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리그너스 대륙전기 040화
“꺄하하하하!”
안테 로리의 점령.
페릴 예노스가 전쟁의 승리라는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호가 피에 엉겨 붙은 머리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총 527의 병사가 사망했습니다. 먼저 다크 엘프 궁수가 42명, 그리고 정예 오크 전사가 485마리 죽었습니다.”
“흐흥.”
전력이 반 토막이 났다. 하지만 수인족을 무찌르고 얻은 성과와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은 피해였다. 더욱이 이번 전쟁의 승리로 마족들은 안테 로리라는 마을을 얻을 수 있었다.
페릴 예노스도 그런 것을 아는지 병사들의 피해에 딱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냥 마음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수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들의 영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아직 붉은 핏빛의 대지에는 마족과 적대하는 종족인 엘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차피 병사들은 다시 고용하면 되니 괜찮아.”
“네, 그렇습니다.”
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라 그래서일까? 많은 오크가 수인족 병사들의 손에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딱히 가슴이 찡하다거나 슬프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생각을 하던 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고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호의 귀에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리아 캬베데.’
크게 몸을 돌리니 수인 영웅 하나가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수인족의 A등급 영웅이자 안테 로리의 영주였던 리아 캬베데였다.
“취익! 맞아라! 정의의 몽둥이 찜질이다!”
“아아악!!!”
그리고 오크가 몽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는 찢어지는 비명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아주 멋진 모습이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페릴 예노스의 말에 호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들에게 고문을 당하는 리아 캬베데의 모습에 딱히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거나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수인족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자신이 저런 모습이 되거나 죽었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는 것 같았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지 순간 놀랍긴 했지만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했다.
‘그나저나 저러다가 죽으면 곤란한데.’
오크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는 리아 캬베데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었다.
Korea사의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유저가 다른 종족의 영웅을 포로로 만들었을 때 상대 영웅을 동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여럿 존재했다.
과연 그 시스템이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틀을 딴 이곳에서도 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시도는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냥 시체로 만들어 버리기에는 아쉽다고.’
더욱이 리아 캬베데는 A등급 영웅이었다.
그때 페릴 예노스의 옆에 서 있던 멜리아 비쉬가 말했다.
“일단은 안테 로리의 영주를 임명해 주셔야 합니다.”
“안테 로리의 영주? 멜리아는 어때? 이제 커티삭에서 독립해야지?”
“거절하고 싶은데요. 수인들밖에 없는 안테 로리는 저한테는 그리 매력적인 곳이 아니어서요. 그리고 제가 독립을 하게 되면 예노스 님의 방탕함이 만마의 지배자이신 쉐르난비체 폐하의 귀에까지 들릴 게 걱정이 되어서 안 되겠네요.”
“내가 그렇게까지 게으르다고?”
자신을 향한 페릴 예노스의 질문에 호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을 할 뻔했다. 사실 호가 내정을 맡기 전까지 커티삭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호가 아니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페릴 예노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면 이 녀석에게 맡겨야겠네. 커티삭을 발전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안테 로리도 제법 크게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어? 아무리 안테 로리가 수인으로 가득한 도시라고 해도 말이야.”
“확실히 보여준 게 있으니……. 저는 찬성입니다.”
호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자신이 원했던 결과이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영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애써 곧 태연한 표정을 짓고 페릴 예노스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호는 이번 전쟁에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수인족의 영지였던 ‘안테 로리’의 영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장 안테 로리의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커티삭으로 돌아가 전후 처리를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함께 안테 로리로 가야 할 인물이 하나 더 늘었기에 그녀 또한 챙겨야만 했다. 바로 시현이었다.
“어째서 시현이가…….”
“페릴 예노스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말도 안 돼. 마을을 발전시키는 내정에 관한 거라면 제가 더 쓸모가 있지 않나요?”
아스트리드 벨의 입꼬리가 추욱 내려앉았다. 한시진과 사이가 멀어진 그녀는 자신의 편이나 다름없는 호 없이 커티삭의 괴물들이나 시진과 함께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와 같은 이 세계의 존재들은 소환자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그에 반해 시현이는 언니와 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슬퍼하거나 크게 낙담을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니인 시진이 더욱 걱정을 하고 있었다.
“호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돼.”
“응응. 걱정 마. 내가 오빠가 한눈파나 안 파나 잘 감시할게.”
“감시? 그, 그런 쓸데없는 행동은 안 해도 돼. 너는 네 안전부터 먼저 챙기라고.”
“그으래? 요즘 호 오빠, 예쁜 언니들한테서 인기가 제법 많던데. 다크 엘프라고 했던가? 뭐, 사랑에 종족은 없다고 했으니까. 아차, 언니는 잘 모르지?”
‘들린다, 이것들아…….’
그런 자매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호는 쩝 입맛을 다셨다.
이왕이면 시현보다는 시진이나 아스트리드 벨과 함께 안테 로리로 떠나는 게 좋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 둘이 영지를 발전시키는 게 훨씬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릴 예노스의 명령이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혼자보다는 둘이 나았다.
그렇게 호는 한시현과 함께 정예 오크 전사 백 마리를 데리고 한때 붉은 핏빛의 대지에 존재했던 유일한 수인족의 마을 ‘안테 로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라……. 그렇게까지 가깝지는 않네.”
검은색 갈기를 휘날리는 말에 탄 호가 다각다각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안테 로리로 향하는 일행은 총 112명. 호와 한시현, 그리고 정예 오크 전사에 노예 열 명이 포함된 숫자였다.
한시진과 아스트리드 벨은 마지막까지 자신들 역시 안테 로리로 가고 싶어 했지만 페릴 예노스의 한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목만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는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화사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바꿔야만 했다.
이 세계의 생활에 조금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이 세계의 영웅인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는 아직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쉬운 것은 호도 마찬가지였다. 두 여인 중 하나라도 있으면 안테 로리를 발전시키는 게 한결 쉬웠을 터였다. 한시현보다는 말이다.
어쨌든 떠나기 전, 어떻게 커티삭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 두 여인에게 일러두었으니 커티삭에 크게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왜요?”
“아니. 아무것도.”
말, 아니, 망아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갈색의 말에 탄 한시현이 호의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가 대답을 듣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백 마리가 넘는 오크와 함께 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딱히 무섭다거나 두려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가끔 취익하는 오크들의 거친 콧소리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커티삭 밖에 나온 것이 신기한지 한시현은 겁 없이 이리저리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흥흥흥.”
‘진짜 의외네. 그 언니에 그 동생이라는 건가?’
언니와 헤어졌다고 울고불고하거나 혹은 땅으로 파고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소풍이라도 나온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서 떨어졌을 때의 한시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의외였다.
뭐, 저런 태도가 호에게는 좋았다.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던 도중 말발굽 소리와 오크들의 거친 숨소리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호의 귀에 살짝 들려왔다. 누군가가 아파서 내는 신음 소리였다.
그리고 호는 신음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리아 캬베데.’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팔과 다리가 쇠사슬로 묶인 한 수인 하나가 일행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오크 하나가 쇠사슬을 잡아당길 때마다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포로로 잡힌 리아 캬베데에 대한 페릴 예노스의 흥미는 빠르게 식었다. 그 덕분에 호는 이렇게 그녀를 안테 로리로 데려갈 수 있었다.
굳이 그녀를 안테 로리로 데려가는 목적도 있었다. Korea사의 게임처럼 호는 강제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동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Korea사의 게임이라면 대부분 있는 시스템이지.’
바로 마스터, 혹은 오너 시스템이었다.
솔직히 호는 이 시스템이 이 세계에서까지 존재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상대의 희망을 무너뜨리거나 혹은 상대가 저항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아넣은 뒤 강제적으로 동료로 만들 수 있는 이 능력은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플레이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저의 특권이었다.
단점이라면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데다가 한 번 능력을 사용하면 재충전의 시간이 꽤 길었다. 하지만 솔직히 게임사에서 유저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세계에서도 게임과 마찬가지로 마스터, 혹은 오너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호의 손목에 새겨진 1이라는 숫자가 바로 그 증거였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리아 캬베데
2. 성별 : 여(102)
3. 종족 : 묘인족
4. 소속 : 수인 왕국
5. 레벨 : 233
6. 직업 : 제네럴(A)
7. 세부 능력
통솔 : 262(-200)/ 300(-200)(A)
무력 : 276(-200)/ 300(-200)(A)
지력 : 266(-200)/ 300(-200)(A)
정치 : 277(-200)/ 300(-200)(A)
매력 : 272(-200)/ 300(-200)(A)
그리고 리아 캬베데는 자신의 동료에게서 구출될 가능성도, 그리고 그녀를 위해 수인들이 군사를 일으킬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엄청나게 줄어든 세부 능력만 봐도 그랬다.
또한…….
띵동.
-리아 캬베데의 마음이 47% 꺾였습니다.
친절하게도 메시지 또한 호가 원할 때마다 알아볼 수 있었다.
어쨌든 A등급 영웅인 그녀를 동료로 만들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더욱이 리아 캬베데는 능력이 전체적으로 균등한 만능형 영웅이었다.
“안테 로리라…….”
조금이나마 발전시켰던 커티삭보다는 못하지만 안테 로리도 인구 사천이 넘는 마을이었다.
다만, 저번의 약탈과 마족의 손에 점령된 이유로 인해 영지민의 수가 꽤 줄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안테 로리가 커티삭과는 달리 100% 호의 생각대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영지의 발전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봤던 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일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