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28화 (28/522)

# 28

리그너스 대륙전기 028화

“취에에엑!!!”

“켁! 케케엑!!!”

오크와 고블린으로 구성된 마족의 병사들이 내지르는 광기에 찬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지는 모습은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였다. 이 세계서의 첫 전투였던 수인과의 전투와는 압박감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호는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고, 백만이 넘는 군대를 지휘한 적도 있었다.

수인, 마족, 천족을 비롯해 드래곤까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른 한마디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게임과 현실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었다.

“오호호홋!!!”

페릴 예노스의 채찍이 휘둘러질 때마다 지하 수렁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몬스터가 쩍 하고 갈라지며 녹색의 찐득한 체액을 내뿜었다. 그리고 호는 몬스터의 시체가 땅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멀찌감치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

느낌이 이상했다.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호는 자신의 몸이 약간 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지휘하는 병사는 천도 안 되는 숫자였다.

하지만 왜일까? 사방에서 흩뿌려지는 녹색의 체액과 코끝에서 밀려오는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비릿한 악취가 호의 몸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전쟁…….’

가상현실게임에서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게임이었다. 무섭지 않고, 아프지 않았다. 아무리 현실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가상은 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의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죽을 수도 있는 현실이었다.

“취이익!”

식물과 동물을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생김새를 지닌 몬스터들의 공격에 오크 전사들과 고블린들이 죽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생기가 사라지고 있는 오크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호는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제길!”

만약 누군가가 호에게 이 난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호는 확실하게 답을 말해줄 수 있었다.

‘불가능해.’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훗날 수련을 하고 전투에 익숙해진다면 좀 더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몬스터를 상대로 전투를 치를 자신이 없었다.

“다행이군. 정말로 다행이야.”

호는 자신의 직업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직접 전투를 치르는 클래스가 아닌 뒤에서 병사를 지휘하는 클래스로 전직을 한 것이 충분히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페릴 예노스처럼 직접 몸으로 상대해야 될 때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

등이 싸해지는 느낌에 호는 재빠르게 몸을 틀고는 그대로 +1 강화된 강철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크와 고블린이 아닌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의 외형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캬캬캭!”

손에 걸리는 묵직한 느낌과 함께 검에 베인 몬스터가 초록색의 체액을 입으로 생각되는 부위에서 뿜어냈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공격이었지만, 괴상하게 생긴 몬스터에게 치명타를 입힌 것 같았다.

“큿!”

몸에 몬스터의 체액이 묻자 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썩은 내는 아닌 거 같은데, 이 녀석들 냄새 정말 지독하네…….”

코를 부여잡은 호는 생기를 잃고 땅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지는 몬스터를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확인 사살을 위해서였다. 게임이 아닌 만큼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어서 오크 전사들이 달려들어 호를 공격한 몬스터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좋아! 아주 좋아!!! 이런 것을 원했어!!!”

페릴 예노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주위에는 곤죽으로 변한 몬스터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전투였다.

“후우…….”

호 역시 이마에 난 땀을 손으로 닦았다. 직접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지만, 뒤에서 놀고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페릴 예노스는 지휘관이 아닌 전형적인 맹장 스타일의 영웅이었다. 덕분에 병사들을 지휘하고 전체적인 전황을 살피는 것은 호의 몫이었고, 간간이 검을 휘두르기도 해야 했다.

어쨌든 커티삭의 군대가 지하 수렁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을 반긴 것은 준보스급 몬스터인 악취 나는 라포지아와 지하 수렁의 변형 몬스터들이었다.

호를 포함한 마족의 군대는 그들을 상대로 세 시간 동안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악취 나는 라포지아를 포함해 마족의 군대를 공격하던 변형 몬스터들을 수렁의 거름으로 만들 수 있었다.

피해도 많았다. 아직 보스급 몬스터 수렁거인 듀케이션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포지아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약 이백여 마리의 병사를 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페릴 예노스 님.”

“피해는?”

“오크 전사 142, 고블린 투척병 54가 사망했습니다.”

이미 병사들의 피해 파악을 끝낸 호가 앞으로 나서 페릴 예노스에게 말했다. 산발이 된 머리와 함께 몸 여기저기 녹색의 체액이 들러붙어 있는 호의 모습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병사처럼 보였다.

“흐흥! 너도 제법 활약을 한 모양이구나.”

“감사합니다.”

페릴 예노스의 말에 호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띵동

-D급 던전 지하 수렁의 ‘악취 나는 라포지아’를 물리쳤습니다.

-전투 성과를 결산 중입니다. 3…… 2…… 1. 결산 완료. 이번 전투의 등급은 A랭크입니다. 경험치를 450 획득했습니다.

-총대장 페릴 예노스에게 활약상을 인정받았습니다.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20%면?!’

무려 9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한 셈이었다.

‘게다가…….’

호의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한 사실에 흥분한 게 아니었다. 총대장의 인정. 이런 내용은 호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을 때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상현실게임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는 건가?’

호는 지금의 사실을 머릿속에 기억해 뒀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분명 나중에는 크게 작용할 터였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20%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훗날 큰 전쟁에서 성과를 올렸을 경우 추가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의 20%는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페릴 예노스의 말에 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가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기쁨에 잠깐 히죽거린 게 눈에 띈 모양이었다.

잠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호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페릴 예노스 님에게 인정을 받아서입니다.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페릴 예노스 님은 저와 같은 소환자들을 그리 반기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소환자들을 반기지 않는다? 그건 성내에 있는 여자들을 말하는 거?”

“네.”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을 받아서 기쁘다. 상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페릴 예노스의 물음에 대한 전형적인 대답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그녀에게 묻는 호의 질문이었다.

“흐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호의 화술에 페릴 예노스는 입술을 살짝 내밀더니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이 세계에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소환자 중 한 명이 이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심지어 지금 영지의 조리실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한씨 자매나 한참 시장 건설을 하고 있을 아스트리드 벨도 말이다.

자신의 경우를 보아도 그랬다. 등급의 한계가 있는 이 세계의 영웅들과는 다르게 소환자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급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NPC, 아니, 마족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냥.”

“네?”

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페릴 예노스를 바라봤다.

“소환자? 별로 안 싫어해. 그런데 너를 제외한 다른 애들을 성 안에 두는 이유는 그냥이라고.”

“…….”

“사실 여자라서 마음에 안 들어. 이왕이면 남자, 그것도 너 같은 비리비리한 애 말고 근육질에 힘 센 남자들을 원했는데. 아아아!!! 왜 우리 마족의 소환자 중에 그런 애들은 하나도 없는 거지?”

“……비리비리해서 죄송합니다.”

호는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하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서큐버스다운 대답이었다.

진군은 계속되었다. 중간중간 지하 수렁의 몬스터들이 앞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페릴 예노스의 채찍에 한 줌 거름이 되어 사라졌다.

확실히 무력 292의 B등급 영웅다운 모습이었다. D등급 던전인 지하 수렁에서 페릴 예노스의 존재는 압도적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호는 아까 전의 전투를 떠올렸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의 던전 공략은 많은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가까운 전투를 치러 보스를 처리하는 일종의 레이드였다. 그만큼 혼자서 보스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릴 예노스는 준보스급 몬스터인 악취 나는 라포지아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홀로 이 지하 수렁의 보스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강력한 모습이었다.

물론 마족 병사들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만큼 그녀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게임 속에서 B등급 영웅은 쳐주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지금 지하 수렁 던전에서의 페릴 예노스는 호에게 S등급 영웅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D급 던전 지하 수렁의 준보스급 몬스터 악취 나는 라포지아를 물리친 마족의 군대는 위풍당당하게 지하 수렁 내를 진군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날카로운 창칼 앞에 지하 수렁의 거름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페릴 예노스와 호는 하루 남짓 지하 수렁을 탐험하며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였고,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7, 8m 크기의 거대한 거인과 마주칠 수 있었다.

거인은 수렁거인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몸 전체가 이끼와 풀들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었다.

“수렁거인 듀케이션.”

호는 눈앞에 보이는 거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지하 수렁의 마지막 보스. 저 녀석만 물리치면 D급 던전 지하 수렁의 공략은 끝이었다.

그리고 호는 라포지아를 물리치고 얻은 전리품을 떠올렸다. 7,300리스와 몇 개의 아이템이었다.

‘확실히 던전이 좋아.’

커티삭에서 순수입으로 7,300리스를 벌어들이려면 상당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냈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던전은 고작 준보스급 몬스터를 처리한 것만으로도 그만큼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거기에 라포지아가 뱉어낸 아이템을 판매한다면 9,000리스 정도를 추가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

‘총 16,300리스.’

엉망진창인 커티삭을 발전시키기에는 모자란 자금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었다. 또한 수렁거인 듀케이션을 물리친다면 라포지아보다도 많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호오. 저런 괴물이 내 영지에 있었단 거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듀케이션의 모습에 페릴 예노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에 커다란 골렘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상한 냄새라도 나는지 코를 킁킁거리던 페릴 예노스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조금이긴 해도 엘프의 냄새가 나는 게 기분이 나쁘군. 저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없어야겠다.”

“페릴 예노스 님의 뜻대로.”

호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잡아야 할 녀석이었다. 커티삭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페릴 예노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 듯 낙하하며 그대로 채찍으로 수렁거인을 후려쳤다.

쿠워어어어!!!

불의의 일격을 당한 수렁거인이 고함과 함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여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흔들렸다.

‘제법 멋들어지게 등장하는걸?’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면서 D급 던전 지하 수렁의 보스인 수렁거인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지하 수렁을 제외하더라도 워낙에 많은 던전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스급 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은 많이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수렁거인의 등장 모습은 D등급 보스치고는 오프닝이 상당히 요란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