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30화 (30/522)

# 30

리그너스 대륙전기 030화

“…….”

잠시 식칼을 보던 시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가 싸늘해지며 서슬 퍼런 기세가 시진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개를 잠깐 흔들자 날카로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 돼. 괴물들이 너무 많아. 게다가…….”

성내에는 많은 수의 오크 전사와 고블린이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박쥐같이 얇은 날개를 지닌 아름다운 외모의 괴물인 서큐버스라는 존재들도 있었다.

특히나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라 불리는 이 세계의 괴물들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으으…….”

“…….”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시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현의 낫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요리를 마치지 못하면 어떤 체벌이 날아올지 몰랐다. 며칠 전, 고블린 하나가 음식을 쏟았다가 시체로 변한 것을 시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잠시 후, 시진은 시현이 쓰던 식칼을 잡았고, 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걱정 마. 일단 요리는 끝내야 되잖아. 내가 할게. 너는 차가운 물에 손가락 담그고 있어. 치료는 요리를 전부 끝내고 생각하자.”

시진은 애써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하…… 하지만 언니는 요리 못하잖아?”

“괜찮아. 어깨너머로 배웠어. 괴물들이니까 맛이 없어도 좋아하지 않을까?”

말과 함께 시진은 천천히 칼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요리는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엉망이 된 요리가 식사로 나갔다.

“오늘은 맛이 별로야, 별로! 이런 것을 먹으면 내 기분이 좋을까? 좋지 않을까?”

서큐버스, 멜리아 비쉬의 타박에 시진은 자신도 모르게 혀끝을 입술로 핥았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손을 다쳐서…….”

한시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불쌍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흥.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시진의 말에 멜리아 비쉬는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전에 그녀의 앞에서 실수를 한 고블린이 곤죽이 된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믿기 힘든 반응이었다.

시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페릴 예노스 님도 없는 와중에 소환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난 놀러나 가련다.”

말을 마친 멜리아 비쉬는 날개를 펄럭이더니 창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화랑만 있었어도…….”

대한 제국의 직립 보행병기를 떠올리며 시진은 아쉬움과 분노를 담아 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애기만 있었어도 이런 조그마한 성쯤은 가볍게 박살 낼 수 있었다. 화랑에 탑승만 하고 있다면 서큐버스나 오크, 그리고 고블린쯤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녀석도 두렵지 않았다. 선택의 신전에서 봤던 몇몇 괴물을 제외하면 말이다.

“후.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지.”

하지만 고개를 흔든 그녀는 천천히 멜리아 비쉬가 먹은 음식의 접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커티삭에서의 그녀는 대한 제국의 화랑 기사가 아닌 조리실의 요리사에 불과했다.

화아아아.

멜리아 비쉬가 나간 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리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함에 시진은 잠시나마 부드러운 바람의 느낌을 즐겼다.

창 너머로 조그마한 커티삭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참으로 이상한 세계였다. 사람과 괴물, 그리고 이 종족까지 섞여 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녀의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노예라는 존재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페릴 예노스라는 지배자의 힘으로 인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창밖을 통해 마을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시진의 눈에 한 가지 이상한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마을 한 모퉁이에서 거대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노타우르스라는 이름의 괴물을 비롯해 수많은 괴물이 공사에 열중이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공사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이 상당히 낯익었다.

“……아스트리드 벨?”

시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지금쯤 영주성의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시진의 눈에 들어온 벨은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세계의 괴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여전히 식당에서 식사가 이뤄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죠?”

사람의 시선은 상당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호기심, 분노, 의구심 등 사람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시선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는 시진의 시선에는 강한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그와 함께 약간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언제부터였어요?”

마치 추궁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스트리드 벨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시진의 모습에 아스트리드 벨 또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시선을 돌렸다가는 패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건 공주라는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을요?”

“정원사요.”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시진이 무엇을 묻는지 모를 만큼 아스트리드 벨은 어리석지 않았다. 시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떻게 당신은! 우리가 고생하는 거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렇다면요? 제가 뭘 어떻게 해드려야 하는데요?”

“네……?”

아스트리드 벨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전 오늘 밖에서 일을 하고 온 탓에 굉장히 피곤해요. 갑자기 저에게 왜 그러시는 줄은 모르겠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저는 정원사에서 벗어나 현재 이 마을의 시장 공사를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조차도 이 마을을 지배자라 불리는 존재들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당신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

뻔뻔하게 느껴지는 아스트리드 벨의 대답에 한시진은 입술은 깨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녀가 한 말은 사실처럼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소중한 동생을 고된 노동과 위험 속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 봐도 그랬다. 그리고 전에 죽어나간 고블린의 모습을 떠올려도 그랬다.

언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들의 변덕으로 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시진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서큐버스들이 당신에게 그런 일을 맡긴 거죠?”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스트리드 벨이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큐버스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호만큼은 아니지만, 공주라는 자존심 때문일까? 벨은 적어도 한씨 자매들보다는 높은 곳에서 그녀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말을 끝낸 벨은 종종걸음으로 시진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행동에 한시진은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그게 뭐라고?’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알려주지 않는 것인지 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 * *

“……그래서 몬스터들에게 묻고 물어 마지막으로 제 방을 찾아온 건가요?”

말을 마친 호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눈앞 가득히 떠올라 있던 호의 상태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의 방을 찾아온 여인은 조금은 의외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다름 아닌 한시진이었다.

호의 시선이 한시진에게 향했다. 호는 소환자 중 한씨 자매들에게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한씨 자매는 자신들끼리 알아서 이 세계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조리실에만 있는 행동이 적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적응이었다.

아스트리트 벨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긍심 때문에 어떻게든 이 세계에 익숙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의외였지.’

호는 아스트리드 벨이 진두지휘했던 시장 공사의 현황을 떠올렸다.

열흘간 그녀는 시장 공사를 22%나 진행시켰다. 빠른 진행은 아니지만, 그녀의 정치 수치와 첫 공사라는 점을 감안하다면 굉장한 성과였다. 공주라는 직위로 인해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네.”

짤막한 한시진의 대답에 호는 잠시 하던 딴생각을 멈추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 담겨 있는 절박함이 눈에 들어왔다.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호는 손으로 이마를 몇 번 꾹꾹 누르고는 말했다.

“그래서 한시진 양이 원하는 게 무엇이죠?”

“안전한 생활이요.”

“안전한 생활?”

아직도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모르는 것인가? 그녀의 전형적인 대답에 호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선택의 신전에서 보여줬던 그녀의 침착한 모습과 친절한 행동이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현실을 자각시켜 줄 필요성은 있어 보였다.

“이 세계에서 안전이라는 것을 찾는 건가요, 지금?”

“정확히 말씀드릴게요. 전 동생의 안전을 원해요. 그리고 몬스터들의 말에 따르면 당신이 현재 커티삭의 내정을 관리한다고 들었어요. 만약 동생의 안전을 지켜줄 수만 있다면 당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어요.”

“최선을 다해? 뭘 어떻게요?”

자신이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도 된다고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한시진이 한숨을 내쉬더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대한 제국 제2 화랑 기사단의 단장 한시진입니다.”

“…….”

침묵이 감돌았다. 호와 한시진은 서로를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금증을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화랑 기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시진은 지금 굉장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었다. 마치 자신에게 깜짝 놀랐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랑 기사?’

대체 그게 뭘까? 의기양양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 대한 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일 게 분명했다.

화랑과 기사? 검을 쓰는 군인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 검을?

별의별 생각이 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한시진 본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만약 물어봤다가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 수도 있었다. 자신을 대한 제국 사람이라고 밝힌 상황에서 쓸데없는 오해는 피하고 싶었다.

“놀랍군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호의 말은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화랑 기사라는 처음 들어보는 것에 대한 놀라움만큼은 진심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그게 그리 대단한가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대한 제국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호의 말에 한시진의 눈에 잠깐 이채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괴물이 있고,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세계죠. 보아하니 당신도 검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요? 다만,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휘두르기 시작한 것인지 많이 어색해 보이지만요.”

“……아셨습니까?”

“식사 시간에 손아귀를 보고 추측했을 뿐이에요. 전 세계에서 화랑 기사만큼 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잖아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려던 호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화랑 기사가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병사냐고 물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한시진은 그런 호의 행동에 별다른 의심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