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리그너스 대륙전기 035화
“수인들이 침입했습니다!”
“빌어먹을……. 타이밍 더럽네.”
하지만 호가 방 안에 들어서서 침대에 눕자마자 일이 터졌다. 다크 엘프 전령이 다급한 모습으로 커티삭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곧 페릴 예노스의 이름으로 회의가 소집되었다. 참석자는 페릴 예노스 본인과 멜리아 비쉬, 그리고 호였다.
“아직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고양이 녀석이 감히 이 몸의 커티삭을 노린단 말이지?”
페릴 예노스가 발끈하며 말했다. 리아 캬베데. 수인의 A등급 영웅인 그녀가 커티삭을 노리고 군대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발정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지요. 아니면 커티삭의 발전된 상업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거나?”
“반짝이는 금화를 탐낸다 이거야?”
“아무래도 욕심이 나겠죠? 솔직히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은 완전히 촌락이었잖아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그렇긴 했지.”
집무실에 자리를 잡은 호는 편안한 표정으로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 두 영웅의 대화를 들었다. 믿고 있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두 영웅도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기야 이제까지 오크 전사와 고블린 투척병만으로도 수인족의 도발을 잘 막아냈던 둘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커티삭은 예전의 낙후했던 영지가 아니었다.
“지휘관은 리아 캬베데.”
‘리아 캬베데…….’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되겠지만, 그녀는 호가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할 무렵 함께했던 수많은 영웅 중 하나였다.
“회색 갈기 부족인 그녀는 두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안테 로리의 대장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끌고 있는 병력은 약 천이백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안테 로리에서 천이백……? 언제 고양이가 그렇게까지 새끼를 쳤지? 언제나 많아봤자 사오백 정도였는데? 이거 정말로 한판 해보자는 거야?!”
페릴 예노스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런 페릴 예노스의 표정에 호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릴 예노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리아 캬베데는 안테 로리에 주둔하고 있는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커티삭으로 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 엘프족도 있을 텐데?’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는 마족을 포함해 엘프족과 수인족이 힘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엘프족이었다. 마족과 수인족과는 달리 엘프족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 영지를 두 개나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리아 캬베데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커티삭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것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수인족의 마을인 안테 로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엘프족이 그 점을 노리면? 수인족의 군대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야 캬베데는 군사를 움직였고, 호는 그 점이 굉장히 미심쩍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전쟁 준비를 하자! 캬아아앗!”
페릴 예노스가 소리쳤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특유의 광소가 흘러나왔다. 많은 피가 흘리는 전쟁에 페릴 예노스는 기뻐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몸이 찌뿌둥한 찰나였다.
그런 예노스의 광소에 생각에 빠져 있던 호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곧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나 리아 캬베데가 전군을 이끌고 커티삭을 노린다는 보고에 엘프와 수인과의 동맹이 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봤었다.
하지만 엘프족과 수인족은 천족과 마족만큼이나 사이가 안 좋은 관계.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호! 내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어떻게 되지?”
“정예 오크 전사 칠백오십과 다크 엘프 궁병 이백입니다.”
호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현재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F랭크 병종인 고블린 투석병은 다크 엘프 궁병의 하위 호환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터라 커티삭에서 자취를 감춘 지 조금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면 다크 엘프 궁병 부대가 훈련을 마치게 됩니다.”
호는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벌어질 수인들과의 전투에 훈련을 받고 있는 다크 엘프 궁병 부대까지 나설 일은 없어 보였다. 일주일이라면 어떻게든 전쟁의 승패는 갈려 있을 것이라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전투의 향방은 백중세.’
병사의 수는 분명 수인들이 우위였다. 하지만 수인 병사들의 질을 예상해 봤을 때 병사 개개인의 능력은 마족이 훨씬 위였다. 게다가 랭크도 높았다.
영웅들끼리의 전투 역시 비슷비슷했다. 수인들에게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가 있다면 마족에게는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라는 B등급 영웅이 둘이나 있었다.
‘아, 잘못 생각했군.’
하지만 호는 곧 실소와 함께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마족의 영웅은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급 사관으로 전직한 자신뿐 아니라 B등급 영웅들에 비한다면 부족한 편이지만 충분히 돌격 대장 역을 맡길 수 있는 무위를 지닌 한시진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호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엘프 및 수인들과 붉은 핏빛의 대지의 패권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 수인족의 공격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이른 시기에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갑작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미 커티삭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상황이었다.
* * *
“어…… 언니! 언니!”
“왜 그리 호들갑이야?”
고블린 한 마리를 대동하고 다급하게 달려오는 시현을 보고 시진이 동생을 나무랐다. 길에서 저렇게 달리다가 미노타우르스와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하지만 시현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시진에게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손짓 발짓까지 더해가며 말했다.
“크…… 큰일이야! 큰일이라고!”
“큰일? 뭐가 큰일인데……. 아!”
시현의 이상한 행동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시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다크 엘프 전령이 황급히 성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었다. 필시 평범한 연유는 아닐 터였다.
“전쟁이야! 수인들이 커티삭에 쳐들어온대!”
“수인족이?!”
수인들이 커티삭을 공격한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 시진의 머릿속에 호가 떠올랐다.
함께 던전을 공략을 하면서 그녀는 호가 수인들과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었다. 또한, 그 전투에서 호가 수인족의 소환자 한 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괴로워했던 사실까지 말이다.
“설마…….”
수인들이 커티삭을 공격하는 이유가 아마 호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다면 호가 위험했다.
“큰일이야. 벌써 페릴 예노스 님의 명령을 받아 호 오빠가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어. 언니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커티삭에서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육 개월. 사람이 어째서 적응의 동물이라고 불리는지 증명하기라도 하듯 한시현도 어느새 커티삭의 생활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시진과는 다르게 한시현은 주로 커티삭의 건물을 건설하거나 주점에서 생활하며 커티삭을 찾아오는 영웅을 살피는 게 주된 임무였다.
비록 그녀가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커티삭의 주민인 몬스터들과 이야기를 하고 부리고 다루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언니와 호가 묘한 관계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호와 함께 훈련을 하거나 던전을 공략하고 올 때면 유독 그와 관련된 대화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빨리 준비해야지?”
“뭐…… 뭐를?”
“뭐기는. 호 오빠와 함께 안 있을 거야?”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댄 채 시현이 타박하듯 언니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는 고블린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케켁! 켓! 호 님께서 찾으신다!”
“찾아?”
“키잇! 출진이다! 출진이다!”
시진의 반문에 고블린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몬스터와 동생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한시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니 처음 던전을 공략했을 때 호가 건네주었던 검 브리안드 소드가 만져졌다.
“이 마을은 안전할 거야. 위험할 것 같으면 고블린하고 미노타우르스하고 같이 있을게.”
그런 언니의 모습에 시현이 슬쩍 눈동자를 올려 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커티삭에 있는 소환자들이 전쟁의 관한 소식을 듣고는 각자 움직이는 동안 페릴 예노스의 명령을 받은 호는 빠르게 출진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취익! 취익!”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경험해 봤던 익숙한 일인 터라 출진 준비를 마치기까지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준비가 끝난 것은 정예 오크 전사로 이루어진 보병대였다.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가 맡을 부대로 부장은 멜리아 비쉬. 한마디로 수인족의 영웅인 리아 캬베데를 노리는 최정예 부대였다.
그 뒤로 호가 소수의 정예 오크 전사와 다크 엘프 궁병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페릴 예노스를 따를 예정이었다. 전투 시 그녀를 뒷받침하는 한편 감당이 불가능한 리아 캬베데를 제외한 나머지 수인들의 수를 줄이는 게 목표였다. 당연하겠지만 부장은 한시진이었다.
“가자! 오크들아!!! 출진이다! 다들 피의 축제를 시작한다!!!”
“취이이익! 취엑!”
“오옥스!! 아널!”
페릴 예노스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두터운 중갑을 걸친 정예 오크 전사들이 함성과 함께 진군하기 시작했다.
“영주님을 위해서 적들에게 어둠을.”
정예 오크 전사들의 뒤를 따라 다크 엘프 궁병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예 오크 전사들의 거칠고 투박한 행군에 비해 그들의 움직임은 발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고 또한 조용했다.
수인들을 맞아 커티삭의 모든 병력이 출진하는 것이다. 훈련 상태도 좋았다.
‘이 정도면…….’
한시진과 함께 말을 타고 병사들의 뒤를 따르던 호는 온몸 가득 투기를 뿜어내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는 커티삭 만큼이나 높은 랭크의 병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영지는 없을 것이라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이미 정찰을 통해 엘프와 수인이 커티삭보다 등급이 떨어지는 E, F랭크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들의 발전 상태는 이틀에 한 번 꼴로 관찰을 하고 있었다.
‘리아 캬베데가 서큐버스들보다 영웅 등급이 높다고는 해도…….’
병사의 질은 확실히 마족이 우위였다. 하물며 영웅 등급이 떨어진다 해도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는 전투에 특화된 영웅이었다. 특히나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의 무력만큼은 A등급 영웅 못지않았다.
“이 정도로 훈련이 잘 된 병사들이라면 귀여운 고양이 정도는 쉽게 가지고 놀 수 있겠어.”
옆에서 멜리아 비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자신만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가상현실에서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했던 호 제국의 황제로서의 경험은 이번 전투에서 마족이 수인들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