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리그너스 대륙전기 021화
백여 마리의 수인과 전투를 치르면서 호의 병사들 역시 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서른이 조금 안 될 정도로 피해 규모가 크지 않았다.
수인 부대의 주력 병종 다람쥐 병사와 오크 전사 간의 능력 차이 때문이었다. 거기에 기습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1,385.’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호는 이번 전투를 통해 도합 1,385라는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 역시 전투가 쉽고 많이, 그리고 가장 빠르게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았다.
“후…….”
눈앞에 보이는 많은 양의 경험치에 기분이 좋아질 법도 하련만 호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주원인은 바로 여신 라헬이었다. 함진규가 죽고 난 후 일어났던 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만약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진짜로 골치 아픈데…….”
특히나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스토리처럼 이 세계에서도 여신 라헬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뻔히 눈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여신 라헬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플레이어, 아니, 소환자들을 이용하려고 그런 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분명 그녀의 추종자인 신족, 그리고 라헬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있는 엘프족과 드워프족과도 트러블이 벌어질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나라 중에는 신성 교국도 있었다. 인간들 전부는 아니지만 반 정도는 여신의 추종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상황은 단순한 소환자. 그것도 갓 E등급 클래스에 진급한 소환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영향력이 닿는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후우.”
한숨과 함께 자신의 정보를 살펴보던 호는 1밖에 남지 않은 정치 수치에 가장 먼저 경험치를 투자했다. 그리고 410의 경험치를 동원해 무력 포인트를 30까지 올렸다. 함진규의 공격에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력 포인트가 점점 높아질수록 호는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0이라는 무력 포인트에 +1 강화된 강철 검의 능력치까지 더해 호의 무력은 34. 이 정도면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E등급의 영웅 혹은 동급의 플레이어의 공격에 단숨에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터였다.
“올리는 것은 어려웠는데 쓰는 건 정말 쉽네.”
업적으로 인해 4배나 되는 경험치 보너스를 받아 최종적으로 800이 넘는 경험치를 획득했지만 이제 남아 있는 경험치는 445. 고작 몇 개의 포인트를 상승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반이나 넘는 경험치를 사용해 버렸다.
“순식간에 쑥쑥 사라지네.”
괜스레 투덜거리며 호는 남아 있는 경험치는 모두 레벨에 투자했다. 당장 통솔 수치를 올려봤자 별달리 달라질 것도 없었기에 우선순위를 뒤로 민 것이다.
어쨌든 E등급 클래스의 레벨 한계는 능력 포인트와 마찬가지로 30. 하사관 또한 E등급 클래스인 만큼 호는 최종적으로 레벨을 30까지밖에 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레벨 30을 달성하고 남은 경험치는 달랑 35에 불과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력을 10까지 올린 호는 16이라는 자신의 남은 경험치를 확인하고는 상태창을 닫았다.
레벨과 무력을 크게 상승시켰고 정치와 매력 포인트까지 조금이나마 올리며 크게 성장했지만 호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전부 여신 라헬 때문이었다.
* * *
“케륵! 케르르륵! 급보! 급보!!!”
고블린 하나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에이 씨! 시끄럽게!”
그와 동시에 영지 업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무실의 책상 위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페릴 예노스의 이마에 삐죽하고 십자 혈관이 튀어나왔다.
잠시 후,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와 비명이 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집무실 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히끅!!!”
그리고 마침 운 나쁘게 집무실을 청소하고 있던 아스트리드 벨은 페릴 예노스의 채찍에 얻어맞고 죽은 듯 나자빠진 고블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딸꾹질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만 했다.
뜯긴 살점과 함께 녹색의 피가 바닥을 적시는 끔찍한 모습은 아직 이 세계의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한 벨에게는 직접 마주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당장에라도 비명과 함께 주저앉고 싶었지만 벨은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악마의 기분을 거슬렸다가는 자신도 고블린과 같은 꼴이 될 거라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소환자라 불리는 자신들은 약간의 흥미를 주는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 저거 가져와.”
“네? 네.”
페릴 예노스가 자신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이자 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예노스가 가리킨 것은 밀랍으로 봉인된 양피지였다. 기절한 고블린은 페릴 예노스에게 저 문서를 전해주기 위해 집무실에 온 것 같았다. 비록 그 끝은 좋지 않았지만.
‘나도 조심해야 돼.’
기분에 거슬린다고 부하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만든 괴물이었다.
그렇게 기절한 고블린의 손에서 양피지를 빼낸 벨은 조심스레 페릴 예노스에게 문서를 전달하고는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다행히 양피지의 내용에 시선을 빼앗겼는지 페릴 예노스는 벨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 예노스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벨은 걸레질을 하는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매일 커티삭의 성에서 잡일을 하고 획득한 소량의 경험치로 조금씩 능력 포인트를 올리며 레벨을 높이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이 세계는 낯설었고, 위험했으며, 매일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그럴 때일수록 의지가 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신세인 소환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커티삭에는 다섯 명, 아니, 이제는 세 명의 소환자뿐이었다.
‘대체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거지?’
벨은 커티삭에 도착한 소환자 중 유일한 남성이자 자신을 윤호라고 밝힌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을 떠올렸다. 그가 페릴 예노스의 명령에 따라 괴물들과 함께 성 밖을 떠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스멀스멀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끔찍한 생각에 벨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위험했고, 이곳에 살고 있는 지성체들은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상대를 해코지하는 괴물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호오?! 이 녀석 제법이잖아?”
“히끅!”
양피지의 내용을 읽어가던 페릴 예노스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튀어나온 벨의 딸꾹질에 샛노란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끄러우니까 그만하고. 가서 멜리아 좀 불러와.”
“네……? 네! 네, 알겠습니다!”
페릴 예노스의 명령에 아스트리드 벨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 성의 또 다른 악마인 멜리아 비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와는 달리 멜리아 비쉬는 소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멜리아 비쉬 또한 페릴 예노스와 마찬가지로 손가락 하나로 자신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악마일 뿐이었다.
* * *
“벌서 한 달인가?”
커티삭에서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며칠 전 보냈던 전투 보고 때문인 모양이었다.
오크 전사가 건네준 명령서의 내용을 읽은 호는 재빠르게 부대를 정비해 커티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취에에엑! 호! 호!!!”
“취익!!! 호!!!”
커티삭으로 향하는 동안 수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백여 마리의 오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의 이름을 높이 외쳤다. 수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그들만의 의식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
그리고 오크들이 한 번씩 외칠 때마다 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수인족과의 전투에서 제대로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인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것은 오크 전사들이었지 자신이 아니었다.
‘은근히 많은 일이 있었네.’
유익한 출정이었다. 커티삭 북서쪽의 근처에 있는 모든 퀘스트와 이벤트를 완료했고, 수인들과 전투까지 벌었다. 거기에 평행 세계가 아닌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서 이곳으로 소환된 사람과도…….
“후.”
눈을 부릅뜬 함진규의 마지막이 떠오르자 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윤호
2. 성별 : 남(27)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30
6. 직업 : 하사관(E)
7. 세부 능력
통솔 : 19/50(D)
무력 : 30(+4)/30(+4)(E)
지력 : 11/30(E)
정치 : 10/10(F)
매력 : 10/30(E)
8. 특성 : 부대 강화
9. 스킬 : 호통
커티삭에서 출정하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부 능력이 많이 상승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특히나 함진규가 사라진 모습을 본 이후로는 더더욱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전직밖에 없겠지.”
호는 말을 타고 이동을 하면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공략본을 눈앞에 띄웠다. 현재 자신의 직업은 E등급인 하사관이었고, 레벨도 E등급 클래스가 상승시킬 수 있는 최대 한도인 30까지 올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호는 다음 전직은 하사관의 상급 직업인 상급 사관으로 할 생각이었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따르면 상급 사관은 하사관과 비교해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된 직업으로 소규모 전투나 회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수인들과의 전투를 통해 병력 강화 효과를 받는 병사들이 전투에서 어떤 위력을 보이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참이었다. 백여 마리에 가까운 수인을 상대로 오크 전사는 서른이 조금 안 되는 사망자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상급 사관의 전직까지는…….”
호의 손이 빠르게 허공을 훑자, 상급 사관 전직에 필요한 내용이 호의 눈앞에 나타났다.
[상급 사관(D)-대륙을 누비며 적국의 부대를 상대하는 선봉대장인 상급 사관은 하사관의 상급 직업으로 많은 수의 부대를 지휘하는 데 특출한 능력을 보입니다. 하사관과는 다르게 이들은 전술적으로도 뛰어난데다가 용맹스럽기까지 합니다. 전투 시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20% 상승한다.
전직 조건-전 종족 가능. E등급 하사관의 직업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레벨 30, 통솔 수치 50, 무력 수치 30, 지력 수치 30, 정치 수치 10, 매력 수치 15를 만족할 경우 전직 가능.]
“하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보니 답답하네.”
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름대로 많은 경험치를 투자해 능력을 높였다고 생각했는데, 상급 사관으로 전직을 하려면 그 이상의 경험치가 필요했다. 특히나 통솔 수치를 50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는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모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두어 번 더 이런 전투를 치르면 전직이 가능하려나?”
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수인과의 전투에서 예상 이상으로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업적으로 인해 획득 경험치가 뻥튀기되었기 때문이었다.
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시간만이 해결해 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