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51화 (51/522)

# 51

리그너스 대륙전기 051화

“2부대는 측면으로 파고들어 진영을 무너뜨려라! 스파토이 3부대! 정면에서 달려오는 놀 전사들을 막아! 실리스들은 3부대를 지원한다! 둔기를 든 녀석들을 먼저 저격하도록!”

“샤아아아!”

“적들에게 어둠을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리아! 크림슨 놀 족장의 시선을 끌어! 아군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게 두지 마!”

“캬아앙!”

손을 쫘악 펼치며 큰 목소리로 내리는 호의 명령에 맞춰 마족의 병사들과 리아 캬베데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대장 윤호와 리아 캬베데의 통솔력 그리고 무력에 영향을 받은 아이스 스파토이와 실리스들은 던전 ‘놀의 동굴’의 일반 몬스터인 놀들을 상대로 연신 우위를 점하며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놀의 동굴’의 보스급 몬스터 크림슨 놀 족장은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가 상대하고 있었다. 한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인 만큼 크림슨 놀 족장은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리아 캬베데와 아이스 스파토이 그리고 실리스들의 합공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카아앙! 커억!”

“크에에엥! 크익!”

놀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합창하듯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E등급 던전인 만큼 놀의 동굴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그들보다 나름대로 높은 랭크에 속하는 마족의 병사들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이스 스파토이가 휘두르는 시미터에, 실리스들이 발사하는 화살에 놀들이 난도질당하고 몸 여기저기가 꿰뚫리는 모습을 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살과 내장 그리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 잔인한 장면들의 향연이지만 이 세계에서 익숙해진 탓일까? 이제는 저런 모습들을 봐도 딱히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한시현이라면 기절을 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이번 던전도 쉽게 공략할 수 있겠군.’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E등급 던전은 정예 오크 전사와 다크엘프 궁수만으로도 공략에 성공한 전적이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좋아. 이번에도 제법 많이 털어갈 수 있겠는 걸?”

크림슨 놀 족장의 뒤로 반짝이는 것이 놓인 상자를 보며 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성공적인 던전의 공략은 많은 경험치와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들이기는 했지만 경험치는 훗날 C등급 클래스로 전직했을 때, 재화는 안테로리의 발전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때 그런 호의 뒷모습을 한 엘프가 실눈을 뜨며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엘 사냔은 자신이 마족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패배했으며 결국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모든 엘프들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알려진 환상의 세계수가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마족 병사들이 놀들을 학살하다시피 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이 코르다 영지 내의 던전 중 하나인 놀의 동굴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슬쩍 몸을 움직여봤지만, 샤난은 강한 압박감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단단한 밧줄로 자신의 몸을 꽁꽁 묶은 것 같았다. 게다가 주위에는 다크엘프 열댓 명 정도가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포로로 붙잡힌 건가?’

주변 상황을 보니 딱 그런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족의 포로로 잡힌 엘프 친구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지만, 무기도 없는데다가 다크엘프들이 있는 만큼 도망치기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자신이 여기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놀의 동굴.’

엘 샤난은 눈을 감은 채 현재 자신의 위치를 떠올렸다. 놀의 동굴은 코르다와 사흘 정도 거리에 있는 놀들의 서식처였다. 자신들의 영역을 꾸리며 근처를 지나가는 엘프들을 공격하는 놀들은 엘프들에게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단단한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가 그 수가 상당했기에 코르다의 엘프 궁수들로는 처리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놀의 동굴 근처에 살던 엘프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이동을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런 엘프들의 문젯거리를 다른 종족도 아닌 마족이 해결하고 있다는 불명예스러움에 엘 샤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자신들의 터전을 더럽히는 이 끔찍한 군대를 물리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도중 엘 샤난의 앞으로 한 남성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로 호였다.

“……!”

그림자를 통해 마족들을 지휘하는 인간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엘 샤난은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샤난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전 호의 말이 이어졌다.

“코르다의 센티널. 엘 샤난.”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내 이름을!”

굉장히 차분하고 편안한 말투에 엘 샤난은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친한 척 더러운 마족이 건네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인간이지만 마족의 병사들을 지휘하며 자신의 동료들을 학살한 자였다.

“엘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궁수들만이 모인 크리솔라이트 딸이여. 내 이름은 윤호라고 한다. 안테로리를 통솔하고 있는 소환자지.”

“그 입 닥치지……!”

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버럭 화를 내려던 샤난은 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환자라는 단어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소환자.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 이 리그너스 대륙에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여신 라헬의 손에 의해 소환된 다른 세계의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의 신전을 통해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하는 각 종족들에게 보내졌다고 했다. 이런 소환자들에 대해 각 종족들 사이에서는 창조주 리그로우와 세리너스가 내린 계시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샤냔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엘프족의 영역에도 약 열 명 정도의 소환자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험난한 리그너스 대륙의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몇몇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남아 있는 소환자들은 엘프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들끼리의 생활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게 전부였다. 숲 안에서 소환자들이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꾸리게끔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마법과 검술에 전혀 재능이 없는데다가 허약한 몬스터만 보여도 기겁을 하며 도망칠 정도로 용기조차 없었다.

가끔 소환자들을 돕기 위해 몇몇 엘프들이 마법과 정령 검술을 가르치기 위해 나섰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엘프의 영토에 살고 있는 소환자 중 마법과 정령 검술을 익힌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윤호라고 이름을 밝힌 눈앞의 소환자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다뤄지는 엘프족의 소환자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소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들의 병사를 지휘하는 기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읏……. 더러운 마족의 주구가….”

엘 샤난은 낮게 중얼거렸다. 여신 라헬께서 이 세계에 보내주신 소환자라고 해도 자신의 친구들을 죽인 마족들의 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더럽다? 어째서? 물론, 마족이 엘프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큰 차이점이 있다. 난 소환자이며 인간이라는 점이지. 아이스 스파토이와 실리스들을 이끌고 출전한 이후 나는 엘프들과 충돌하지도, 그들을 포로로 삼아 학대한 적도 없었다.”

“거짓말!”

호의 대답에 엘 사냔이 소리를 높였다. 커다란 그녀의 목소리에 주위에 있던 실리스 몇몇이 흘깃 둘을 바라봤지만, 곧 관심을 돌렸다.

“믿지 못하겠다면 너의 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보던가.”

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엘 사냔의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설정된 엘프의 특성에 따르면 센터널 이상의 엘프들은 자신에게 마음을 연 상대에 한 해 진실의 눈이라는 것을 사용해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호는 그런 진실의 눈에 큰 맹점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런 맹점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던 여러 유저들이 발견했고, 꼼수처럼 사용하는 말장난이었다. 그런 연유로 호는 방금 전 엘 샤난에게 말을 했을 때 아이스 스파토이와 실리스들을 이끌고 출전한 이후라는 조건을 달았다.

물론, 그 전에도 직접 엘프 포로들을 학대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은 없었다. 단지 방관을 했을 뿐이었다.

“…….”

엘 샤난이 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마…… 말도 안 돼!’

진실의 눈은 그녀에게 윤호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엘 사냔은 자신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호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던전의 전투가 종료되었기 때문이었다.

놀의 동굴 공략을 끝낸 이후 호는 계속해서 엘프 영지에 있는 던전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전부 엘프들이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던 던전들이었다. 아이스 스파토이와 실리스로 이루어진 마족의 군대는 강했고, 깔끔하게 E, F등급의 던전을 파괴했다.

피해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난이도가 난이도인 만큼 던전 내의 몬스터들은 그저 그런 수준에 불과했고, 호와 리아 캬베데가 지휘하는 아이스 스파토이와 실리스들은 모든 훈련이 끝난 정예병들이었다.

그리고 엘프들의 영지 내에 있는 던전을 파괴하는 동안 호가 이끄는 마족의 군대는 단 한 명의 엘프도 건드리지 않았다. 소수의 엘프들이 살고 있는 마을들이 그들의 이동방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는 오히려 엘프 마을을 피해 돌아가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칫.”

그런 성의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변화가 없는 엘 샤난을 바라보며 호는 혀를 찼다. 마족에 대한 엘프의 적대감은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최대한 엘프들을 존중하는 행동을 눈에 띄게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엘 샤난의 친밀도는 단 1도 오르지 않고 있었다.

“꺄아앙!”

목만 살짝 간질여줘도 좋아 죽을라하는 리아 캬베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다른 수를 찾아 봐야겠는데……. 어쩔 수 없지. 장기전으로 가는 수밖에.”

호의 입에서 끙 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대로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퀘스트의 성공은커녕 진행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호의 노림수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대체…….’

엘 샤난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마족들에게 포로로 붙잡힌 이후 그녀는 마족의 병사들이 보이는 행동에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족이라면 당연히 엘프의 숲을 파괴하고 약탈해야 했지만, 이들은 조금 이상했다. 사악한 마기를 흩뿌리고 다니면서도 하는 오로지 던전 만을 파괴하고 있었다. 엘프들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숲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건 전부 이들을 지휘하는 대장 윤호라는 이름의 남자가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그렇게 엘프들이 골칫거리라고 여겼던 여러 던전들을 파괴하고 난 그는 엘 샤난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줬다. 그녀를 감시하는 실리스들에게 자신을 풀어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어째서? 알량한 동정심 때문인가?”

“아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내가 누군가를 동정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말이지. 단지, 나는 너에게 내가 엘프들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조금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호는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를 보는 엘 샤난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후. 어쨌든 우리는 이만 가본다. 우리가 코르다에 들어섰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던전의 파괴가 목적이었으니까. 그리고 한 마디 하자면, 만약 네가 우리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충돌하는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면 엘 샤난에게 무기를 돌려주도록.”

호의 명령에 실리스들이 빼앗았던 그녀의 무기를 엘 샤난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엘 샤난을 뒤로 한 채 호는 병사들을 이끌고 안테로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냐앙, 마스터. 어째서 저 엘프를 그냥 돌려보낸 건가요?”

“……더러운 이벤트 때문이지.”

“……?”

안테로리로 향하면서 호는 다시 한 번 ‘크리솔라이트 꿈’ 퀘스트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이벤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자신의 동료로 삼아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더불어 오너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드래곤의 브레스가 퍼부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