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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38화 (38/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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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38화

먹구름이 우중충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그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된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가 호의 귀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투를 벌이기에는 나쁘지 않은 날씨인 것 같았다.

호는 얼굴 가득 긴장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멀리 수백의 점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람쥐 병사과 코르기, 수인족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수인족 가장 앞에 고양이처럼 네 발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묘인 여성이 있었다.

‘리아 캬베데.’

호는 오랜만에 보는 리아 캬베데의 모습에 왠지 모를 반가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안테 로리의 대장이자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의 뒤로는 검은색의 털을 가진 묘인족 하나가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수인족의 C등급 영웅인 카르인이었다.

‘영웅은 둘뿐인가?’

점점 수인족의 병사들이 가까워질수록 호는 집중해서 상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수인족 중에서는 리아 캬베데와 카르인을 제외하면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없어 보였다.

“좋아.”

호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일단 영웅의 숫자에서는 자신들이 우위였다. 질도 마찬가지였다.

페릴 예노스는 무력만큼은 A급 영웅 못지않은 소유자. 충분히 홀로 리아 캬베데를 상대할 수 있었고, 카르인은 멜리아 비쉬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쪽에는 한시진도 있었다.

비록 E등급에 불과하지는 했지만 한시진은 E등급이면서도 E등급의 탈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녀는 본신의 실력만으로도 다람쥐 병사나 코르기 정도는 충분히 여럿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호 자신도 마음만 먹는다면 다람쥐 병사 두셋 정도는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점점 마족의 병사들을 향해 다가오던 수인족들은 어느 위치를 기점으로 움직임을 딱 멈췄다. 그러고는 수인족의 C등급 영웅 카르인이 앞으로 나서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더러운 마족의 존재들아! 나는 수인족의 카르인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옷을 벗고 백기를 내건다면 넓은 아량으로 목숨만은 살려주마!”

“키키킷!! 킷킷!!!”

“왈!!! 왈왈!!!”

“…….”

나름대로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수인족의 함성에 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도 저 소리가 개소리라는 것을 아는지 귀만 후벼 파고 있었다. 아니, 연설이 끝나고 정말 개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니 개소리가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수인족이 저렇게 도발을 걸어오면 받아쳐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상대 쪽에서 대장이 아닌 부장이 나섰다면 이쪽도 급을 맞춰주는 게 맞았다.

다만, 마족의 대장님께서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공격!!!”

“취이익!! 취익!”

“가자! 옥스 아너!”

“취에엑!!! 수인들의 피로 온몸을 적셔라!!!”

“뭐…… 뭣?!”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명령에 호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오크들은 그 누구보다도 페릴 예노스의 명령에 충실했다. 곧 비린내보다 독한 오크들의 체취가 곧 평원 가득 풍기기 시작했다.

“이…… 이런 비!!!”

갑작스러운 오크들의 돌격에 카르인이 비겁하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양손에 날카로운 단검을 쥔 멜리아 비쉬가 그의 몸을 난도질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잠깐 코믹과도 같았던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키킷!! 킷킷!!!”

오크들의 돌격에 다람쥐 병사들이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당황하지 않은 것은 수인족의 대장 리아 캬베데뿐이었다.

“방진!!!”

자신들에게 미친 듯이 달려오는 정예 오크 전사들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다람쥐 병사들은 리아 캬베데의 명령에 따라 빠른 속도로 진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통솔력 수치가 높은 A등급 영웅다운 모습이었다.

곧 처처척 하는 소리와 함께 다람쥐 병사들이 순식간에 진영을 이뤘고, 그 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만들어진 전투 대형 팔랑크스를 보는 것 같았다.

다만 팔랑크스와 비교해 다람쥐 창병의 진영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창이 팔랑크스처럼 길지 않았다. 그리고…….

“다람쥐 병사들은 방패를 들고 있지 않지.”

함성 소리와 함께 정예 오크 전사가 다람쥐 병사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푸욱 하는 살이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팔다리는 물론 목이 잘려 나가는 오크들의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람쥐 병사의 피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시스템에 따르면 정예 오크 전사의 방어력은 오크 전사에 비해 1 높은 3. 그에 반해 다람쥐 병사의 공격력은 1이었다. 그리고 이 설정은 이 이상한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었다.

푹! 푹!!!

정예 오크 전사가 던진 도끼에 다람쥐 병사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 진영을 메꾸기 위해 뒤에 있던 다람쥐 병사가 앞으로 창을 내질렀지만, 오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람쥐 병사의 진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오크 열댓 마리가 측면 쪽으로 돌아 다람쥐 병사들을 덮치자 그들을 막기 위해 코르기들이 정글도와 비슷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죽어버려!!!”

페릴 예노스와 리아 캬베데는 어느새 서로 달라붙어 한바탕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무력 수치가 높은 영웅들답게 둘이 펼치는 전투에는 그 어떤 병사들도 접근하지 못했다. 까닥했다가는 그냥 어느 한 부위가 날아가기 십상이었다.

이는 멜리아 비쉬와 카르인도 마찬가지였다. 호각세를 보이는 페릴 예노스와 키아 캬베데와는 다르게 멜리아 비쉬는 압도적으로 카르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흐음…….”

그리고 뒤에서 안전하게 전장을 모습을 살펴보던 호는 어느 타이밍을 기점으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크가 뿌우우우 하고 나팔을 울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나팔 소리가 울리자마자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의 함성 소리만큼이나 큰 쇳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시진과 함께 은밀한 움직임으로 새벽부터 전장 밖의 나무들을 엄폐물 삼아 은밀하게 숨어 있던 다크 엘프 궁병들이었다.

진흙으로 냄새를 지운 그들은 냄새를 앞세운 코르기의 정찰에도 정체를 들키기 않고 전장에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코르기들의 목에 자신의 무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촤라라라락!!!

“키키킷?!”

“키킷!”

어디선가에서 갑작스레 날아오는 화살에 몇몇 다람쥐 병사가 그들 특유의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당황한 다람쥐 병사 몇이 재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곧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팔랑크스의 단점은 이동 및 진영의 방향 전환이 굉장히 느리다는 점이었다.

호는 그런 사실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경험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다람쥐 병사들이 진영을 만들도록 시간을 준 후 원거리로 타격을 하는 수법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전략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온 화살들은 정확하게 다람쥐 병사들의 진영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발목까지 올라온 풀밭을 이백의 다크 엘프 궁병이 쏘아대는 화살이 그대로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킷킷거리는 다람쥐 창병들의 비명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정확히 얼마만큼의 다람쥐 창병들이 피해를 입었는지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팔랑크스와 비슷한 진영을 유지하고 있는 다람쥐 창병들의 진영이 다크 엘프 궁수의 화살 공격에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정예 오크 전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돌격!!! 취익!”

“옥스 아너!!!”

“페릴 예노스 님에게 영광을!!! 취이익!!!”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정예 오크 전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다람쥐 병사들을 몰아붙였다. 코르기들이 그들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정예 오크 전사에 비해 코르기들의 숫자는 굉장히 적었다. 그리고 이는 전황에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퍼어어억!!!

“끼익!”

코르기들의 방어를 뚫은 정예 오크 전사들이 다람쥐 창병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맹렬한 공격에 다람쥐 창병들이 하나둘씩 어디 한군데가 부서져 나가며 목숨을 잃어가자 진영이 점점 더 빠르게 붕괴되어 갔다.

“킷!!! 키킷!”

다람쥐 창병들은 자신들의 밀집 진영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정예 오크 전사를 상대로 난전을 피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족의 병사에는 정예 오크 전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발사!”

쐐애애액!!!

다시 한번 다람쥐 창병과 코르기들로 이루어진 수인족의 병사들 사이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깊숙하게 진입한 오크 병사들도 있었던 탓에 아군의 피해도 조금 나오기는 했지만 적들의 피해에 비한다면 아주 미비한 정도에 불과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더니만…….”

치열하게 전투가 펼쳐지는 전장을 보며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의 상황은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죽는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정예 오크 전사는 팔다리에 화살이 꽂혀 바닥에 쓰러진 수인족 병사들에게 무기를 휘둘러 목숨을 끊어내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겠어.”

비록 수인족들의 반격에 정예 오크 전사들도 많은 수가 죽어나가는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예상 범주 내의 피해였다.

통솔력과 무력 수치 162, 292의 페릴 예노스, 그리고 통솔력과 무력 수치 262와 276의 리아 캬베데.

능력의 수치로만 따지면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보다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가 평균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저 차이는 F랭크 병사인 다람쥐 창병이 E+랭크의 정예 오크 전사를 상대로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인 병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궁병의 유무가 모든 것을 박살 내었다.

“다크 엘프 궁병이 없었다면 전술을 달리 생각해야 했을 거야. 혹은 코르기의 숫자가 더 많았다면 농성을 펼치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궁병의 존재는 다람쥐 창병의 장점인 밀집대형을 분쇄했고, 난전이라는 정예 오크 전사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현재 각각 부대를 지휘하는 영웅의 통솔과 무력의 차이로는 커버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더욱이 리아 캬베데는 페릴 예노스에게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통솔력과 무력 능력은 이런 전황도 손쉽게 뚫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리아 캬베데가 아닌 최소 수인족의 S등급 영웅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어쨌든 전투는 자신들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머어엉!!! 몇 명이나 죽었어?! 멍!!!”

뺨에 상처가 나 있는 코르기 하나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코르기의 물음에 대답하는 수인족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저 마족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바빴다.

전투 중 그들을 지휘하는 영웅이 없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수인족의 병사들을 통솔해야만 하는 리아 캬베데나 카르인은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를 상대로 몸을 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족에게는 호가 있었다. 그리고 한시진도 있었다.

만약 다람쥐 창병이나 코르기가 F, E랭크의 병종이 아닌 고 랭크의 병종이었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적어도 고 랭크 병사들은 자신들을 지휘하는 영웅이 없다 해도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노력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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