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리그너스 대륙전기 026화
“잠을 설치셨나 봐요?”
오뚝한 콧대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170이라는 큰 키에 찬란한 금발을 지닌 여인이 호를 향해 물었다. 아스트리드 벨이었다.
“아, 제 모습이 조금 이상한가요?”
집무실에서 페릴 예노스를 대신해 쌓여 있는 문서를 처리하며 퀘스트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던 호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굉장히 피곤해 보이세요. 그거…….”
아스트리드 벨이 호의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크서클? 푹 주무시지 못한 것 같아요.”
“아아. 일이 꽤 많았거든요.”
걱정스러움이 담긴 벨의 말에 호는 뺨을 긁적였다.
어젯밤 지하 수렁을 공략하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짜다 보니 어느새 새벽녘이 다가와 있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작전들을 뽑아내기는 했다. 공략본과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전이었다.
“오늘도 마을 순찰을 나가야 하나요?”
“음…….”
낮게 신음 소리를 내뱉은 호는 벨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호의 오른편에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는 앞으로 그녀가 커티삭의 회계사로서 영지의 업무를 처리할 공간이었다.
‘삼국지로 따지면 활용할 수 있는 휘하 장수가 1명 늘어난 셈인가?’
아스트리드 벨은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딱히 영지의 회계 관리를 전담으로 맡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클래스의 이름이 그럴 뿐이었다.
어쨌든 한 방에 두 개의 책상이 놓인 것을 보니 현실 세계의 사무실 같다는 느낌이 문뜩 들었다.
“아뇨. 오늘은 페릴 예노스 님에게 건의를 드릴 일이 있습니다. 영지의 순찰은 나중에 아니면 그 후의 일이 되겠군요.”
“건의요?”
“네. 커티삭의 던전 공략에 관한 내용입니다.”
“더…… 던전이요?”
“네. 이걸 보시겠습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호는 커티삭의 재정 상황이 적힌 문서를 벨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부터 자신의 옆에서 영지의 발전을 도와야 하는 만큼 그녀도 영지의 정확한 상황을 알 필요가 있었다.
호가 정리한 영지 재정에 관한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아스트리드 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호가 정리한 문서는 현대인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쓰여 있었다. 그리고 경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기본적인 상식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커티삭의 상황이 크게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 나와 있는 리스가 그러니까 돈 맞는 거죠? 그런데 리스의 수입이…….”
“커티삭은 지출에 비해 들어오는 수입이 굉장히 적은 비정상적인 재정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은행 같은 곳에서 돈을 대출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요. 이대로라면 다음 달이 지나기 전에 영지가 파산할 겁니다.”
“아아……?”
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알려주기 위해 파산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러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트리드 벨이 문서를 떨어뜨리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글쎄요?”
자신이 떨어뜨린 문서를 주워 다시금 내용을 확인한 아스트리드 벨이 호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호는 그 질문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모션을 취했다.
이미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을 플레이 한 적이 있는 호는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대략적인 계획을 전부 세워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스트리드 벨 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세계의 정치 능력, 지력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지력과 정치와 같은 능력들은 이 세계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추가적인 보너스를 주는 것에 불과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영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소환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는 아스트리드 벨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일단은 리스의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여야 해요.”
“네, 그렇겠죠.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전형적이고 당연한 대답을 들은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한 호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스트리드 벨이 계속해서 말했다.
“리스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먼저 걷어 들이는 세금이 많아야 해요. 인구수를 늘려야 하죠. 또 가능하다면 영지의 물품을 판매할 수 있는 상단을 운영할 필요가 있어요. 상단이 오가게 되면 시장이 활성화될 거고, 그럴수록 많은 세금을 걷어 들일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리고 영지의 지출을 줄여야 해요. 호 씨가 정리한 이 문서들을 보면 군사 부문에서 영지의 역량을 넘어서는 지출이 벌어지고 있어요. 군대의 규모를 줄여야 해요.”
아스트리드 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구수를 늘려서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들인다. 그녀가 말한 내용은 커티삭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발전 상황이었고, 호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 비스무리하게 맞아떨어졌다.
“뭐, 제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 말과 함께 호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하나의 문서를 아스트리드 벨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그럼 페릴 예노스 님에게 가지요. 문서에 대한 결재를 맡아야 할 시간입니다.”
“결재요?”
“네. 사소한 일은 제 선에서 가부를 결정해도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큼직큼직한 일은 무조건 페릴 예노스 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뭐, 그러한 행위를 그냥 저 나름대로 결재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루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영지의 일이 마치 회사에서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벨이 히 웃으며 물었다.
“호 씨는 회사원이셨나 봐요?”
“뭐, 네. 그것도 취직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입이었죠. 그럼 갈까요?”
페릴 예노스의 집무실로 향하면서 아스트리드 벨은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호에게 이런저런 일을 꼬치꼬치 물었다. 대부분이 현실 세계의 일이었다.
호가 살았던 지역부터 과거 무슨 일을 했는지, 애인은 있었는지 등 호가 생각하기에 의아한 질문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호는 난감한 주제가 나올 때마다 말을 얼버무렸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호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한 제국의 사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자신에 세계에서의 대한민국은 대한 제국은커녕 남북한이라는 반으로 쪼개진 나라에 불과했다.
* * *
“시장? 좋아.”
페릴 예노스가 반대할 경우 나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던 호는 너무나도 쿨 한 그녀의 대답에 허탈함을 느꼈다.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는 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문서를 한 번 흘낏 본 게 전부였다.
“그러면 커티삭의 시장 건설은 아스트리드 벨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해. 오크와 미노타우르스를 붙이면 금방 완공되겠지.”
페릴 예노스의 대답을 들으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여리여리한 벨은 몬스터들을 관리하기에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소환자. 즉 이 세계에서 말하는 영웅이라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그녀가 건물의 공사를 관리한다면 적어도 몬스터들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호는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봤다. 그녀의 어깨가 살짝살짝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페릴 예노스라는 커티삭의 지배자, 아니, 마족이라는 무시무시한 존재의 앞에 서 있는 게 심적으로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확실히 페릴 예노스한테서 배어 나오는 살기와 서큐버스 특유의 묘한 향기,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는 충분히 그녀에게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나야 뭐…….’
이런 느낌 정도는 가상현실에서 워낙 많이 겪어왔던 만큼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가 아닌 다른 영웅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한 종족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존재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쨌든 저렇게 멍하니 있는 태도는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아?!”
호가 아스트리드 벨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왜? 라는 의문에 호는 재빠르게 고개를 페릴 예노스 쪽으로 여러 번 까닥였다. 그러자 아 하는 탄성이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왔다.
페릴 예노스의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커티삭의 발전의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페릴 예노스가 귀찮은 듯 손을 까닥였다.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단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멜리아 비쉬를 꼬리로 살짝살짝 건드리는 게 그녀가 보이는 행동의 전부였다.
왠지 한심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호는 미지근한 표정으로 페릴 예노스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스트리드 벨에게 시장 건설을 맡긴다는 일차 허락은 끝났고, 이제 커티삭의 재정을 개선하는 데 꼭 필요한 사안이 남아 있었다.
“또 하나 건의드릴 게 있습니다, 페릴 예노스 님.”
“뭐지? 또 영지에 건물을 건설하는 건가? 시장까지 짓고 나면 커티삭에 남아 있는 리스는 전혀 없을 텐데?”
페릴 예노스의 대답에 호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적어도 커티삭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는 대답 대신 하나의 문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흐응? 이게 뭐지?”
“토벌 계획서입니다.”
“토벌 계획서?”
페릴 예노스가 흥미가 담긴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호는 자신이 건네준 문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투를 좋아하는 영웅답게 그녀는 토벌 계획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거 확실히 확인한 거 맞지?”
문서를 전부 읽은 페릴 예노스가 천천히 자세를 잡고는 호에게 물었다. 미소를 활짝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피를 좋아하는 마족 아니랄까 봐 멜리아 비쉬 역시 마찬가지로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렇습니다. 커티삭에서 남서쪽으로 가다 보면 지하 수렁이라고 이름 붙인 던전이 있다고 합니다. 오크 전사들을 통해 이미 확인을 마쳤습니다.”
어제 순찰을 하면서 몇 번이나 몬스터들을 통해 물어보고 확인한 사실이었다.
거대한 꽃과 이끼 괴물들이 산다는 던전인 지하 수렁은 커티삭에서 사흘 거리 떨어진 숲에 위치해 있었다. 던전이 있는 숲은 숲에 익숙한 다크 엘프들조차도 피해 간다는 지역이라고 하니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호의 대답이 끝나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의 시간 동안 호와 아스트리드 벨은 페릴 예노스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인원은?”
“오크 전사 오백과 고블린 투석병 삼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뒤 다 자른 페릴 예노스의 말에 호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호는 지하 수렁의 공략에 총 팔백의 병사를 투입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커티삭의 재정 상황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이 중 오백 이상은 던전에서 죽어줘야 했다.
그렇다고 던전의 공략을 실패로 돌릴 수는 없었다.
공략에는 성공하지만 무조건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적당한 숫자가 바로 팔백이었다. 그것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고 많은 던전을 공략해 온 호의 노하우를 감안한 상황에서 나온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 수렁을 공략을 마칠 때면 최소한 반 이상의 병사를 지하 수렁에 묻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D등급 던전과 E, F등급 병사, 아니, 랭크의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