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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7화 (2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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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27화

‘커티삭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던전을 공략해야 돼.’

그리고 호는 자신의 이 건의를 페릴 예노스가 허락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지금 지하 수렁이라는 던전 공략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페릴 예노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호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가 토벌대에 합류한다면 던전의 공략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페릴 예노스뿐만 아니라 멜리아 비쉬까지 합류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만약 페릴 예노스가 합류한다면 그녀의 활약으로 오크 전사를 비롯한 마족 병사들의 희생은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만족스러울 만큼의 수를 줄일 수 있으리란 계산이었다.

B등급 영웅이 합류한다고 해도 던전 공략에 병사들의 희생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커티삭에는 E랭크와 F랭크에 불과한 오크 전사와 고블린 투척병밖에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호는 이들의 허약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던전으로는 언제 떠날 생각이지?”

“사흘 내로 준비를 마칠 생각입니다.”

“오호! 좋아, 좋아.”

호의 대답에 페릴 예노스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위엄 서린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호! 너에게 부대 편성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 당장 지하 수렁? 그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부대를 편성하고 나를 부르도록. 나도 던전의 공략에 합류하겠다.”

“알겠습니다.”

페릴 예노스의 명령에 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D등급 던전이지만 커티삭의 지배자인 그녀가 합류한다면 던전 공략의 성공률은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이번 지하 수렁 공략에 실패할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은 덤이었다.

게다가 던전의 공략은 많은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더욱이 D등급의 던전인 만큼, 식량 창고를 지키기 위해 수인들과 벌였던 전투에서 얻은 경험치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큰 경험치를 획득할 가능성이 높았다.

‘후후후.’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플레이어가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전쟁과 던전 공략이었다. 그리고 호는 예전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D등급 던전 공략에 성공했을 경우 얻을 수 있었던 경험치를 떠올렸다.

‘1,800이었던가?’

만약 가상현실과 동일하게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면 이번 지하 수렁 공략에 성공했을 경우 엄청나게 많은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혹 영웅인 페릴 예노스가 합류하게 되어 얻는 경험치가 반으로 줄어든다 하더라도 900이나 되었다. 아니, 업적을 감안하면 그 이상일 터였다.

“이렇게 되면 이제 몬스터들과 던전을 공격하러 가시는 거예요?”

페릴 예노스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아스트리드 벨이 호에게 물었다. 무슨 연유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페릴 예노스 님이 병사 편성에 대한 전권을 저에게 위임하셨으니…….”

호의 대답에 아스트리드 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불안감의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호는 곧 무언가를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혼자서 무언가를 하신다는 게 불안하신 겁니까?”

“아? 아…… 네. 조금은요.”

벨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렇군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채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가 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자서 몬스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시장이라는 건물을 지어야 했다.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에게는 벅찬 일일지도 몰랐다.

“흐음.”

실수라는 생각이 살짝 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며칠간 그녀의 옆에서 몬스터들에게 어떻게 명령을 내리고, 어떤 절차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지 알려주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상황은 인턴으로 회사에 입사했는데, 업무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중규모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라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너무 급하다 보니 실수했어.’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 속에서는 건물 건설에 대한 절차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NPC 영웅들이 알아서 척척 모든 것을 해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상했을 일인데, 너무 성급했던 게 문제였다. 그만큼 커티삭의 상황이 엉망이라는 게 호에게 압박감을 준 모양이었다.

어쨌든 아스트리드 벨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된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제 실수로군요.”

“아……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던전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아스트리드 벨 님께서 조금만 일을 진척시켜 주시면 되는데……. 어차피 부대 편성을 하는 데 사흘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영지의 건물을 건설하는 절차에 관해 빠르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일단은 영지 창고로 먼저 가보도록 하지요. 건물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재들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지금 당장에라도 지하 수렁으로 떠날 병사들을 편성 및 준비시켜야 했지만, 그렇다고 아스트리드 벨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만약 그녀를 그냥 두고 간다면 시장의 건설은 하나도 진행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 * *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여전히 자신감은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벨의 표정은 처음 임무를 맡았던 사흘 전보다는 나아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호는 벨에게 건물을 건설하는 절차에 대한 요점만 딱딱 골라 일대일의 족집게 강의를 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 벨의 능력 수치가 높은 것도 아닌데다가 과연 그녀가 몬스터들을 관리하며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공사 진척도가 30% 정도라도 상승한다면 좋을 텐데.’

지하 수렁의 공략을 완벽히 끝내려면 약 열흘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왔다 갔다 하는 데 대략 일주일, 그리고 던전의 공략에 걸리는 시간이 사흘이었다.

원래 처음 가는 던전이라면 안전을 위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 만큼 공략에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호에게는 ‘관우는 내 여자’라는 유저가 작성한 만능의 공략본이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시나요?”

“네, 사실 지금도 늦은 것 같군요.”

살짝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아스트리드 벨의 행동에 호는 자신의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에 집히는 시계의 느낌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벨은 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안 것 같았다.

“그러면 나중에 뵙겠습니다.”

호는 아스트리드 벨이 자신의 옷자락을 놓는 순간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그도 마음이 다급했다. 페릴 예노스가 어떤 성격인지 아직 제대로 파악은 하지 못했지만 던전 공략에 따른 병사 편성이 늦으면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 때문에 호는 그녀가 뒤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한 내용을 전혀 듣지 못했다.

다행히 호가 조금 늦은 것에 관해 페릴 예노스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출진이 시작되었다.

“취이익! 취익!!!”

“켁! 케에엑!!!”

“…….”

군가인가? 성문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리듬감이 섞인 괴상한 소리에 말을 타며 이동하고 있는 호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듣기 싫을 정도의 끔찍한 음색이었다. 당장에라도 이 노래를 멈추고는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페릴 예노스의 채찍이 허공에 휘둘러질 때마다 오크와 고블린들이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더 크게!!!”

채찍으로 몬스터들의 노래를 지휘하는 페릴 예노스의 모습은 머리에 꽃만 꽂는다면 광년이 따로 없어 보였다.

다만,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힐끗힐끗 보이는 그녀의 몸매는 서큐버스답게 남자의 묘한 욕망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판타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반나절을 이동하면서 호는 나지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보다 진군 속도가 느렸다. 던전의 공략이 아니라 소풍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호의 걱정은 첫날에서 끝이 났다. 둘째 날부터는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페릴 예노스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의 강행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던전 공략의 속도의 따라 충분히 열흘 안에 모든 것을 끝마치고 커티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 수렁…….’

호는 다시 한번 자신이 공략해야 될 던전인 지하 수렁에 대해 떠올렸다.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가 합류했지만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게임과는 다르게 이곳에서의 공략 실패는 사망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먼저 지하 수렁에는 악취 나는 라포지아와 수렁거인 듀케이션이라는 두 마리의 보스가 있었다.

라포지아는 거대한 꽃처럼 생긴 마물인데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줄기를 이용한 공격을 가한다고 나와 있었다.

공략에 따르면 라포지아는 화염계 마법에 상당히 약하다고 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화염계 마법은 이용할 수 없었다. B등급 영웅인 페릴 예노스도 화염 계열의 마법을 쓰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악취 나는 라포지아가 준보스라면 수렁거인 듀케이션은 지하 수렁의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몬스터였다. 거대한 골렘 외형을 지닌 이 녀석은 지하 수렁에 서식하는 잡다한 몬스터들을 부하로 불러내어 공략을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어차피 병사는 많으니까…….”

공략을 보며 호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수렁거인 듀케이션의 특성을 감안해 적당한 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온 참이었다. 거기에 B등급 영웅 페릴 예노스의 활약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했다.

그래도 호는 머릿속으로 병사들을 운영해 전투를 치르는 시뮬레이션을 계속했다.

아무리 B등급 영웅 페릴 예노스가 있다고 해도 그녀 혼자서 보스급 몬스터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만큼 병사들의 도움은 필수였다.

게다가 페릴 예노스는 던전 공략에 따른 병사들의 명령권을 호에게 주었다. 귀찮은 것을 배제하고 일선에서 맘 놓고 싸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물론, 호의 입장에서는 땡큐였다.

그렇게 던전 공략에 관해 시뮬레이션을 하는 도중 호의 몸을 무언가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던 호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페릴 예노스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지하 수렁의 공략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페릴 예노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가 대답했다. 그녀의 질문에는 괜히 여러 생각할 필요 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흐흥!”

“…….”

하얀 이를 드러내는 그녀의 미소에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족들의 기분 변화는 참으로 변화무쌍했다. 그리고 그 기분 변화에 따라 여러 생명이 꺼지기 일쑤였다. 어느새 주위를 시끄럽게 하던 몬스터들의 리듬 섞인 함성은 사라져 있었다.

“좋아. 그런 모습 마음에 들어.”

“칭찬 감사합니다, 페릴 예노스 님.”

페릴 예노스의 대답에 호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호의 위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페릴 예노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움직이더니 호의 말머리에 발을 디뎠다. 그러고는 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환자, 너의 나라에도 군대가 있는가?”

“네, 이…… 있습니다.”

“좋아. 그러면 한번 불러봐.”

“네?”

무엇을 불러보란 말인가? 호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크들과 고블린들의 목소리가 조용해진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사나이! 기백으로! 오늘을 산다!!!”

제대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다 다녀와야 하는 군대에서 2년 넘게 불렀던 군가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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