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23화 (23/522)

# 23

리그너스 대륙전기 023화

“그럴 수밖에요. 여기는 제가 관리하는 곳이기도 하거든요.”

“…….”

왜 메이드 복장을 입고 있나 했더니, 영주성에서 정원사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나라의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의 손길이 닿은 커티삭의 정원은 관리가 굉장히 잘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죠?”

“네?”

속으로 감탄을 하며 정원을 바라보던 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어떻게 해서 마족들의 병사를 이끌 수 있었던 거죠? 게다가 그 문서들은…….”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호가 들고 있는 문서 더미로 향했다. 페릴 예노스가 호에게 떠맡긴 커티삭의 문서들이었다.

호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 선뜻 설명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페릴 예노스가 맡긴 문서들입니다.”

“어…… 어떻게요? 어떻게 그런 괴물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던 거죠? 저는 여기서 정원 관리만 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여자들은 주방에서 잡일만 하고 있는데?”

살짝 인상을 찌푸려졌다. 그녀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좋게 느껴지기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주라서 그런가?’

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의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는 벨기에 연합의 공주라는 고귀한 위치에 있는 신분이라고 했었다.

“호 씨도 저희와 똑같은 소환자가 아니었던가요? 아니면…….”

“아니면?”

“아니…… 아니에요.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단지 저는 어떻게 호 씨가 저들의 병사들을 이끌었고, 또 저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서 여쭤봤어요. 저도……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거든요.”

아스트리드 벨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하지만 호는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자존감을 읽을 수 있었다.

호의 눈동자가 벨이 입고 있는 옷을 빠르게 훑었다.

누가 봐도 메이드 복장이었다. 벨기에 연합의 공주였던 그녀가 부끄러운 복장을 입고 시녀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마족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오크나 고블린과 같은 괴물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요. 저들의 말 한마디에 한마디에 마음을 졸이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인생 말이에요. 이런 거지같은 세상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공주 취급은 아니더라도 사람답게는 살고 싶어요.”

아스트리드 벨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군요.”

그녀의 넋두리에 선뜻 공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전이었다면 말이다.

‘이 세계에는 여신 라헬이 있다.’

호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함진규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아스트리드 벨의 상황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여신 라헬과 그녀의 추종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료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도움을 받고 싶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아스트리드 벨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딘가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제 처지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지식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몬스터들을 통해 들은 내용이니 정확할 겁니다.”

호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일명 테크 트리에 관해서는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가상현실상에서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은 플레이어였다.

“그럴 수가…….”

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 빠져 있었지만, 그녀는 호에게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다.

특히나 경험치를 빠르게 획득할 수 있는 방법과 클래스의 중요성, 그리고 등급이 높은 클래스의 전직 방법 및 어떤 능력치가 이 세계에서 어떤 효율을 보이는지 이야기할 때는 몇 번이나 다시 설명을 해달라고 졸랐을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몬스터들과 대화를 나눠볼 걸 그랬어요.”

“영주성에도 고블린과 오크들은 있을 텐데요? 메이드로 일하는 서큐버스들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먼저 말을 거는 건 너무 무서워서요.”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하아……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무심한 호의 목소리에 아스트리드 벨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보창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하사관이라고 했죠?”

“네. E등급 클래스죠.”

“부럽네요. 저는 아직 F등급인데. 하아. 직업도 하필이면 메이드라니. 처음에는 메이드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변했네요.”

“아마도 본인이 주로 하던 행동이 정보에 반영이 됐기 때문일 겁니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직업이야 어차피 전직을 하면 되니까요.”

“그렇겠죠?”

호가 씩 웃으며 말하자 아스트리드 벨이 가만히 호를 바라보았다. F등급인 그녀에 반해 그는 E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인들을 상대로 그…… 전투를 하셨다고요?”

“네.”

호의 대답에 아스트리드 벨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그 정말로 칼을 휘두르고 그랬어요? 괴물들과 함께?”

“뭐, 그렇죠.”

잠시 고민을 하던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휘두른 적은 없지만 검을 휘두르기는 했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섭죠.”

호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전투는 비록 오크 전사들이 했지만, 그래도 실수 하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만큼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가상현실게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진규.’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서 온 소환자의 이름이 떠오르자 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와 비슷한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호가 함진규에 대해 떠올리는 동안 아스트리드 벨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심란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이 세계에서 안전해지기 위해서, 혹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경험치를 얻어 능력 포인트를 올리는 것은 동일할 텐데 말이야.’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아스트리드 벨

2. 성별 : 여(23)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7

6. 직업 : 메이드(F)

7. 세부 능력

통솔 : 10/10(F) 무력 : 8/10(F)

지력 : 10/10(F) 정치 : 10/10(F)

매력 : 10/10(F)

8. 특성 : 획득하고 있는 특성이 없습니다.

9. 스킬 :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없습니다.

‘호오? 제법……?’

아스트리드 벨의 정보를 살펴본 호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전직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능력치는 골고루 높은 편이었다. 열심히 경험치를 얻어 능력 포인트에 투자를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 호의 눈에 아스트리드 벨의 정치 포인트가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호의 눈동자가 자신이 들고 있는 문서 더미로 향했다.

영지의 불만, 혹은 영지민들의 의뢰들이 적혀 있는 이런 문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능력치가 아닌 정치 능력이 높아야 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을 토대로 현재 커티삭의 상황을 표현한다면 완전히 엉망이나 다름없는 영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나마 정치에 관련된 직업이나 특성, 혹은 스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가 있기는 하지만…….’

서큐버스인 그녀들이 자신의 명령, 아니, 제안에 따라 커티삭의 내정에 관여한다?

호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호가 보기에 그녀들은 커티삭의 내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영지를 이 상황으로 만들어놓지도 않았을 터였다.

현재 호의 정치 능력은 10에 불과했다. 하사관의 직업 등급은 E등급이었지만 정치 능력은 페널티를 받은 F등급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호가 수많은 영지를 관리하고 발전시킨 경험이 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벨을 정치와 관련된 직업으로 전직을 시키면?’

커티삭을 발전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든 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레벨과 능력 포인트를 빠르게 높이기 위해서는 경험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경험치를 가장 많이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전투지요. 하지만 아스트리드 벨 님은 직접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시는 것은 싫으시겠지요?”

“……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선택의 신전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을 떠올리면 그럴 만도 했다.

호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클래스로 전직을 하는 것은 제외해야겠고……. 영지의 내정과 관련된 직업은 어떻습니까?”

“영지의 내정에 관련된 직업 말인가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영지를 관리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특화된 직업입니다. 일종의 공무원이라고 하면 되겠군요.”

“공무원……?”

“그렇습니다. 영지를 경영하고 관리하는 데 꼭 필요한 인재들이죠. 마침 잘됐네요. 만약 벨 님이 내정 쪽에 관련된 직업으로 전직을 하시게 되면 제가 어느 정도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할 일이 굉장히 많아졌거든요.”

“무슨 뜻이죠?”

호는 자신이 들고 있는 문서 더미를 아스트리드 벨에게 보여주었다. 낯간지럽긴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문서 더미들을 본 벨이 의욕 넘치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트리드 벨 님이 커티삭의 영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페릴 예노스 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권한을 저에게 맡긴 만큼 반대하시지는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적어도 고블린들과 함께 정원을 손질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하루에 획득하는 경험치도 더욱 많아질 테고요.”

“…….”

호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왠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에 약간의 죄책감도 느껴지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감았다가 다시 뜬 호는, 똑바로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일단은 제가 벨 님에게 추천하는 E등급 클래스가 몇 가지 있기는 한데…….”

대답을 기다리는 호의 눈으로 아스트리드 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경험치로 레벨을 높였고, 그 자리에서 내정과 관련된 정치 능력에 메리트를 받는 E등급 클래스 회계사로 전직했다.

* * *

회계사로 전직한 아스트리드 벨을 뒤로한 호는 방금 전 자신이 나온 페릴 예노스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는 여전히 집무실에 있었다.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스트리드 벨의 일을 말하고 영지의 내정 일을 함께 해도 되겠냐는 호의 부탁은 순식간에 통과되었다. 혹시나 페릴 예노스의 심경을 거스를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던 게 허탈한 정도로 말이다.

“…….”

집무실의 문을 닫으며 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전 페릴 예노스가 말한 ‘귀찮으니까 알아서 해’라는 대사가 아직도 머릿속에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어기적어기적 자신의 침실로 향하기까지 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