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리그너스 대륙전기 041화
<영지 정보(Status)>
안테 로리(개척 도시[E등급]) - ‘붉은 핏빛의 대지’
인구 - 3,071
보유 리스 - 4,940
보유 식량 - 12,749
병사 - 정예 오크 전사(E+) 100
내정 건물 - 식량 저장고 8, 시장 2, 주점 1
군사 건물 - 망루 1, 병영 1
리스 수입 - 610 / 월
식량 수입 - 876 / 월
특산품 - 없음
“음.”
안테 로리의 정보를 보며 호는 낮은 신음성을 내었다. 초창기 커티삭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의외로 남아 있는 인구 또한 상당했다.
하지만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하면 역시나 병사였다.
정예 오크 전사 백 마리로 삼천에 가까운 영지민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붉은 핏빛의 대지에는 마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엘프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이 호의 마음에 불안을 만들어내었다.
“어쩔 수 없지. 고블린 투척병부터 개발해야겠어.”
안테 로리는 원래 수인족의 도시였다. 당연하게도 수인족 병종들의 개발은 완료되었지만, 마족 병종에 관한 연구는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미 개발되어 있는 수인족의 다람쥐 창병이나 코르기를 양성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오크 전사와 마찬가지로 근접 병사들이었다.
그에 반해 고블린 투척병은 크게 쓸모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원거리 공격이 가능했다. 게다가 다크 엘프 궁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하위 병종인 고블린 투척병의 연구를 끝내야만 했다.
그리고 붉은 핏빛의 대지라는 숲이 많은 지리적 특성을 생각해 봤을 때 초반 병종의 능력치와 유용성은 수인보다는 마족이 훨씬 좋았다.
며칠 전 전투를 봐도 알 수 있었다.
“병종의 개발이 끝나면 내정에 관한 연구에 들어가야겠어. 그나마 병영은 남아 있으니까 따로 지을 필요는 없겠네.”
이미 커티삭에서 했던 일을 안테 로리에서도 해야 했기에 호는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하는 듯, 지겨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오빠, 뭐 해요?”
안테 로리에서의 첫 일을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시현의 목소리가 들려와 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어?!”
그러고는 어벙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붉은색 가젯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시현이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고는 호를 바라보았다.
“그 드레스 예쁜데?”
“그쵸? 그쵸? 예전에 입었던 옷 보다는 못해도 괜찮은 거 같아요. 동물 인간들…….”
“수인족.”
“네. 여기 사는 수인족들은 가젯이라는 직물로 만든 옷을 주로 입는다고 하는데, 실력들이 대단해요. 대충 이러이러한 옷을 입고 싶다고 설명하니까 바로 만들어주셨어요.”
열네 살의 어린 아가씨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늦깎이 여동생이 있으면 저런 느낌일까? 팔짝팔짝 뛰는 한시현의 모습에 호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여자에게 패션은 필수나 다름없을 테니 저런 한시현의 모습은 충분이 이해가 되었다.
하물며 커티삭에 있던 재봉 장인이라 불리는 몬스터들의 센스는 호가 보기에도 최악이었다. 게다가 무섭게 생긴 몬스터들과는 달리 수인들은 그나마 친근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가젯이라…….”
호는 공략본을 열어 가젯에 대한 내용을 검색했다. 살짝 주름지는 성격을 지닌 빳빳한 직물로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조젯이라는 이름을 지닌 직물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했다. 또한 가젯은 수인들이 주로 입는 옷의 재료라는 설명도 나와 있었다.
하지만 공략본에 나온 내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테 로리의 특산품이라.’
미노타우르스의 뿔로 만든 장궁이 커티삭의 특산품이라면 안테 로리에서는 가젯으로 만든 의복을 판매해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특산품 ‘가젯 의복’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 참. 가야 할 길이 멀긴 머네.”
호의 중얼거림에 시현이 자신의 옷을 슬쩍 살펴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안절부절못한 모습도 느껴졌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뇨. 그냥. 오빠가 싫어하는 거 같아서요. 사실 이 세계에서 이런 건 조금 사치잖아요.”
“아아.”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시현의 모습에 호는 조금 입맛이 썼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리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물론 해야 할 일은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저 정도의 사치를 누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빡빡하게 실을 당기다 보면 끊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것은 아니니까 괜찮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런데 정말 옷이 정말 괜찮은걸?”
“그…… 그래요?”
“응. 잘 어울리네. 뭐, 가젯으로 만든 옷도 가볍고 편하지만, 사실 최고로 예쁜 건 엘프가 만든 옷이지. 엘프실로 만든 옷은 진짜 공주님 드레스 같다고. 너 겨울 왕국이라는 만화 알지?”
“……아뇨. 그런 만화도 있었어요?”
“아, 실망이네. 엘사., 아니, 모를 수도 있겠다. 마이너한 만화였거든.”
너무 흥분한 모양이었다. 그녀와 자신이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
다행히 한시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 그쪽 세계에서도 2, 30대에 만화를 보는 남자들이 적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엘프실로 만든 옷은 가젯 의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편하고 예쁘지. 게다가 가볍기도 하고 방어력도 뛰어나.”
“그야말로 완벽한 옷이네요.”
“단점이라면 엄청나게 비싸다는 정도? 하지만 붉은 핏빛의 대지에도 엘프들이 살고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구할 수는 있을 거야.”
“정말요?”
시현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다시 밝아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옷 하나 얻으려고 엘프들과 한바탕 싸워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안테 로리를 발전시키는 게 먼저였다.
“그러면 엘프실로 만든 옷을 구하기 위해 일을 좀 해볼까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물론이지.”
시현의 물음에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영웅이 두 명밖에 없는 안테 로리는 일손이 부족해도 너무나 부족했다.
호가 살던 세계에서는 법적으로 15세 이하는 일을 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다지만, 이곳에서는 알 바 아니었다.
* * *
“확실히 커티삭보다는 낫네.”
농장에서 열심히 씨를 뿌리고 있는 수인과 오크들을 보며 호는 사탕과 비슷한 식감을 주는 수인족의 간식을 입에 물었다.
청포도 맛이 느껴지는 이 간식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던 가상현실 내에서 호가 즐겨 먹던 간식이었다. 그리고 한때 수인족의 마을이었던 안테 로리에서는 다행히 이 간식을 만들 수 있었다.
“키킷. 씨앗이 거의 다 뿌려져 갑니다!”
씨를 뿌리는 인부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호에게 다람쥐 머리와 털이 풍성한 꼬리를 지닌 수인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그 말에 호는 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사탕, 아니, 수인족의 간식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테 로리에 온 지 한 달, 그동안 호는 시현의 도움을 받아 고블린 투척병의 개발을 완료했고, 시장과 농장을 두 개씩 더 건설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빠른 속도로 발전을 시키고 싶었지만 이 세계의 화폐인 리스가 부족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된 건가?”
안테 로리의 정보창을 열어보니 남은 자금이 고작 1,000리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매달 벌어들이는 수입이 있기는 했지만, 지출이 수입보다 배는 더 많았다. 이대로라면 세 달 내에 영지가 파산할 터였다.
하지만 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단시일 내에 리스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인 던전의 공략이었다. 그리고 안테 로리 주위에는 E, F급의 미공략 던전이 아홉 개가량 존재했다.
“아, 오빠. 오셨어요?”
“응. 간단하게 먹을 걸로 하나 부탁할게.”
“네에!!!”
건설이 완료된 농장에 들렀던 호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주점이었다.
한시현이 관리를 하고 있는 주점은 안테 로리의 주 리스 수입원 중 하나였다. 또한 마을에 들르는 영웅들을 끌어모으는 장소기도 했다.
다만, 안테 로리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영웅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E등급 영웅까지 거부할 줄이야…….’
한 달간 안테 로리에는 총 다섯의 영웅이 방문을 했었다. 그리고 그중 둘은 천족과 엘프 영웅인지라 일찌감치 등용을 포기했다. 그가 속해 있는 마족과는 종족 상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령과 인간 영웅은 C등급 영웅이라 그런지 호의 등용 제안에 콧방귀만을 뀌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E등급의 수인 영웅까지 등용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한 이후로 호는 주점을 찾는 영웅에 대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등용도 하지 못할 거,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 여기 나왔어요.”
시현은 호에게 음식을 건넨 후 맞은편 의자를 빼내 앉았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어요.”
“네가 직접?”
“네. 커티삭에 있었던 때보다는 음식 종류가 많아서 좋아요. 신기한 음식도 많고요.”
“게다가 수인들의 음식이 우리에게는 입맛에 더 맞지.”
“맞아요! 아무리 서로의 식문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커티삭의 음식들은…….”
한숨을 내쉬는 시현을 보며 호가 피식 웃었다.
조리사로 전직했기 때문일까? 요리의 플레이팅이 제법이었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향기도 호의 식욕을 자극할 정도로 좋았다.
그리고 음식을 맛본 호는 혀에 느껴지는 맛에 자신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정말 맛있는데?!”
“헤헤? 그래요? 나중에 언니에게도 가르쳐 줄 생각이에요. 언니가 만들어주면 더 맛있을걸요?”
“……그렇겠지?”
이어지는 한시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진이 요리라.’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도마 위에 있는 햄을 써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몬스터의 살을 써는 게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마을 개발은 어때요? 제 눈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달라지기는 했는데……. 그래도 오빠가 더 잘 알 테니까.”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게 조금 그렇긴 한데,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수인들의 반발도 생각보다 없고.”
“맞아요. 다들 친절하게 잘 대해주세요.”
워낙 많은 종족이 힘 싸움을 하는 세계라 그런지 안테 로리의 주민들은 호와 마족 일행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 거기에 노예로 전락해 버린 전 영주 리아 캬베데의 모습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의 안테 로리는 수인과 마족이 섞여서 마을을 구성한 모양새였다. 거기에다가 영주는 소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테 로리에서의 불화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사실 커티삭보다 이곳이 편해요.”
“나도 그래. 오크보다는 견인족이나 다람쥐족이 선량해 보이잖아?”
“묘인족도요! 얼마나 귀여운데요!”
천진난만한 한시현의 말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람쥐와 견인, 그리고 묘인까지. 수인 왕국을 이루는 다양한 종족 중에서 안테 로리에서 만날 수 있는 수인은 이 세 종족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세 종족의 공통점이라면 겉으로 보기에는 귀엽고, 친근감 있게 생겼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묘인족과 견인족의 바탕은 고양이와 개. 소환자들에게 굉장히 익숙한 생김새였다.
“걔네들 발톱에 한번 긁혀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올걸?”
하지만 그들의 눈에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수도 있었다.
뭐, 안테 로리에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시현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주점의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