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리그너스 대륙전기 047화
“알고 있구나. 샤난.”
“숲의 친구들이 점점 더 경고를 보내고 있어요. 어머니,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샤난. 그들에게는…….”
일만 명이 넘는 군대와 B등급 마장기가 있었다. 그들의 마장기가 단 한 대라도 전선에 등장한다면 수십여 년간 엘프들이 생활해 왔던 아멘드나와 코르다는 잿더미가 될 게 분명했다.
“알아요. 그러니까 어머니, 우리도 장로님들에게 부탁해 윈드라이더의 사용 허가를 받아야 해요.”
“샤난!”
엘 라이린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엘프들은 제1차 종족대전 이후 단 한 번도 먼저 마장기를 이용해 상대를 침공한 전례가 없단다. 그 전례를 내가 깰 수는 없어.”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머니, 커티삭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아픔을 알잖아요? 그들을 도와줘야 돼요.”
샤난의 말에 라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눈물 한 방울을 훔쳐내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녀 또한 숲속 친구들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절실한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움을 줄 방도가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어머니, 저는 제 뜻을 따르는 친구들과 마족들을 공격할 거예요.”
“샤난!”
샤난은 라이린을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저도 그들과 전면전을 치른다는 건 자살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의 전투를 그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종족에게 보여줄 생각이에요.”
“…….”
단호한 그녀의 말에 라이린은 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세계수의 뜻이라면 뜻이었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거대한 망루와 높다란 성벽은 보는 이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또한 이곳을 공격하려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성벽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조그마한 수인 마을에 불과했던 안테 로리였다.
“후…… 후후후.”
호는 성벽이 완공된 모습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성벽 위에는 D+랭크의 병사인 정예 실리스들이 철저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다크 엘프 중에서도 궁술이 뛰어난 이들로만 구성된 정예 실리스들은 경비를 서면서 성벽의 통로를 따라 순찰을 계속하고 있었다.
“스아아아.”
성벽 위에 배치된 병사는 실리스만이 아니었다. C랭크 보병인 아이스 스파토이도 그녀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의 냉기의 숨결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그들은 근접전에서는 굉장한 위력을 자랑했다.
특히나 아이스 스파토이는 자신의 냉기를 이용해 상대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한편, 냉기마법에 대해서도 완벽에 가까운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스켈레톤의 특성상 둔기를 제외한 무기에는 큰 피해를 받지도 않았다.
물론, 마장기가 등장한다면 다들 맛 좋은 한 끼 식사에 불과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오빠!”
“머엉!”
한참 견고한 성벽과 발전한 안테 로리의 모습을 보며 여운에 잠겨 있던 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두 남녀를 볼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네 발로 달리는 남자의 등에 조그마한 소녀가 탄 모습이었다. 견인족 영웅인 사드나인과 시현이었다.
“저놈 완전 이동 수단으로 전락했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현을 등에 태우고 있는 사드나인은 D등급 수인 영웅으로, 두어 달 전 운 좋게 주점에서 건진 녀석이었다.
무력 능력에만 보너스가 있는 직업을 지니고 있던 터라 딱히 능력치가 좋은 녀석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일손도 소중한 안테 로리의 상황에서 그는 충분히 일인분 그 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견인족이라 그런지 묘인족인 리아 캬베데와 다르게 친화력도 굉장히 좋았다. 개는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애견가들의 말은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문장 같았다.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잠시 피어오르더니 그의 등 위에서 시현이 뛰어내렸다.
“아르테미스 상단으로 보낼 가젯 의복의 정리가 모두 끝났어요.”
“오……. 몇 상자야?”
“1,750상자요. 이번에는 생산량이 제법 많아요.”
“커티삭과 볼 붸르니체스에게 보낼 수량은?”
“각각 500상자씩 따로 챙겼어요. 이미 수송 명령도 내렸고요.”
“잘했어.”
한시현의 대답에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테 로리에 있는 동안 그녀는 마을의 잡다한 업무를 해결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아마 커티삭에 있는 아스트리드 벨이나 한시진과 비교했을 때 레벨과 능력치는 더 높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그녀의 입에서 나온 1,750의 가젯 의복 상자는 상자당 평균 시세가 천 리스라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무려 십칠만 리스가 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역시 돈을 버는 건 특산품이 최고라니까.”
“맞아요.”
호의 말에 시현이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시 안테 로리에 재투자가 될 예정이었다.
<영지 정보(Status)>
안테 로리(중 도시[B등급]) - ‘붉은 핏빛의 대지’
인구 - 85,371
보유 리스 - 151,215
보유 식량 - 412,347
병사 - 아이스 스파토이(C) 4,600, 정예 실리스(D+) 2,500.
내정 건물 - 대형 식량 저장고 24, 주점 1, 대시장 40, 직물 공장 6…….
군사 건물 - 대형 망루 28, 병영 4, 대장간 4, 마법 연구소 1, 커다란 성벽
리스 수입 - 42,310 / 월
식량 수입 - 64,876 / 월
특산품 - 가젯 의복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안테 로리는 불과 몇 달 전의 모습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전부 특산품 덕분이었다.
영지의 모든 것을 건 도박에 가까운 호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호는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를 믿고 군사 부문을 완벽히 배제한 채 필사적으로 영지의 모든 전력을 내정에 쏟았다. 덕분에 빠르게 특산품 가젯 의복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수입을 늘려 나간 이후에야 조금씩 병사들의 연구에 투자하며 지금의 발전을 만들어냈다.
또한 안테 로리에 많은 자금과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안테 로리를 찾는 이주민이 크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영지민의 수 역시 큰 폭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집무실로 날아오는 민원 및 요구 사항 또한 엄청나게 늘었다.
그렇게 현재의 안테 로리는 C랭크로 이루어진 군대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리스를 매달 벌어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 연구 중인 마력 회로진의 개발이 끝나면 마탑의 건설도 가능해졌다. 그렇게 되면 마법을 사용하는 병과 또한 양성할 수 있었다.
“커티삭으로 보내야 되는 리스와 식량은?”
“멍! 오만씩 챙겼습니다.”
호의 말에 사드나인이 코를 벌름거리며 대답했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 거주하는 모든 마족의 지배자는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였다. 하지만 그녀가 거주하는 커티삭과 호가 지배하고 있는 안테 로리는 인구수에서도 몇 배나 차이가 났다.
안테 로리가 크게 발전하는 동안 커티삭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는 꼬박꼬박 많은 양의 리스와 식량을 커티삭으로 보내야만 했다.
매달 돈과 식량을 상납해야 하는 게 억울할 법도 했지만 호는 페릴 예노스가 마왕 쉐르난비체의 명령에 따라 붉은 핏빛의 대지라는 영토의 마족들을 관할하는 영웅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리스와 식량은 전부 페릴 예노스의 호감을 사기 위한 물품이었다.
‘붉은 핏빛의 대지를 내 손 안에 넣기 위해서는 페릴 예노스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해.’
한 마을의 영주가 되는 것과 한 지역의 패자가 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미 이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해 본 호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호는 안테 로리에 머무르고 있으면서도 커티삭에 있는 아스트리드 벨과 한시진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며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들과의 친분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기 위한 것도 이유였지만, 커티삭의 상황도 알아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페릴 예노스의 커티삭은 병사 일색의 군사 도시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커티삭의 행보가 그리 실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제 두 달 남았나…….”
“네? 뭐가요?”
호의 혼잣말을 들은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호는 미소만 지을 뿐, 그녀의 궁금증에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앞으로 두 달.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가 안테 로리에서 머물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다. 그 말은 즉, 두 달 후에는 든든한 방패였던 마장기와 강력한 군대가 안테 로리를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C랭크 병사를 훈련할 수 있게 된 지금 엘프들의 도발 따위는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트리그의 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마족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리셴르나는 쉽사리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호의 시선이 성벽 너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마족의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로 향했다. 보기만 해도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육중한 몸체를 지닌 거대한 병기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저걸 제작하려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발전을 한다 하더라도 몇 달, 아니, 몇 년의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아니,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호가 기억하기로 C등급 마장기의 개발에는 한 지역의 패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제작이 가능하더라도 현재 안테 로리의 재정 상황으로 마장기를 제작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종 병기인 만큼 마장기는 C등급이라 할지라도 개발 및 제작에는 최소 억 단위의 자금과 자재가 필요했다. 상위 등급인 B등급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안테 로리의 특산품인 가젯 의복을 수만 상자를 판매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만큼 마장기의 연구 개발 및 생산에 필요한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연유로 호는 빠르게 마장기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마장기를 앞세운 전쟁을 치르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할 뿐이었다.
“병사들의 편성은 어떻게 되었지?”
“모두 완료했어요!”
호의 물음에 시현이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새 그녀는 건물의 건설 및 주점 관리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편성에도 능숙해져 있었다. 그만큼 안테 로리에 머무르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고, 성장을 한 덕분이었다.
“이제 혼자서도 잘 해내겠는걸?”
“헤헤헤, 뭘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그러니까 오빠가 도와주셔야 돼요.”
그런 한시현의 대답에 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시현이 편성한 병력은 아이스 스파이로 천 마리와 실리스 팔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병력이었다.
‘이 정도면 슬슬 활동 범위를 넓혀도 될 거야.’
커티삭이나 안테 로리 근처의 던전은 모조리 공략이 끝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붉은 핏빛의 대지에는 아직 미공략된 던전이 다수 존재했다.
전부 엘프들의 영지에 있는 던전들이었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의 마을은 아멘드마와 코르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두 마을의 발전도는 커티삭보다 조금 낮거나 비슷한 상황으로 안테 로리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떨어졌다.
한마디로 현재 안테 로리의 전력으로는 충분히 공략이 가능했다. 나자르 T 스테르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엘프들과의 충돌을 빚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영지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만큼 안테 로리의 군사력은 전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