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리그너스 대륙전기 039화
“이이익!!!”
궁병이 등장하고 전투가 이상하게 흘러가면서 리아 캬베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앞에서는 페릴 예노스가 미친년처럼 달라붙고 있었고, 뒤에서는 자신의 병사들이 나자빠지고 있었다.
회전을 펼친 것까지는 좋았다. 수적으로도 우위인데다가 리아 캬베데는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정예 오크 전사들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밀집대형을 이룬 다람쥐 창병과 정예 오크 전사들이 맞부딪치며 양측은 비슷한 비율의 전사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면 수적으로 훨씬 우위인 수인족이 최종적인 승자가 될 터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등장한 화살비가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
다람쥐 창병과 코르기는 활을 사용하는 다크 엘프 궁병을 상대로 속수무책이었다.
파앗!!!
“칫!”
눈먼 화살들이 주위로 떨어지려고 하자 리아 캬베데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그러고도 다시 한번 몸을 크게 뒹굴어야 했다. 날카로운 철 부스러기가 달린 채찍이 그녀의 몸을 찢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꺄하하하하!!! 꼴좋다. 우리가 싸운 게 몇 년째지?”
“…….”
“이제 긴 전투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어, 리아 캬베데.”
“웃기는 소리.”
페릴 예노스의 이죽거림에 리아 캬베데는 땅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세 개의 날이 박힌 무기를 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더러운 서큐버스의 배때기에 자신의 클로를 박아 넣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꽤 당황하는 모습인데? 마족의 창녀라고 나를 내려다보던 너의 그 눈은 어디로 갔지? 진짜 그 눈을 언제쯤 찢어버릴 수 있을까 하고 기대를 했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어.”
“내 눈이 찢기기 전에, 네년의 머리통이 터져 나갈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리아 캬베데의 눈동자는 빠르게 전장을 훑고 있었다. 다크 엘프 궁병과 정예 오크 전사의 톱니바퀴와도 같은 유기적인 공격에 퇴각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병사들의 퇴각을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대열을 이루지 않고 퇴각했다간 오히려 마족 병사들의 밥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회전이 펼쳐지고 있는 이 평원을 벗어나는 순간 맞이하게 되는 드넓은 콜리안 숲은 마족들이 좋아하는 전장이 될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영웅의 존재가 간절하게만 느껴졌다.
원래 수인족의 마을인 안테 로리에는 총 세 명의 영웅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함진규는 마족의 식량 창고를 공격했다가 땅속에 묻혔다. 비록 별 볼 일 없는 능력의 소유자지만 지금 그가 있었다면 상황은 분명 나아졌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마족 측에서 오크 병사들을 지휘하며 명령을 내리는 이들이 마족의 소환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야아앗!!!”
콰앙!
페릴 예노스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채찍이 땅바닥에 내려쳐지는 순간 폭탄이 터진 것 같은 폭발음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페릴 예노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하는 한편,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카캇!!!
리아 캬베데가 페릴 예노스의 얼굴을 향해 권투 선수처럼 두 번의 잽에 연이어 강한 레프트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의 공격은 페릴 예노스가 휘두른 채찍에 막히고 있었다.
‘만만치 않아.’
리아 캬베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승부를 내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고작 서큐버스 주제에 페릴 예노스의 전투력은 그녀와 맞먹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키키키킷! 킷!”
“머어엉! 멍!!!”
“옥스 아너!”
멀리서 병사들의 고함이 그녀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다람쥐 창병과 코르기들로 이루어진 그녀의 군대는 오크들로 이루어진 마족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리아 캬베데의 눈동자는 점점 더 암울해졌다.
* * *
“다시 한번 화살을 발사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응.”
한 다크 엘프의 말에 한시이 팔을 들어 올렸다. 또다시 화살비가 전장을 휩쓸었고, 2, 30명 정도의 수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원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한 궁병의 존재로 인해 전황은 자신들에게 상당히 유리해져 있었다.
거기에 돌격병이나 다름없는 정예 오크 전사는 수인족의 진영을 붕괴시키며 학살과 다름없는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시진은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휘 체계가 엉망이야. 지휘관만 있었어도 이런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한시진은 어이없게 무너지는 수인족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다크 엘프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더 화살을 날렸을까? 도합 이천이 넘는 병사가 맞붙은 대회전이지만 한 시간, 아니, 사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결과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취익! 췩!”
“취췩!!!”
오크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한시진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가 따로 빼낸 오십 마리의 오크들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궁병의 호위였다. 하지만 전투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자신들도 공을 세우고 싶은 모양인지 오크들은 전장을 바라보며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전투가 펼쳐지는 전장으로 시선을 옮기자 정예 오크 전사들의 거센 공격에 뒤로 밀리듯 후퇴하기 시작하는 수인족의 병사들이 한시진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
“공격! 후퇴하는 수인족의 병사들을 추격한다!”
한시진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오십의 정예 오크 전사의 눈에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눈동자를 희번덕 뜨고 있는 그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수인족의 피와 살을 취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다크 엘프 궁병들도 품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수인족의 병사들은 그들의 눈에는 먹잇감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옥스 아너!!! 승리를 바치자!”
“적들에게 어둠을!”
한시진 또한 자신의 검 브리얀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명검 반열에 드는 검은 결코 아니었지만, 브리얀드 소드는 호가 그녀에게 준 검이었다.
잠시 따뜻한 눈빛으로 브리얀드 소드를 바라보던 한시진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취이익!! 췩!!!”
그녀의 스피드는 먼저 달려 나가기 시작한 오크 전사들보다도 빨랐다. 심지어 재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는 다크 엘프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었다.
“우리들을 위해서. 여기서 죽어버려.”
그리고 가장 먼저 다람쥐 병사의 앞에 도착한 그녀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키킷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뜬 다람쥐 창병과 눈동자가 마주쳤지만 한시진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피육음과 함께 검에 뼈가 갈리는 우두둑 소리와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검에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더하고 있었다.
“취에에엑!! 췩!!!”
그리고 한시진의 뒤를 따라 돌격한 정예 오크 전사들과 다크 엘프 궁수들이 이어서 수인족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인족과 마족의 전투는 수인족의 패배로 끝이 나고 있었다.
영웅들끼리의 싸움 역시 비슷한 방향이었다.
푸욱!
“끄으윽!!!”
날카로운 단검이 깊숙하게 박히며 카르인의 하반신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목숨이 먼저였다. 피가 묻은 단검을 혀로 핥으며 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서큐버스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도…… 도망가야 해!’
다시금 단검을 휘두르며 공격하려는 멜리아 비쉬를 피해 카르인은 마족의 병사들이 없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키키킷! 킷!!!”
“머어엉!”
멀리 그의 귀에 들리는 병사들의 목소리에는 힘겨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정예 오크 전사와 다크 엘프 궁병으로 이루어진 마족의 군대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군대를 물리치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멜리아 비쉬가 빠르게 날개를 펼쳐 도망을 치는 카르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그녀의 눈에 정예 오크 전사를 지휘하며 롱소드를 들고 외치는 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법이란 말이야?”
빠르게 전장을 훑은 멜리아 비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에 병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라도 있는지 호와 한시진 이 두 소환자는 굉장히 능숙하게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마치 당연히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존재인 까닭에 전투력만큼은 자신들과 비교 대상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충분히 쓸 만한 녀석들이었다.
전투는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수인족의 대장이었던 리아 캬베데는 페릴 예노스의 채찍에 휘감겨 내동댕이쳐지고 있었고, 그 주위를 정예 오크 전사들이 포위한 모양새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리아 캬베데가 A등급 영웅이라 할지라도 몸을 빼기가 힘들었다. 설령 몸을 뺀다 하더라도 마족 병사들의 거센 추격을 받아야 했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멜리아 비쉬는 도망친 카르인을 붙잡아 단검을 찔러 넣었다.
치열했던 전투 끝에 회전에서 살아남은 수인족의 병사는 고작 이십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마족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팔백이었던 정예 오크 전사 중 반 수 이상이 사망했고, 다크 엘프 궁병 역시 마지막 돌격에서 오분의 일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취이이익! 치이익!!!”
“옥스 아너!!!”
“어둠에게 영광을!!!”
그렇게 마족과 수인과의 전투는 마족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전투는 끝이 났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돌진해라!!!”
수인족의 병사를 괴멸시킨 뒤, 페릴 예노스가 이끄는 마족의 군대는 곧바로 수인족의 도시 안테 로리로 향했다.
모든 병사가 회전에서 죽어버린 데다가 대장인 리아 캬베데마저 마족들에게 붙잡힌 상황에서 안테 로리의 영지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악!!! 마…… 마족이 쳐들어온다!!!”
“성문을 닫아!!”
“우왁?! 살려줘!!!”
그리고 살인, 강간, 방화, 폭행 등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광경이 안테 로리에서 연출되기 시작했다.
‘이래서 경험이 무섭다고 하는 건가?’
눈으로 보기에는 끔찍하고 더러운 장면도 있었지만, 워낙 가상현실게임에서 많이 봐왔던 장면이라서일까? 호는 딱히 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원래 군인이었기 때문인지 한시진도 크게 영향을 받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게 안테 로리와 안테 로리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들은 마족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로써 마족은 커티삭과 안테 로리라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두 개의 도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