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리그너스 대륙전기 022화
커티삭은 평소와 달리 굉장히 떠들썩했다. 수인들과 전투를 벌인 오크 전사들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고블린과 오크, 서큐버스와 미노타우르스 등 커티삭에 사는 몬스터들이 승전보를 듣고는 대부분 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전투의 증거로 갑옷에 말라붙은 핏자국들과 수인들의 무기가 실린 수레를 끈 오크 전사들이 커티삭으로 귀환했다.
“취이익! 췩!!”
“케르륵! 케륵!!!”
선두의 오크가 성문에 들어서자 환호성으로 생각되는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오크들이 자신들의 가슴을 쭈욱 펴며 연신 거친 콧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커티삭에 도착한 호는 몬스터들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곧바로 커티삭의 지배자 페릴 예노스가 있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 무엇보다도 영주인 페릴 예노스에 대한 보고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해본 까닭에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절차에 관해서는 호가 가상현실게임에서 플레이했던 인간족이 가장 까다롭고 복잡했다. 그에 반해 마족은…….
“커티삭의 모든 몬스터에게 존경받는 지배자 페릴 예노스 님에게 인사드립니다.”
부드럽게 주먹을 쥔 오른손을 경례를 하듯 심장에 가져다 놓은 채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러고는 30도 각도로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가볍게 숙인다. 그때 왼팔은 각이 잡힌 모양새로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누른다.
이게 바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게임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주군 혹은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이 필히 연습을 해야 할 자세이기도 했다.
“…….”
“…….”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호의 행동에 페릴 예노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옆의 멜리아 비쉬에게 향했다. 하지만 멜리아 비쉬의 표정 또한 페릴 예노스와 다를 바 없었다.
“하! 하아아아?”
“큽. 푸하하하하!!!”
호를 바라보는 페릴 예노스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지어졌다. 이어지는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멜리아 비쉬였다. 급기야 끅끅거리는 멜리아 비쉬의 얼굴에는 재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꼬리가 마치 먹이를 쫓는 고양이처럼 파닥파닥거렸다.
“커티삭의 녀석들이 나를 무서워하면 무서워했겠지, 존경이라니? 그건 무슨 개소리야? 내가 인간이야? 그냥 잘 다녀왔다고 하면 되지, 웬 느끼한 예의?”
“그래도 아주 완벽한 인간들의 방식이었습니다. 흡사 골든 크로우의 로얄 나이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을 정도로 말이죠. 크흐흐흡.”
여전히 멜리아 비쉬의 입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저런 인사를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쟤는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웠대?”
“……선택의 신전에서 배웠습니다.”
페릴 예노스의 혼잣말이었지만 자신에 대한 질문과도 같이 들렸기에 잠시 고민을 하던 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게임에서 배웠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선택의 신전이라는 말에 두 서큐버스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나름 페릴 예노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마음먹고 한 행동이었지만 큰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마족과 인간의 절차가 똑같을 리 없었다.
그래도 페릴 예노스의 얼굴에 짙게 웃음이 걸려 있고, 멜리아 비쉬 역시 재미있다는 듯 꼬리를 통해 감정을 나타내는 걸 보면 조금은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고생했어. 의외긴 해도 내 예상보다 잘했어. 이 소식을 들은 멍청한 고양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뜨거워질 정도야.”
“감사합니다.”
페릴 예노스의 칭찬에 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굳이 자신의 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멍청한 고양이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겠어. 지들이 키우던 애들도 죽고, 지휘하던 녀석도 죽었으니.”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오히려 환영이지!”
페릴 예노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살짝 꺾었다. 마족들은 결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쨌든 좋아. 처음보다는 더욱 쓸 만해졌는걸? 이제는 이것저것 맡겨도 되겠어.”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은 페릴 예노스가 더욱 몸을 기댔고, 호는 그녀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는 그녀가 자신에게 더욱 많은 오크 전사나 고블린을 맡긴 후 커티삭에서 내보내 주기를 원했다. 부하들을 이용해 커티삭의 이벤트 및 퀘스트를 공략하다 보면 경험치를 빠르게 올릴 수 있었고, 그렇게만 되면 D등급 클래스로 전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 터였다.
“흐음……. 아, 이게 있었네.”
입가에 웃음기를 띠고 있던 페릴 예노스의 표정이 굉장히 진지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문서 더미를 향해 있었다. 문서 더미를 바라보는 페릴 예노스의 표정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탁월하신 생각입니다.”
멜리아 비쉬 역시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 * *
“나, 참.”
페릴 예노스의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커티삭의 영주는 호에게 병사들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에 엄청난 양의 문서 더미를 선물로 주었다. 그녀가 처리하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멜리아 비쉬가 처리하던 문서도 함께였다.
‘인간들의 나라에는 이러한 일을 중점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 내무부장관이었나?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고. 앞으로 너한테 커티삭의 내정을 맡기도록 하지.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제대로 처리해야 돼.’
선심을 쓰듯 문서를 건네주며 뿌듯한 표정을 짓던 페릴 예노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큰 숙제에서 해방된 초등학생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멜리아 비쉬도 마찬가지였다. 외알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호에게 문서를 건네주며 ‘이제 놀러 갈 수 있겠어’라고 혼잣말을 하기까지 했다.
띵동.
-전공 확인이 끝나 경험치 42를 획득했습니다. 커티삭의 영주 페릴 예노스의 허락에 따라 이제부터 커티삭 영지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지 정보라는 새로운 정보창이 오픈되었습니다.
-영지 발전 명령이 가능해집니다. 단, 커티삭의 영주 페릴 예노스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호의 눈앞에 몇 개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까지 확인한 호가 눈동자를 빛냈다.
“나쁘지는 않네. 아니, 오히려 좋은 건가?”
페릴 예노스가 어느 정도까지 권한을 허락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커티삭의 영지 발전에 대해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였다. 자신의 영지는 아니지만, 허락만 있다면 커티삭을 자신의 입맛대로 꾸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지 개발은 호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영지 정보(Status)>
커티삭(개척 도시[E등급])-‘붉은 핏빛의 대지’
인구-3,425
보유 리스-2,140
보유 식량-6,745
병사-오크 전사(E) 704, 고블린 투석병(F) 440
내정 건물-식량 저장고 12, 농장 3, 시장 1
군사 건물–병영 1
리스 생산-360/월
식량 생산-621/월
특산품-없음
그리고 커티삭의 영지 정보를 살핀 호는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예상은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영지의 정보를 확인한 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엉망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호의 기준에 커티삭은 버려도 되는 영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화폐라고 부를 수 있는 리스의 생산량은 물론이고, 식량의 생산량조차도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식량 생산이 늘어난 수확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티삭의 식량 생산량은 천을 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병사는 무려 천이백이나 되었다.
“자…… 잠깐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기시감에 영지의 정보를 살펴보던 호는 이마를 찌푸렸다.
“대체 저 병사들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거지?”
병사들의 등급이 낮다고 해도 저들의 유지비가 공짜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먹는 식량과 무기의 구입비용, 유지비용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리고 호가 기억하는 오크 전사의 한 달 유지비용은 2리스, 고블린 투석병도 최소 1리스는 필요했다.
호는 머릿속으로 병사들의 유지비용을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결국 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매달 1,900리스 안팎의 돈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다음 달 뒤면 영지 파산이잖아?!”
그리고 계산을 마친 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에게 달려가 정치력 수치는 폼으로 달려 있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영지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도 놀고 싶다고 흥얼거리는 그 정신 상태가 궁금해졌다.
그들이 건네준 문서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벌써부터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어? 메이드…… 복?”
짧은 치마에 미니스커트. 거기에 가터벨트가 덤으로 따라붙어 서큐버스의 취향이 100% 가미되었다고 생각되는 옷을 입은 여성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메이드 복을 입은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메이드의 정체는 벨기에 연합의 공주라는 아스트리드 벨이었다.
“저라고 입고 싶어서 입는 건 아니에요.”
“아…… 네.”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오신 걸 축하드려요. 최근 안 보이셔서 조금 걱정을 했어요.”
“……걱정이요?”
호가 의아한 얼굴로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벨이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당신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같은 소환자잖아요?”
“그…… 그렇죠?”
벨의 말에 호는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잠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그녀의 눈동자가 호의 품 안에 있는 문서들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미소를 싱긋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던 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스트리드 벨을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호는 어느새 꽃과 식물들이 보이는 장소에 있었다.
‘이런 장소가 있었던가?’
호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영주성의 정원으로 생각되는 장소로 보였는데, 마족의 성에 화사한 꽃들이 있는 광경은 호의 눈에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랬다. 호의 느낌상 그녀는 결코 이런 꽃들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페릴 예노스가 좋아하는 꽃이에요. 무시무시한 행동과는 다르게 예쁜 꽃을 좋아하더라고요. 역시 여자는 여자인가 봐요.”
“그…… 그렇군요. 잘 아시네요?”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벨의 말에 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호의 눈에 거칠어져 있는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