리로 복귀했다. 덤도 하나 끼어 있었지만, 그 덤에 대해 아는 이는 오직 리아 캬베데뿐이었다.
“호 님 만세!”
“윤호 만세!”
엘프 영지의 던전을 파괴하고 얻은 재화들이 수레에 실려 안테로리로 속속 들어오기 시작하자, 안테로리의 시민들이 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인간이지만 마족과 수인이 섞여 있는 안테로리에서 호는 인기가 넘치는 영주이자 대장이었다.
성공적인 이번 공략은 호에게 많은 수확을 안겨다 주었다.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재화도 재화였지만, 던전을 파괴하며 얻은 경험치가 상당히 많았다. 비록 지금 당장 사용할 수는 없어도 훗날 큰 도움이 될 밑바탕이었다. 또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이 자신들과 비교해 상당히 허약한 전력만 지니고 있다는 정보도 입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원정이 호에게 수확만 안겨다 준 것은 아니었다.
“하아.”
‘크리솔라이트의 꿈’이라는 SS등급 이벤트가 강제로 발동된 것을 떠올리며 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덕분에 영지 발전 노선도 바꿔야만 했다.
호가 눈여겨보고 있는 크리솔라이트 족 엘프 영웅, 엘 샤난을 자신의 동료로 만들기 위해서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의 성에 대한 공격은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해야만 했다. 만약 병사들을 이끌고 엘프들을 공격한다면 그녀의 마음에 친밀감을 심기는커녕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세력을 확장할 수가 없단 말이지.”
“캬앙?”
호가 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 모습에 집무실에 자리한 세 인영이 다들 입을 다물었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보이는 호의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잠시 후, 호의 입이 열렸다.
“마력 회로진의 개발은 어떻게 됐지?”
“멍! 아직 마력 회로진의 연구는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많은 기술자들이 그 원리를 터득하고 있으니 곧 우리 영지에서도 마력 회로진을 이용하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산품은?”
“가젯 의복의 생산은 문제없이 이뤄지고 있어요, 오빠. 품질도 매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요.”
“군사 부문은 어때?”
“현재 양성되고 있는 실리스들의 훈련 상태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어서 마력 회로진의 연구가 끝이 나면 정예 실리스의 양성과 관련된 개발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냥.”
사드나인, 한시현, 리아 캬베데의 보고가 차례대로 이어졌다.
며칠간 던전 탐험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기는 했지만, 딱히 영지에 문제는 없었다. 마을의 발전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이뤄진 상황이었기에 리스와 식량은 충분히 생산되고 있었고, 영지 기술 연구도 차질 없이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진행속도가 느린 것은 흠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력 수치가 높은 영웅이 몇 있으면 좋겠는데.’
안테로리의 영웅들 중 쓸 만한 지력 영웅은 오직 리아 캬베데뿐이었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는 A등급 이라는 뛰어난 능력치 때문에 영지 발전의 여러 부분에 돌려막기 식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지력 능력이 높은 직업으로 전직을 한 아스트리드 벨을 잘 키워 나갔다면 이럴 때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안테로리가 아닌 커티삭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