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리그너스 대륙전기 024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호는 아리송한 얼굴로 방금 전 자신이 닫은 집무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관심을 가지고 행동을 했다면 커티삭이 지금 이 꼴이 될 리가 없었다.
어쨌든 회계사로 전직한 아스트리드 벨의 능력은 큰 도움은 아니더라도 영지를 발전해 나가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은 될 터였다. 적어도 10포인트에 불과한 자신의 정치 능력보다는 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꽉 막혀 있던 숨통이 조금은 트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임무를 관리하는 영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굉장히 컸다. 그리고 이 세계는 소환자도 영웅으로 취급을 받는 세계였다.
“일단…….”
볼일을 마치고 결과를 아스트리드 벨에게 알려준 호는 뛸 듯이 기뻐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자신에게로 배정된 집무실로 향했다.
2층에 위치한 집무실은 원래 멜리아 비쉬가 쓰던 곳이었는데, 그녀는 현재 호에게 자신의 모든 일을 떠넘기고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쨌든 고풍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놓여 있는 집무실은 의외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영지 정보(Status)>
커티삭(개척 도시[E등급])-‘붉은 핏빛의 대지’
인구-3,425
보유 리스-2,140
보유 식량-6,745
병사-오크 전사(E) 704, 고블린 투석병(F) 440
내정 건물-식량 저장고 12, 농장 3, 시장 1
군사 건물–병영 1
리스 생산-360/월
식량 생산-621/월
특산품-없음
“다시 봐도 한숨만 나오네.”
커티삭의 두 영웅에게서 받은 문서들을 책상 모서리에 한가득 쌓아놓은 호는 다시 한번 커티삭의 영지 정보를 확인했다.
언제까지나 한숨을 내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커티삭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리스와 식량 생산량이었다.
커티삭이 한 달 동안 벌어들이는 리스 생산량은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유지비용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역시 상 업시설이야. 병사들의 수 역시 줄여야 돼. 매달 유지비용이 저렇게 나갔다가는 파산이야.’
일단은 돈이 필요했다. 돈이 있어야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건물을 짓고, 고급 병사들을 육성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수의 군대를 유지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도 돈은 필수였다.
더군다나 보유 리스가 마이너스로 변하면 영지는 파산했다.
마을을 이루는 영지민들이 마을을 떠나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커티삭은 다음 달이면 영지가 파산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진짜 재수 없으면 죽을지도 모르지.”
파산한 영지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에게 죽거나 혹은 이때다 하고 기회를 잡아 커티삭에 쳐들어온 엘프나 수인들에게 죽을 수 있었다.
특히 호는 수인들하고는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수인 부대를 전멸시켰고, 그들의 소환자인 함진규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지금쯤 수인들의 영웅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똥 덩어리를 안겨주다니.”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미래를 그리며 호는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쌓여 있는 문서 더미중 하나를 들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돈과 관련된 민원이었다.
다른 문서들도 적혀 있는 내용이 전부 비슷비슷했다. 커티삭에서 생활을 하는 데 불편한 것들이 있으니 건물을 지어달라거나 문제점을 해결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영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해.”
하지만 먼저 확인할 게 있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도 그와 동일하게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영지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정확했다.
페릴 예노스나 멜리아 비쉬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에 비해 신임을 받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세계의 영웅, 특히 변덕이 심한 마족의 영웅은 대하기가 어려웠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호는 쌓인 문서 중에서 한 뭉텅이를 들어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클리어할 수 있는 퀘스트가 적힌 문서들을 찾아 따로 빼냈다.
이왕 마을로 나가는 거 퀘스트까지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든 작업을 마친 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호 씨 계세…… 어디 나가시나요?”
똑똑 소리와 함께 아스트리드 벨이 집무실 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거리로 나가보려고 합니다. 먼저 확인할 게 있어서요.”
“확인이요?”
“네.”
벨의 질문에 호는 간단히 대답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밝아져 있었는데,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입고 있었던 메이드 복장은 온데간데없고, 이 세계에 왔을 때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으음……. 메이드 복이 좀 더 나았으려나.”
하지만 벨의 의상을 자세하게 본 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신분과는 잘 어울리는 드레스였지만, 활동하기에는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군데군데 찢어진 곳도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호의 시선을 느낀 아스트리드 벨이 부끄러운지 까치발과 함께 한쪽 다리를 살짝 뒤로 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세계의 몬스터들은 빨래 실력이 그리 좋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직접 빨래를 하려니…….”
“현대 문명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행위죠. 더군다나 아스트리드 벨 님은 벨기에 연합의 공주이시기도 하셨으니 더더욱 힘드실 겁니다.”
호는 과거 공주였던 그녀의 신분을 높여주는 뉘앙스로 말했다. 호가 생각하는 아스트리드 벨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호의 말에 벨은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빨래는 매일 시녀들이 해주셨거든요. 그런데 거리라면 성 밖으로 나가시는 건가요?”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커티삭에 도착한 이후 성 내부에서만 생활했던 탓에 그녀의 눈동자에는 성 밖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호는 속으로 낮은 신음성을 내었다.
커티삭 밖의 광경은 곱게만 자라온 것 같은 그녀에게는 딱히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계로 끌려왔고,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생활을 해야 한다면 이곳의 실상 또한 보여줄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앞으로 그녀는 자신을 보조해 커티삭의 내정 일을 해야만 했다.
“궁금하시다면 함께 나가실까요?”
“그래도 되나요?”
“네, 하지만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커티삭은 몬스터들이 사는 도시인 만큼 여성이 보기에는 혐오스러운 광경들을 목격할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호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런 호의 행동은 아스트리드 벨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었다.
“전혀 문제없어요.”
그녀의 눈에 담긴 호기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는 벨이 그녀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메이드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영지의 내정에 관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약간의 우쭐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죠. 뭐, 영지를 관찰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만. 알겠습니다. 함께 나가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호는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챙겨 들었다. 아까 전에 골라낸 마을에서 클리어할 수 있는 퀘스트들이 적혀 있는 문서였다.
아마 게임과 비슷한 이 세계의 시스템을 생각해 봤을 때, 그녀와 함께 퀘스트를 완료하면 같이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이 둘인 만큼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도 반으로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스트리드 벨이 메이드로서 하루 종일 일했던 것보다 많은 경험치였다.
그만큼 퀘스트는 이 세계에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퀘스트들은 영지 일을 하다 보면 계속해서 클리어할 수 있었다.
‘쉽게 일을 하면서도 경험치는 오히려 더 많이 획득할 수 있지.’
부엌에서 잡일을 하거나 정원을 손질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치였다. 고된 노동에서 몸이 해방되는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게 분명했다.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자신에게 홀로 다가온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럴 것 같았다.
“그럼 가실까요, 공주님?”
호는 손을 살짝 내밀며 약간의 장난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호의 손을 아스트리드 벨이 미소와 함께 붙잡았다.
* * *
“취이익? 시장? 우리의 음식을 판매하고 짤랑거리는 것을 얻는 곳이라면 커티삭에는 없지만, 다른 위대하신 분들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본 적이 있다. 췩! 우리도 그런 지역을 만들고 싶다.”
“음푸후우우. 우리들의 뿔을 가공해서 판다고? 대단한 무기가 나오긴 하겠지만 커티삭에는 그런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없다. 만약 그런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생기면 커티삭의 명물이 될 거다.”
“어머? 멋진 용사님 아니야. 어때, 오늘은 나와 함께 놀까? 멜리아 비쉬 님도 우리 가게에 있다고.”
“음…….”
아리따운 서큐버스의 말에 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주성의 집무실에서 나와 어디를 갔나 했더니, 서큐버스의 주점에 놀러 간 모양이었다.
호는 몬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는 한편, 찾아낸 퀘스트들을 하나둘씩 클리어해 나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했던 예상은 역시나였다. 이 세계의 영지에서 건설할 수 있는 건물들의 조건 및 필요 자금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동일했다.
심지어 공략본에 나와 있는 팁마저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었다.
공략본에는 커티삭에서 생산할 수 있는 특산품으로 ‘미노타우르스의 장궁’이 있고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와 있었는데, 실제로 미노타우르스를 통해 알아본 결과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만 있다면 미노타우르스의 장궁을 이 영지의 특산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저기 벨 님?”
“자…… 잠시만요. 조금만 붙잡고 있을게요.”
이렇게 몬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호는 자신의 어깨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는 하지만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옆에서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아스트리드 벨 때문이었다.
자신 있게 영주성을 나섰던 그녀는 호가 예상했던 반응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영주성에서 나왔을 때 보여줬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몬스터들이 자신의 옆을 스치고 지나칠 때마다 움찔거리던 모습이 이제는 오들오들 떠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나 엘프 노예가 오크에게 얻어맞는 광경을 본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푸우!”
“꺄아아악!!!”
급기야 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미노타우스르가 별생각 없이 내뱉는 투레질에 깜짝 놀라 비명까지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우?”
커다랗고 순박함이 가득 담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기가 잘못했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에게 말했다.
“영지에 관한 일을 하려면 이런 몬스터들과 친해…… 아니, 친해질 필요는 없어도 관리직이라는 모습은 보여야 할 텐데요.”
“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아스트리드 벨이 계속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타박은 그뿐이었다. 그녀의 저런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가상현실게임을 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취익! 인간 여자? 좋은 냄새가 난다.”
“꺄…… 꺄읍읍!!!”
“어머? 오늘은 여자가 있네? 흐으응. 순결한 냄새가 나는걸? 자기 여자는 아닌가 봐?”
“아…… 아…… 으아아…….”
미노타우르스를 시작으로 오크와 서큐버스, 고블린과 코볼트 등 호가 커티삭의 영지민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벨의 비명은 어김없이 터져 나왔고, 그녀의 사과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그녀가 조금이나마 진정하기 시작한 것은 호가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경험치를 획득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