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리그너스 대륙전기 049화
“스아아아아!”
“죽엇!”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오크들을 맞이해 자신의 무용을 한껏 뽐냈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질 한 번에, 화살 하나에 오크들이 여럿 죽어나갔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엘프 궁사들은 자신들보다 두 단계나 랭크가 높은 아이스 스파토이를 상대로 힘겹게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더욱이 아이스 스파토이에 엘프 궁사들의 무기인 화살은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몸 전체가 뼈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 사이로 화살이 통과하기 일쑤였다. 물론, 몇몇 병사들이 자신들의 뛰어난 궁술 실력을 한껏 발휘해 아이스 스파토이의 관절부위를 깨뜨리기도 했지만, 그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관절 부위 한두 개가 깨진 것으로 아이스 스파토이는 죽지 않았다.
“친구들이여! 숲을 이용해서 싸우자!”
“……바보인가.”
멀리 들려오는 남성 엘프의 목소리에 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
그러나 위치가 발각된 게릴라전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이 근방은 엘프 궁사보다 실력이 뛰어난 실리스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나 개인 기량으로나 그들은 결코 실리스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갑자기 기습 공격을 당해서 깜짝 놀라기는 했는데…….”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며 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리아 캬베데가 없었다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 그만큼 가장 처음 자신에게 가해졌던 화살의 기습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미 전투는 마족들이 일방적으로 엘프들을 학살하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전력상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아아악!”
“으아아악!”
엘프 궁수들의 비명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의 통솔 및 무력에 영향을 받은 아이스 스파토이들은 엘프들의 하위 랭크 병사인 엘프 궁수를 상대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근접전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고, 엘프 궁수들의 이점인 정확한 원거리 공격도 아이스 스파토이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엘프들이 이렇게나 멍청했던가?’
불구대천의 원수답게 마족과 엘프는 천족과 마족처럼 상극인 관계였다. 마족이 엘프 포로에게 하는 행위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엘프들은 마족을 포로를 두지 않고 즉결처분했지만.
하지만 상대 종족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눈이 돌아가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서로가 지닌 전력의 차이라는 게 있었다. 그것을 감안하지 않은 명령은 그냥 바보 같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가끔 분에 못 이겨 공세를 취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하더니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엘프들이 바로 그러한 녀석들인 모양이었다.
“참, 알 수 없네.”
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투는 이미 끝이 보이고 있었지만 엘프들이 고작 이백의 병력만 가지고 천오백이 넘는 자신의 군대에 덤벼든 행위가 영 찜찜하게 느껴졌다.
“너, 너. 그리고 너. 주위를 정찰해 보도록.”
호가 자신을 호위하는 실리스들을 향해 말했다. 행여나 주변에 엘프의 군대가 매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러나 정찰을 다녀온 실리스들은 주변에는 그 어떤 엘프 병사들도 매복하고 있지 않다는 보고만을 전해올 뿐이었다.
“것 참. 혼란스럽네.”
호는 계속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이 엘프들은 고작 이백의 병력만을 가지고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병사들의 구성을 이룬 게 아닌 오직 E랭크 병종인 엘프 궁수로만 구성된 무리로 말이다.
‘오크들도 이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뭐, 생각해보면 잘 된 일이었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 살고 있는 엘프의 전력을 깎아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니 말이다. 게다가 이백의 엘프 병력에는 무려 영웅이 둘이나 끼어 있었다.
“리아!”
“캬아아앙?!”
그리고 신나게 엘프들을 학살하던 리아 캬베데를 향해 호가 소리쳤다.
“붙잡아라!”
주어는 빠졌지만, 리아 캬베데의 눈치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호가 무엇을 원하는지 재빠르게 알아챈 그녀가 아이스 스파토이 네 마리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던 여성 엘프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장 먼저 호에게 화살을 날렸던 엘프의 영웅 엘 샤난이었다.
“더러운 마족의 부하가!”
리아 캬베데의 등장에 엘 샤난이 소리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단검에서 화르륵 녹색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렇게 두 영웅이 전투를 치르는 모습을 보며 호는 엘프 영웅들의 정보를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흠. 쟤는 별로인데.”
먼저 엘 포르데우스라는 이름의 남성 엘프는 E등급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보를 자세히 뜯어본 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시현보다도 능력치가 떨어지는 만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녀석이었다.
게다가 엘 포르데우스는 엘프족의 영웅이었다. 마족이 서로 상성이 맞지 않는 엘프 영웅을 등용하기 위해서는 눈물겨울 정도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당연히 E등급 영웅을 상대로 그런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바보 같은 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론, 등용을 할 수 있으면 분명 쓰임새는 있었다. 영웅은 많으면 많을수록 도움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욱이 순순히 동료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처단.”
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친 엘 포르데우스를 포위하고 있던 아이스 스파토이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휘두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십의 스파토이를 바라보는 엘 포르데우스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가득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수십의 실리스 역시 엘 포르데우스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여기서……! 크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스파토이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고, 이어서 나타나는 사망 메시지를 확인하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부하로 등용할 수 없다면 굳이 살려 둘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은 자신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한 명은 정리했고.”
호의 눈동자가 리아 캬베데와 격전을 펼치고 있는 여성 엘프 쪽으로 향했다. 무력 수치가 좀 되는 모양인지, 여성 엘프 영웅은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를 상대로 치열하게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다만, 리아 캬베데의 표정은 굉장히 여유로운 데 반해 여성 엘프의 얼굴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엘 샤난
2. 성별 : 여(297)
3. 종족 : 크리솔라이트
4. 소속 : 엘프 왕국
5. 레벨 : 96
6. 직업 : 엘븐 센티널(C)
7. 세부능력
통솔 : 142 / 200(B)
무력 : 196 / 200(B)
지력 : 76 / 100(C)
정치 : 79 / 100(C)
매력 : 97 / 100(C)
8. 특성 : 전장의 지휘관, 활의 가르침, 굴하지 않는 용기.
9. 스킬
<크리솔라이트의 화살> A랭크.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엘프 중에서도 명궁으로 소문이 난 부족입니다. 그만큼 이들의 화살은 먼 거리에서도 강철을 꿰뚫을 정도로 위력적입니다.
-효과 : 전투 중 상대 영웅을 부상 입힐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궁병 계통의 병사를 지휘할 경우 부대의 공격력이 20% 상승합니다.
“어라? 나쁘지 않은데?”
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엘 포르데우스와는 달리 C등급 영웅인 엘 샤난이라는 이름의 엘프는 꽤 쓸모가 있어 보였다.
능력 수치도 준수했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무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C등급 영웅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196의 무력 수치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앞으로 성장만 잘 시킬 수 있다면 분명 괜찮은 전투형 영웅이 될 거 같았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휘하 부하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녀 역시 엘 포르데우스와 마찬가지로 종족의 사이를 생각하면 동료로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호는 타 종족의 영웅을 자신의 휘하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증거로 수인족 영웅인 리아 캬베데는 현재 그의 충실한 수하였다.
파앙! 팡!
리아 캬베데가 만들어내는 권풍이 엘 샤난을 향해 날아들었고, 엘 샤난도 리아 캬베데의 급소를 노리며 녹색의 불길이 치솟은 단검을 휘둘렀다. 치열한 일 대 일의 대결이 펼쳐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의 승기를 잡기 시작한 것은 리아 캬베데였다.
아무리 엘 샤난의 무력이 높다 해도 리아 캬베데는 A 등급 영웅, 더욱이 그녀의 무력은 엘 샤난보다도 무려 80 가까이나 높았다. 게다가 사방을 둘러싼 아이스 스파토이들과 실리스들의 존재 역시 두 영웅에게 상반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띵동.
-‘코르다’의 엘프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전투성과를 결산중입니다. 3…2…1. 결산완료. 이번 전투의 성과등급은 S 랭크입니다. 경험치를 1920 획득했습니다.
-총대장으로의 활약에 힘입어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C등급 영웅 ‘엘 샤난’을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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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리아 캬베데가 지친 엘 샤난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며 그녀를 기절시키는 순간, 전투가 끝난 것을 알리는 메시지들이 호의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전투가 최고라니까.”
건물의 건설로는 결코 올릴 수 없는 수치인 1920의 경험치를 단숨에 얻은 것도 모자라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러졌다. 게다가 추가적으로 엘프들이 지니고 있던 아이템도 다섯 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판매를 하면 나름대로 쏠쏠한 자금이 될 터였다.
엘프들과의 전투에서 아군이 입은 피해는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아이스 스파토이는 고작 열일곱이 마력을 잃고 소멸했을 뿐이고, 다크엘프인 실리스들의 피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쿠웅!
호가 아군의 피해를 파악하는 사이, 리아 캬베데가 기절한 엘 샤난을 들어 호의 앞에 내려놓았다.
“어떻게 할까요, 냥?”
리아 캬베데가 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처분은 총지휘관인 호에게 달려 있었다.
“포로로 데려간다. 실리스 열 명을 감시인으로 배치하도록.”
“알겠습니다. 냥.”
“……그런데 너 말이야. 그 냥냥거리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어?”
“이건 마스터에 대한 우리 종족의 호감도 표시라 내가 마스터를 미워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냥.”
“……그래.”
곧 리아 캬베데에게 지목된 열 명의 실리스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그들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대신 엘 샤난이라는 엘프를 철저히 감시해야 했다.
그렇게 엘프들과의 전투는 승리로 가볍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새롭게 떠오른 하나의 메시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띵동.
-C등급 영웅 ‘엘 샤난’과 접촉했습니다.
-이벤트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이벤트……?”
전장을 마무리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려던 호는 갑작스러운 메시지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도 아닌 이 세계에서 이벤트라는 게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퀘스트도 있는데 이벤트가 나타날 수도 있지, 뭐. 진짜 거지같이 이상한 세계라니까.”
메시지를 확인한 호는 툴툴거리며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열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이 공략본에는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모든 이벤트들이 나와 있었다.
“뭐 ……뭐야? 나한테 왜이래?”
그리고 공략본을 통해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를 확인한 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절한 엘프 영웅 엘 샤난을 쳐다보았다. 공략본에 나와 있는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의 난이도는 무려 SS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