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리그너스 대륙전기 031화
“전 일본과의 합병 50주년 기념식 이후 동생과 이 세계로 왔어요. 호 씨는요?”
“……저는 그다음 날 왔습니다.”
한시진의 물음에 호는 그렇게 둘러댔다.
일본과의 합병 50주년 기념식? 호가 있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경술국치가 105년 전의 일이었고, 그것을 기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일파라면 모를까.
한국이 일본을 지배한다?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면 먹었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다른 세계의 일이지만 호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애국심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살던 세계의 대한민국도 아니었지만, 비록 다른 패러럴 월드 속의 대한민국이라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강대국이라는 사실은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느새 한시진은 호의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동생과 함께 깨어난 이후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 봤어요. 하지만 곧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화랑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제 애기인 화랑도 이곳에서는 반응하지 않았죠.”
“…….”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한 것만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호는 애써 궁금증을 참은 채 한시진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이 커티삭이라는 동네를 빠져나갈 수 있어요. 하지만 동생이 있다면 불가능해요. 저와 달리 동생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거든요.”
한시진의 말을 들으며 호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 말은 즉, 만약 그녀가 혼자였다면 이 동네를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화랑 기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몬스터가 겹겹이 있는 이 커티삭에서 도망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대체 화랑 기사가 뭐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시진은 호에게 말했다.
“호 씨가 어떻게 커티삭의 지배자라 불리는 괴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는 몰라요.”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이 저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을 뿐이죠.”
“뭐, 그래요. 어쨌든 지금 이 커티삭의 내정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호 씨죠. 그렇지 않은가요? 또한 아스트리드 벨에게 시장 관리 역을 맡긴 것도 호 씨고요.”
“맞습니다……?”
호는 한시진을 바라봤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시진은 분명 화가 난 목소리로 아스트리드 벨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니…….”
“그래서 화랑 기사라는 실력을 저에게 빌려주겠다는 건가요?”
호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왠지 그녀의 흐름이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한시진은 화랑 기사라는 검을 쓸 수 있는 실력자고 그녀의 동생인 한시현은 일반인. 그러니 동생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면 자신의 실력을 보태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파악한 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시진을 바라봤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긴 생머리의 여인은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떤 자신감으로 저렇게 말을 하는지 그녀의 능력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호는 이 세계에 와서 한시진의 정보를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다. 전에 얼핏 확인하기는 했지만, 기억에 크게 남은 게 없는 것을 보면 특별한 점은 없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뭔가 변한 게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한시진
2. 성별 : 여(22)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10
6. 직업 : 검사(F)
7. 세부 능력
통솔 : 10 / 10(F)
무력 : 10 / 10(F)
지력 : 10 / 10(F)
정치 : 10 / 10(F)
매력 : 10 / 10(F)
카리스마 : 20 / 50(D)
8. 특성 : 화랑의 정신
9. 스킬
<임전무퇴> S랭크
전쟁터에 나가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고 용감히 싸우라는 화랑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효과 :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대가 물러서지 않으며 피해를 입더라도 병사 수에 따른 부대의 공격력 및 방어력의 페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휘하는 부대는 패닉 상태 및 어떠한 해로운 효과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전투 중 병사 수가 10%씩 감소할 때마다 부대의 공격력, 방어력이 10%씩 증가합니다.
‘미친?!’
호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런 호의 행동에 보던 한시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떴기 때문이었다.
“네, 그래요. 호 씨가 수인들과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시현이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 달라요. 저는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는 군인입니다.”
“…….”
한시진의 말에 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한시진의 정보를 확인한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작 F등급의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는 주제에 S랭크의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한시진이 어째서 자신감 있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F등급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분명 저런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인물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당장 페릴 예노스 님에게 건의해 한시진 양에게 어울릴 만한 일을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한시현 양도요.”
“……고마워요.”
쉽게 승낙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한시진이 얼굴에 잠깐 의외라는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서는 한시진을 보며 호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F클래스인데 S랭크 스킬? 우와. 대체 화랑 기사가 뭔데 저런 스킬이 있는 거지? 완전히 미쳤잖아? 진짜 잘만 키우면…….”
호는 목을 뚜둑 돌리며 아까 전 보았던 한시진의 능력치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현재 생각하고 있는 계획을 좀 더 쉽게 진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영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어떤 명령을 내려도 영웅이 관리하는 것과 관리하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영웅이 쓸모없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 나중에, 그것도 S등급 이상의 영웅이 차고 넘쳐 날 때의 일이었다.
“아스트리드 벨과 한시현은 전투에 재능이 없어 보이니까 내정으로 돌리고, 한시진을 외부로 돌리면…….”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라는 B등급의 강력한 영웅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들은 호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한시진은 달랐다. 아스트리드 벨처럼 어떻게 잘만 꼬드길 수 있다면 충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 호는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페릴 예노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D급 던전인 ‘지하 수렁’을 성공리에 공략하며 얻은 자금을 커티삭의 발전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한시진와 한시현에 대한 이야기도 꺼낼 생각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페릴 예노스 님.”
30분간의 이야기 끝에 페릴 예노스는 호의 제안을 쿨 하게 허락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페릴 예노스의 허락이 떨어진 까닭에 호는 커티삭에 있는 자금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총 20,000리스 정도로 지하 수렁을 공략하며 얻은 돈을 더한 수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페릴 예노스는 한시진과 한시현에 대한 호의 건의에도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수렁 공략 이후 그녀는 소환자가 어느 정도 쓸모 있는 녀석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사를 고용하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페릴 예노스의 방을 나오며 호는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을 바라봤다.
그가 그녀에게 한 제안은 전부 리스 및 식량 생산에 관한 이야기였다. 추가적으로 리스와 식량의 수입이 이뤄줘야 고급 병종을 양성할 수 있다고 말은 했지만, 페릴 예노스는 본인이 영주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호에게 떠맡기고 있었다.
더욱이 전투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을 짐작해 봤을 때 20,000리스라는 큰 자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를 양성하지 않는 게 조금은 의외로 느껴졌다. 페릴 예노스라면 영지의 발전보다는 지하 수렁 공략에서 죽어나간 마족 병사들의 머릿수를 채워야 한다고 말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가? 어쨌든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 돈을 이용해 개척 도시에 불과한 커티삭을 조금씩 키워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고작 이 돈만으로 커티삭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호는 또 다른 던전의 공략을 노리고 있었다. 커티삭 주위에 있던 던전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은 D급 던전인 지하 수렁이었지만,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따르면 E급과 F급 던전도 몇 개 존재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주둔하고 있는 병력들을 데리고 커티삭의 다른 던전들을 공략하고 싶었다. 던전 공략의 성공은 리스와 많은 경험치를 벌어들일 수 있었고, 경험치를 벌어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 수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던전 공략에 집중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고블린을 통해 한시진과 한시현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인 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몇 개의 서류를 챙긴 후에 집무실로 향했다.
“…….”
“…….”
그렇게 집무실에 도착한 호는 이상한 광경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집무실은 호의 책상을 기준으로 좌우로 책상이 나눠져 있었는데, 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오른쪽 책상에는 한시진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는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아스트리드 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아니, 노려보고 있었다.
‘……당파 싸움? 여당, 야당? 벨기에 연합 대 대한 제국?’
마치 사극에 나오는 무신과 문신의 자리 배치 같은 느낌이었다.
“큼!”
그리고 호가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자 곧 세 쌍의 시선이 쏟아졌다.
“아, 호 씨.”
왼쪽 책상에서 아스트리드 벨이 반가운 표정과 함께 호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공주라서 그런 것일까? 단순히 손을 흔드는 행동이지만 고귀한 품격이 느껴졌다. 게다가 매번 하는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굉장히 친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안녕하세요, 호 오빠.”
오른편에 새롭게 들어온 두 개의 책상은 앞으로 한시진, 한시현 자매가 집무실에서 일할 책상이었다.
한시진은 호를 보자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화랑 기사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혀서 일까? 그때의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았다.
한시현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호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빠를 향해 인사를 하는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참 배치가…….’
부장의 책상을 기준으로 좌우로 대리 및 사원급의 책상이 있는 모습이 회사의 사무실 배치와도 똑같았다. 분명 몬스터들이 책상을 배치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구조를 생각해 냈는지 궁금증까지 생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