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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32화 (3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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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32화

탁!

아스트리드 벨과 한씨 자매 사이로 걸어간 호는 페릴 예노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가져갔던 서류를 자신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서류의 움직임에 따라 세 여인의 시선도 함께 돌아가는 것이 보이자 조금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릴 예노스 님의 허락은 받았습니다. 앞으로 한시진, 한시현 씨는 조리실에서 나와 저와 함께 커티삭의 내정 관리 일을 할 겁니다.”

“와아아!!!”

“…….”

질투심인가? 기쁜 표정을 짓는 한씨 자매들과는 달리 인상을 찌푸리는 아스트리드 벨의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곧 활짝 웃으며 표정을 관리하기는 했지만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고 있던 호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벨 씨는 계속해서 시장 공사를 진행해 주셨으면 하고, 한시현 씨?”

“제가 한참 어린데 말 편하게 하세요, 오빠.”

뭐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는 한시현의 모습에 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호의 눈에 한시현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조막만 한 손에는 하얗게 화상 흉터가 나 있었다.

‘아쉽네.’

중학생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한시현은 6, 7년만 더 성장한다면 누구에게나 미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쁜 아이었다. 그래서일까? 손의 화상 흉터가 눈에 더욱 크게 들어왔다.

‘포션이나 힐러만 있었어도…….’

저 정도의 화상은 손쉽게 치료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커티삭의 상황으로는 얻기가 힘든 것들이었다.

그나마 힐러를 구하는 것보다 가능성이 높은 것은 회복 포션를 얻는 것이었는데, 포션이 등급에 관계없이 던전 공략의 성공 보상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지하 수렁 공략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체크.’

그렇게 생각하며 호는 자신의 수첩에 포션을 적어 넣었다. 앞으로 커티삭에서 함께할 사람들인 만큼 그녀들과 신뢰를 쌓아야만 했다.

“먼저 두 분에게 드리는 첫 임무입니다. 커티삭 남쪽에서 주점을 건설해 주세요.”

“주점요?”

“네. 현재 커티삭에서 가장 필요한 건물입니다.”

자신에게 되묻는 한시진을 향해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주점은 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방랑 영웅들이 커티삭을 찾아오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죠. 예를 들면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힐러라든가.”

호는 말을 마치며 한시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이었다. 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는지, 한시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또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영웅들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간다.”

“정말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나요?”

한씨 자매의 물음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호도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게임처럼 이 세계에서도 모든 영토를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단지 그러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마을을 어떻게든 발전시켜야 합니다. 수인과 엘프들이 이 마을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죠.”

호는 느릿느릿 말을 하면서 세 여인과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우리는 같은 편이다’라는 일체감을 심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계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그녀들에게 이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살아나가기 위한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게 분명했다.

“어쨌든 한시진 씨와 시현이는 주점 건설을 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건물 건설의 절차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제가 직접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회의는 그게 끝이었다. 집무실에는 호를 포함해 사람이 네 명밖에 없는 만큼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렇게 이 세계에서 건물 건설에 관한 절차를 설명해 주기 위해 먼저 한씨 자매를 창고가 위치한 장소로 보내자 집무실에 남아 있던 아스트리드 벨이 호에게 다가왔다.

“저들도 함께하는 건가요? 시현이는 회계사가 아닌 요리사로 전직했는데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호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속에 담긴 질투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과한 시기는 곤란해도 서로를 의식하며 발전해 나가는 모습은 환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통해 알아낼 정보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네, 화랑 기사더군요.”

“화…… 화랑 기사?! 누가요?!”

화들짝 놀라는 아스트리드 벨의 모습에 호는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화랑 기사가 뭔데?!’

공주라는 신분을 지닌 그녀가 놀라도 너무 심하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아스트리드 벨 님은 벨기에 연합의 공주님이 아니십니까? 화랑 기사라는 존재에 대해 그렇게 놀랄 이유가 있나요?”

“아…… 아니죠! 대한 제국의 화랑 기사라면 완전 전쟁 병기나 다름없잖아요?! 영프 전쟁에서 대한 제국의 화랑 기사 열다섯이 세 개의 프랑스 기갑사단을 전멸시킨 것은 우리 연합의 군사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일화예요! 게다가 그 탐욕스러운 중국이 대한 제국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전부 화랑 기사들 때문이잖아요?”

“…….”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아스트리드 벨의 말을 뒤로한 호는 머릿속으로 한시진을 떠올렸다.

그냥 군인인 줄 알았는데 전쟁 병기라니?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제를 제외하고, 이제까지 그녀는 호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화랑 기사 15기가 3 개의 기갑사단을 전멸? 무슨 세기말 무기야? 지들이 건담이라도 돼? 막 핀 판넬이 나가고 그런 거야?’

어쨌든 화랑 기사에 대한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는 오히려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만약 그녀가 화랑만 있어도.”

“페릴 예노스 님보다 강할까요?”

“네.”

서슴없이 대답을 하는 벨의 행동에 호는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B등급 영웅이라지만 페릴 예노스는 무력만큼은 거의 A등급에 다다른 영웅이었다. 그런 그녀보다 강하다? 화랑이라는 것을 보유한 화랑 기사라는 게 대체 얼마나 강력한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S급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던 건가?’

어쨌든 화랑 기사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한시진이 S급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어젯밤 보였던 자신만만한 그 모습도 말이다.

어찌 되었든 호는 머릿속으로 한시진을 요주의대상으로 체크했다. 커티삭에 있는 네 명의 소환자 중 가장 먼저 신뢰와 호감을 쌓아야 할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뢰를 쌓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힐러를 구하거나 회복 포션을 먼저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장수를 잡기 위해서는 말을 쏘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호는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호는 벨의 눈동자에 담긴 두려움과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감정 변화가 빠른 여인 같았다.

“히익?!”

호가 아스트리드 벨의 어깨를 살짝 짚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호를 바라봤다. 어쩌면 저렇게 생각을 읽기 쉬울까?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를 보던 호는 지나가는 말투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스트리드 벨 님은 커티삭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필요한 인물입니다. 직업도 회계사지 않습니까? 영지의 내정 관리에 딱 필요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 그렇죠? 다시 메이드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조심스럽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벨의 모습을 보던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의 본능인지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에 가 있었다.

“아!”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트리드 벨 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살짝 놀라는 벨의 모습에 태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호는 한시진과 한시현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잠시 제자리에서 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스트리드 벨이 슬쩍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영지의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영지의 북쪽에는 지금 한창 건설 중인 시장이 위치해 있었다.

* * *

“후우.”

반짝이는 햇살을 보니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호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커티삭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차가운 바람이 몸을 휘감았지만, 등 뒤에 난 땀은 쉽게 식혀지지 않았다.

“고생하시네요.”

한시진이었다.

“관리를 하는 영웅이 직접 몸으로 뛰어야 몬스터들도 더욱 열심히 일을 하니까요.”

“호 씨가 영웅? 후후후. 틀린 말은 아니네요.”

호의 말에 한시진은 거의 다 올라가 있는 커다란 3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 맡은 건물인 주점이었다.

현재 주점의 공사 진척도는 98%. 이제 곧 있으면 완공이었다.

“주점이 완성되면 많은 영웅이 이 커티삭을 방문했으면 좋겠군요. 그들이 주점에서 사용하는 리스는 곧 영지의 세금으로 돌아올 테고, 그중에는 영지에 힘이 될 만한 존재도 있을 테니까요.”

“네. 특히 힐러가 왔으면 좋겠어요.”

호의 말에 한시진이 맞장구를 쳤다. 언니의 마음인지 그녀는 한시현의 손에 난 흉터를 볼 때마다 어두운 표정을 지었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한 호는 현재 커티삭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영지 정보(Status)>

커티삭(개척 도시[E등급]) - ‘붉은 핏빛의 대지’

인구 - 3,452

보유 리스 - 9,940

보유 식량 - 4,945

병사 - 오크 전사(E) 461, 고블린 투석병(F) 240

내정 건물 - 식량 저장고 12, 농장 3, 시장 2

군사 건물 – 병영 1

리스 생산 - 760 / 월

식량 생산 - 621 / 월

특산품 – 없음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형편없는 수준의 영지였다. 그나마 지금 건설되고 있는 주점과 시장이 완공되면 한 달에 걷어 들일 수 있는 리스의 수입이 천은 넘길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적자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리스 수입 천은 기껏해야 오크 전사 오백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지하 수렁에서 그렇게나 병사 수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커티삭은 마을 내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유지비용조차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미 없는 생각이었지만 정말로 이럴 때마다 에디터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지하 수렁 공략을 마치기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황이 나아졌다는 점이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뭐가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시진의 질문에 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스트리드 벨을 통해 대충 화랑 기사가 무엇인지 듣게 되었지만, 뭐랄까? 딱히 몸으로 체감되는 게 없어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단지 호가 놀란 점은…….

‘설마 로봇이 진짜로 있을 줄이야.’

화랑이라는 이름의 전투 병기였다. 유럽에서는 모빌 슈츠, 중동에서는 라, 중국에서는 쟌,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화랑이라 불리는 것은 크기 7, 8m 정도의 기갑 병기로 그 출력에 따라 S, A, B, C등급으로 나뉘는, 쉽게 이해하자면 로봇이었다.

그리고 화랑 기사는 화랑이라는 이름의 로봇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을 뜻했는데, 다들 전투의 프로이며 벨의 말에 따르면 각국에서는 외교관급 대우를 받는 인물들이라고 했다.

‘화랑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했던가?’

그중에서도 한시진은 최연소 화랑 기사단장에 임명되었을 정도로 특출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봤자 호의 눈에는 여대생으로 비칠 뿐이었다. 전쟁 병기라 불리는 로봇들은 호의 세계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SF 소설에 나오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공교로운 점은 화랑이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꼭 닮은 이 세계의 병기 중 하나인 마장기를 닮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한시진이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다.

어쨌든 호는 커티삭에 있는 소환자 중 한시진과 친분을 쌓기 위해 가장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유한 S랭크의 스킬 때문이었다. 호가 한씨 자매가 진행하고 있는 공사 현장에 나와 있는 것도 그 이유가 컸다.

그리고 한시진이 마장기를 제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녀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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