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리그너스 대륙전기 050화
“……SS?”
퀘스트의 등급을 확인한 순간, 호는 그 어떤 감정보다도 먼저 황당함이 앞섰다. 하고 많은 퀘스트 난이도 중에 하필이면 무려 SS등급의 퀘스트였다.
“어이가 없네.”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가상현실 게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는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마장기나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하는 고 랭크 병사 혹은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마법사단 같은 것은 없어도 이 세계에 떨어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안테 로리의 영주가 될 수 있었고, 그 안테 로리를 중 도시까지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마 소환자라고 불리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인간들 중 그래도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소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비록 공략본이 있고,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했던 경험이 있다고 해도 눈앞에 들이닥친 SS등급 퀘스트의 위압감은 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이미 가상현실게임을 통해 이런 난이도의 퀘스트에 대해 경험이 있는 만큼 한숨이 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유저들이 개발사에 대해 항의를 할 정도로 살인적인 난이도를 자랑하는 SSS등급의 퀘스트가 아닌 게 어디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SS등급이나 SSS등급이나 어려운 건 도긴개긴이었다.
“캬앙?”
자신의 구겨진 표정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 뿐 아니라 몸 전체를 갸웃갸웃하는 리아 캬베데를 뒤로 한 채 호는 기절한 듯 쓰러져 있는 여성 엘프 영웅인 엘 샤난을 바라봤다.
어쩐지 무뇌아처럼 고작 이 백의 병력만 가지고 달려드나 싶었더니만 아무래도 믿는 구석이 있던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다니 말이다.
“그게 의도된 행동이었다면 넌 진짜 성공했다.”
순간 호의 머릿속으로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라는 문구로 많은 사람들을 좌절에 물들였던 흑인 형님이 떠올랐다.
정말 제대로 함정 카드를 밟은 느낌이었다. 단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흑인이 아닌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라는 점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하아아.”
땅이 꺼질듯 한숨을 내쉰 호는 다시 한 번 공략본에 나와 있는 퀘스트의 난이도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이걸 취소할 수도 없고.”
어찌되었든 퀘스트는 받았으면 반드시 클리어를 해야 했다. 강제적으로 퀘스트를 중단하거나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시스템 자체가 그랬다. 개발진의 말에 의하면 유저의 입맛에 따라 퀘스트를 선택하고 취소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
그리고 이 세계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다만 이 세계가 게임이라면 도저히 클리어가 불가능한 난이도의 퀘스트를 강제적으로 부여 받았을 경우 세이브, 로드를 통해 퀘스트를 피해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퀘스트를 깨야 한다는 거잖아.”
더욱이 이렇게 부여받은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않아 강제적으로 실패를 하게 되면 나비효과처럼 그 여파가 유저에게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도 알 수 없었다.
특히나 등급이 높은 퀘스트일 경우 실패에 대한 반작용은 더더욱 컸다. 하물며 조그마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언제 자신의 안전에 영향을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최근 순조롭게 모든 것이 흘러가곤 했지만, 호는 언제나 위험에 대한 대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
이 세계에서 떨어진 첫 날, 호는 선택의 제단에서 마왕 쉐르난비체가 무려 열다섯의 소환자를 단숨에 죽여 버린 사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후우. 일단 이동하자.”
“네. 그런데 이동지점은 어디로?”
“안테…… 아니, 원래 가려고 했던 던전으로 가자.”
호가 힘없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곧 마족의 군대는 다음 목적지인 E등급 던전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리아 캬베데의 명령에 따라 실리스들은 몇 명씩 조를 이뤄 엘프 군대가 접근하는지에 대해 정찰을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엘프족과 한바탕 전투를 펼쳐 그들을 전멸시킨 이상 최대한 조심하며 이동해야 했다.
‘일단 퀘스트에 관한 공략을 살펴봐야겠어.’
SS등급의 퀘스트가 비록 난이도가 높다 해도 분명 클리어가 가능한 퀘스트였다.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공략본도 있었다.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략본에는 ‘관우는 내 여자’라는 유저가 적어 놓은 자신에게 피와 살이 될 만한 팁들도 적혀 있었다.
그렇게 호는 실리스들의 호위를 받은 채 은색 갈기를 휘날리는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천천히 공략본에 나와 있는 퀘스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퀘스트 ‘크리솔라이트의 꿈’.
“크리솔라이트. 엘프의 부족 중 하나라고 했지?”
흘깃 포로로 붙잡은 C등급 영웅인 엘 샤난의 정보를 다시 확인하니 역시나 크리솔라이트 종족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공략본에 나와 있는 퀘스트의 등장조건을 확인하니 엘프 왕국을 이루는 부족 중 하나인 크리솔라이트 종족을 포로로 잡으면 퀘스트가 강제적으로 발생한다고 나와 있었다.
[SS등급의 퀘스트인 만큼 상당한 아니 꽤 귀찮은 동선과 난이도를 자랑합니다. 강제 퀘스트인 만큼 크리솔라이트 종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게 되면 아무리 상대 엘프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외모가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포로로 붙잡기 전에 그냥 죽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와 함께 나와 있는 ‘관우는 내 여자’ 유저의 부연 설명에 호는 절로 뻐근해져 오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가뜩이나 영웅이 부족한 판국에 C등급 영웅이라는 정보에 눈이 돌아가 그녀를 포로로 잡은 게 최악의 실수였다.
“쩝.”
그렇다고 이미 퀘스트가 부여된 마당에 뒤늦게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고, 결국 얻는 거 없이 오로지 언젠가 다가올 퀘스트의 부작용만을 몸소 체감해야만 했다.
[이 퀘스트는 한 때 크리솔라이트의 부족을 수호했던 그린 드래곤을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SS등급인 만큼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지만 그에 따른 보상도 굉장합니다. 무려, 그린 드래곤을 동료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공략본을 작성한 유저는 이 퀘스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공략본도 작성했겠지만.
“역시 SS등급답게 보상은 대단하네.”
드래곤을 동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보상이었다. 기본적으로 SS등급의 영웅으로 설정되어 있는 드래곤들은 오로지 이벤트를 통해서만 동료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드래곤 종족의 영웅들은 기본적인 능력 자체도 다른 종족의 영웅들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날 뿐 아니라 호감도를 높일 경우 유저들에게 많은 재화 및 보물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공략본의 내용을 읽는 호의 얼굴은 딱히 흥분된다거나 좋아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런 보상들이 전부 퀘스트를 클리어했을 때의 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리솔라이트의 꿈’은 총 9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 - 포로로 붙잡은 엘프를 동료로 삼아 그 혹은 그녀를 동료로 만들어야 합니다.
단, 주의할 점은 오너 시스템을 이용하시면 안 됩니다. 오너 시스템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동료로 만들었을 경우 드래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퀘스트의 보상은커녕 분노의 브레스를 얻어맞을 가능성이 99.9%니 오너 시스템의 사용은 금물!]
“그러면 어떻게 동료로…? 아아. 결국 호감도 작업을 해야 되는 건가.”
호는 뻐근했던 뒷골이 다시 한 번 욱신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은 엘프와는 상극인 마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비록 따지고 보면 소환자이고 인간이지만 소속된 종족이 마족이라는 것만 해도 엄청난 패널티였다. 그만큼 엘프족은 마족을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후우. 본의 아니게 미연시 찍어야겠네.”
그만큼 마족의 유저가 엘프를 동료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다.
[2단계-1단계와 2단계는 어느 것을 먼저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크리솔라이트 엘프 족을 자신의 휘하에 둬야 합니다.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건 좀 쉽겠네.’
공략본을 보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은 안테 로리의 전력으로 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비록 두 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일이었지만, 마족 유저가 엘프를 동료로 삼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점령전이 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3단계-크리솔라이트 부족의 B랭크 특수 병종인 ‘크리솔라이트 궁수’의 개발을 끝낸 후, 동료가 된 크리솔라이트 부족 엘프와 함께 ‘퓨리온의 산맥’에 살고 있는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을 찾아가면 됩니다.
단, 레스프트 퓨리온을 찾는 도중 드래곤의 시련 3단계를 거쳐야 하는 데, 난이도가 제법 되는 만큼 B등급 마장기 두 대 이상의 전력으로 시험에 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퀘스트의 다음 단계에 대해 읽어 내려가던 호는 그대로 공략본을 닫아버렸다. C등급 마장기조차도 언제 개발할지 모르는 판국에 B등급 마장기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여타 하고 많은 퀘스트 중에서도 하필이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얻은 이벤트 퀘스트가 이딴 것이라니. 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와. 진짜……. 나 정말로 운이 더럽게 없는 건가? 아니, 이 세계에 끌려 온 것 자체가 운이 없는 일이겠지만.”
경험치를 획득하기 위해 엘프의 영역에 뛰어든 것 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엘프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후회가 되고 있었다. 차라리 엘프의 영역에 침범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이상한 퀘스트는 부여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마인드 피스. 어차피 진행해야할 퀘스트라면…….”
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호의 웃음에 리아 캬베데가 의아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단은 퀘스트의 1, 2 단계를 먼저 끝내야만 했다. 어차피 퀘스트의 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퀘스트에 따른 영향이 자신에게 오기 전까지가 퀘스트의 수행 기간이었다.
“일단은….”
호의 눈동자가 실리스들의 엄중한 경비와 함께 수레에 묶여 있는 여성 엘프, 엘 샤난에게 향했다. 엘프 답게 외모는 굉장히 뛰어났다.
금발머리라 불리는 연한 황갈색 머리카락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동자, 그리고 당장이라도 키스를 부르는 핑크빛 입술까지.
엘 샤난은 미의 종족라 불리는 엘프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남자라는 생물의 천적은 바로 미인인 것일까?
자신에게 SS등급의 퀘스트를 부여한 원흉이라는 생각을 하면 화가 나면서도 그런 엘 샤난의 얼굴을 보니 순간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엘 사냔의 호감도를 어떻게 올릴지 생각해 봐야겠네.”
똑똑 혀로 입천장을 튕기는 소리를 내며 호는 자신이 플레이했던 가상현실 미연시 게임의 경험과 이 세계로 끌려오기 전 연인이었던 혜연과의 연애를 떠올렸다.
기억에 따르면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올린 글 중에는 이런 연애 경험들이 영웅들 특히 이성 영웅들의 호감도를 높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적혀 있던 내용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솔은 제대로 공략도, 접근도 할 수 없는 더러운 퀘스트라지만.”
호의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갑자기 불어온 숲의 바람을 타고 흘러나갔다. 모태솔로.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