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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0화 (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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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20화

“명령이라면 안테 로리의?”

“아, 네. 여성 묘인 영웅이 얼마나 표독한지……. 그래도 최근에는 조금 친해진 감이 있어서 버틸 만은 한데……. 파리 목숨이라는 것은 여전하지요.”

함진규는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무의미한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호는 집중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위를 포위한 오크 전사의 존재들로 인해 주로 묻는 이는 호였고, 대답은 함진규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호와 함진규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안테 로리의 영주는 리아 캬베데라는 묘인족인데요.”

함진규의 말에 따르면 수인족의 도시 안테 로리에는 그를 제외하고 셋 명의 영웅이 주둔하고 있다고 있었다.

안테 로리의 영주이자 총대장이라 불리는 영웅의 이름은 리아 캬베데. 무려 A등급 영웅으로 호가 알고 있는 영웅이기도 했다.

‘그 리아 캬베데가 원래는 안테 로리의 영주였어?’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시절, 준수한 능력치로 인해 나름 애정을 주었던 영웅이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전쟁터에서 그녀를 만나 부하로 만들었었기 때문에 그녀에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함진규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진행될수록 호의 얼굴에 생겨난 호기심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거 곤란한데…….’

그런 호의 변화를 함진규는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크들을 이끌고 있는 남자는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손가락에 담배를 한 대 끼우고 있었다. 이 세계로 끌려오기 전 가지고 있었던 담배 두 갑은 함진규가 가장 애용하는 물품이었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더군요. 아껴 피우던 건데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아뇨. 담배는 피우지 않아서요.”

사실 피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무언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호는 함진규가 담배를 꺼내는 입에 무슨 모습을 바라봤다.

‘역시…….’

함진규가 지니고 있는 담배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에는 없는 물건이었다. 이 드넓은 대륙에 담배를 특산품으로 보유한 영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표가 붙어 있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담배의 상표는 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브랜드였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함진규의 코에 피비린내가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화면을 살펴봤더니 자신의 부대가 전멸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

그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예상은 했지만, 그 많던 병사가 전부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여기에 남아 있는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그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살 수 있겠지?’

함진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오크 부대를 이끌고 있는 남자의 인상은 평범해 보였다.

이왕이면 마음이 여린 여자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마족 영웅이거나 괴팍한 성격의 소환자가 대장이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몸이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꿀꺽…….”

게다가 긴장을 풀기에는 너무 이른 상황이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생물학도였던 함진규는 자신이 배웠던 진화론에서 다윈이 주장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은 자신처럼 이 세계에 잘 적응한 소환자인 게 분명해 보였다. 마족의 오크 부대를 이끌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사람을 밥 먹듯이 죽여본 사람이거나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자신들이 이곳으로 온 한 달 내에 본성이 쉽게 변할 리 없었다.

아무리 환경이 변했어도 사람을 죽이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거 뭐라도 이야기를 꺼내야 할 텐데…….’

담배를 꺼낸 게 실수였던가? 숲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고, 그 침묵은 함진규에게 불안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담배가 전부 타들어갈 때까지 호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앉아 있었다. 함진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취익! 췩!!!”

게다가 십여 미터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오크들의 거친 콧바람 소리 역시 함진규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오크들을 만나기 이전으로 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만약 호라는 이름의 저 청년이 오크들에게 명령만 내리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

함진규의 눈동자가 그의 허리춤에 걸린 무기에 잠깐 머물렀다.

이것을 이용해 눈앞의 상대를 제압하면 확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이익!

함진규는 다시 한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호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

“취익! 췩!”

“취이이익!”

다시금 들려오는 오크의 거친 숨소리가 함진규에게 또 한 번 압박감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함진규는 조심스레 좀 전에 획득한 경험치를 이용해 전직을 하고 남은 수치를 모두 무력에 투자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무력 포인트는 14, 눈앞의 남자는 10이었다. 4의 차이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수치가 자체가 높다는 게 중요했다.

오크 전사들의 개입이 없다면 충분히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다시 입에 문 담배는 타 들어간 지 오래였다.

“후우…….”

그리고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가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칼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

호의 눈동자가 자신의 허리춤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본 함진규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칼을 던졌다.

“죽어! 이 새끼야!”

퍼어억!!!

이어서 둔탁한 소리와 오크들의 고함이 숲속에 울려 퍼졌다.

“…….”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호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함진규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충격,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게 함진규가 느낌 마지막 감정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오크의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제길…….”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호는 몸을 돌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하필이면 부릅뜬 함진규의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생존에 대한 욕구도.

“씨발.”

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담배가 땡겼다. 하지만 쓰러진 함진규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소환자이자 유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죽이려고까지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진규는 자신이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하는 영웅이 아닌 소환자이며 부득이하게 이 세계에 끌려온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강조했었다.

주르륵.

“어…….”

무언가 흐르는 따끔한 느낌에 호는 손을 들어서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다. 붉은색의 찐득거리는 액체가 손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함진규가 던진 칼을 피하며 생겨난 상처였다. 만약 조금만 더 가까운 거리였다면 죽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

“취이익!!!”

“취엑!”

퍼억! 퍽!

자신들의 대장을 공격했다는 분노 때문일까? 오크 전사들이 무기로 함진규의 몸을 난도질하는 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그중 한 오크 전사가 호를 향해 두 손으로 검을 건넸다. +1 강화된 강철 검이었다.

“내가 이걸 들고 있었어도 그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함진규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강화된 강철 검의 착용을 해제했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함진규는 자신의 무력 수치를 확인하고는 모든 경험치를 본인의 무력 포인트를 높이는 데 열중했다. 그것도 근접전이 뛰어난 E등급 클래스로 전직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목숨을 잃었다.

“……돌아가자.”

“취이익!!! 췩!!”

“옥스 아너!!!”

호가 몸을 돌리자 오크 전사들이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특유의 콧소리를 환호성을 질렀다. 찝찝함이 온몸을 차지하고 있는 호와는 달리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차지한 그들의 환호는 주둔지가 있는 식량 창고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띵동.

-수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E등급 플레이어 함진규가 사망했습니다.

-‘어서 와, 전투는 처음이지?’의 업적 보상으로 승리한 전투에서 얻은 경험치를 두 배로 획득합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의 업적 보상으로 승리한 전투에서 얻은 경험치를 두 배로 획득합니다.

막사에 도착한 호는 눈앞으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전투 승리 보상이었다. 수인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로 인해 업적을 두 개나 달성했고, 그 보상으로 획득한 경험치가 무려 네 배나 상승해 있었다.

“……큭.”

그러나 메시지를 확인한 호의 기분은 아까 전보다도 더욱 엉망이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업적이었다. 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혹은 플레이어들끼리 이 세계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예상하고 만들어낸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취이익! 췩췩!”

타이밍 나쁘게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밖으로 나가니 오크 전사들이 자신들이 난도질했던 함진규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짜증과 함께 병사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아아!!!

시체로 변한 함진규의 몸이 은은한 빛으로 감싸이고 있었다.

‘뭐지……?’

이상한 느낌과 함께 불안감이 든 호는 재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오크들이 앞으로 나서 호의 주위를 철통같이 방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진규의 몸을 감싼 빛무리는 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생각이 없다는 듯 오로지 함진규의 몸 위에서만 빙글빙글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어서 함진규의 시체 역시 서서히 가루로 변해 빛무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함진규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그가 흘린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비로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봤었던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진 탓이었다.

“……대체 어디서 봤지?”

하지만 좋은 의미로 봤던 장면은 아닌 것 같았다. 온몸에 불쾌함이 가득 맴돌고 있었다.

“어어?!”

그렇게 오크들의 호위 아래에서 기억을 떠올리던 호는 뇌리로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며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빛무리가 떠난 쪽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이런 씨발, 설마?!”

방금 전의 모습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악명이 자자한 캐릭터인 여신 라헬이 자신을 창조한 리그로우와 세리너스를 제거하기 위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영웅들을 흡수하던 모습과 흡사했다.

실제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유저가 엔딩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라헬이 등장해 통일을 방해를 했다.

진 엔딩까지 본 유저들의 말에 따르면 라헬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힘을 넣기 전까지는 대륙이 계속해서 혼란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라헬이…… 씨발! 어쩐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어디론가 사라진 빛무리의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여신 라헬이 있는 곳일 게 분명했다. 바로 천족들의 수도 프리테븐일 터였다.

“설마. 내가 실수한 건가?”

호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함진규를 죽인 게 오히려 라헬에게 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여신 라헬이라면, 분명 소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이용해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호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선택의 신전에서도 많은 소환자가 죽어나갔지만 방금 전 함진규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모습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환자끼리 죽이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몰라.”

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그렇게밖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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